96화
<습격 (1)>
말락과 함께 온 검의 낙원의 생도들은 눈치가 좋았다.
대번에 말락이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는 걸 눈치채고 그대로 네르하를 제재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먼저 손을 댄 건 저놈이야!”
“말락 경을 구해!”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너, 너희들! 가만히 있어!”
“저놈을 조져 버려!”
그들이 눈치가 좋은 건 맞지만 좀 어중간하게 좋았다는 게 문제였다.
말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노한 그들은 네르하의 왜소(?)한 모습을 만만하게 보고 말았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그래도 최후의 이성을 잃지는 않았는지 그들 중 세 명만이 뛰쳐나와 네르하에게 달려들었다.
“바스톤, 넌 나서지 마라.”
네르하는 막 튀어 나가려는 바스톤을 제지하며 나섰다.
“윽! 아, 알겠습니다.”
간만에 주먹질 좀 해 보려나 싶던 바스톤은 아쉬워하며 주먹에 힘을 풀었다.
‘어디 실력 좀 볼까?’
저들이야말로 검의 낙원의 평균적인 기량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상대일 것이다.
상대는 단번에 제압할 심상이었는지 곧바로 세 방향으로 나뉘어 그대로 네르하의 어깨와 허벅지를 향해 팔과 다리를 내질렀다.
‘호오?’
상대를 제압하려는 의도가 명확히 느껴지는 합격.
그 수준은 아직 조잡했지만 합격진이라고 느껴질 만하다는 점에서 점수를 높게 쳐주고 싶다.
‘기초적인 삼재진 수준이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아.’
네르하는 가볍게 상대의 투로를 피해 놈들의 진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지금 이곳에는 바스톤만이 아니라 네르하에게 맡겨진 실전 마법 연구회의 선배들까지 있다.
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려면 최대한 놈들을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편이 좋았다.
“금방 끝내주지.”
“엇?”
“어어?”
“절대적인 속도 문제야 어쩔 수 없다지만 호흡이 반박자 늦는군.”
퍽!
네르하는 호흡이 맞지 않는 한 녀석의 허벅지를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크윽!”
“제임스!”
볼썽사납게 널브러진 제임스란 이에게 시선이 쏠린 그때.
“넌 시선 처리가 너무 노골적이야. 상대에게 공격 방향을 고스란히 알려 주고 있으니까.”
퍼퍽!
어깻죽지를 얻어맞은 다른 하나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며 등을 구부렸고.
“그나마 넌 조금 괜찮지만 하체를 더 단련해야겠어.”
마지막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자 세 명은 그렇게 단숨에 무력화되었다.
“이 자식이!”
분노에 가득 찬 나머지 녀석들이 막 달려들려던 찰나.
“모두, 멈춰!”
식은땀을 흘리며 어깨를 부여잡은 말락이 나머지 일행들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마, 말락 경.”
말락은 네르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외쳤다.
“저 셋이 당한 걸 보고도 못 느꼈냐? 그리고 승패를 떠나 여기서 너희들까지 달려들면 더 이상 수습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돼!”
우득! 우드득!
말락은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마나를 집어넣었다.
네르하는 그런 말락의 무식한 짓거리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풀려고 하다간 관절과 혈관이 상한다.”
“기사로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
놈이 다치든 말든 네르하로선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저렇게 패기롭게 구는 모습을 보니 제법 마음에 들려고 한다.
‘패기와 만용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나름 기개는 있는 녀석이군.’
씨익!
네르하는 천천히 말락에게 다가가 그대로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 느껴 봐라.”
체내에 침투한 마나가 어떤 식으로 풀리는지.
그걸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음 경지를 개척할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물론 잠깐의 감각만으로 실마리를 찾으려면 녀석의 재능과 실력이 그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스스스스!
어깨를 묵직하게 누르고 있던 마나가 서서히 풀려나면서 말락의 어깨에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헉! 허억!”
평생 불구가 될 것만 같았던 아찔한 감각.
말락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네르하를 괴물 보듯이 바라보았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말락의 태도가 급격히 공손해졌다.
“내 머리카락 색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나?”
“당신이 네르하 라데우스라는 것은 사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네르하 라데우스는 절대 당신 같은 실력자가 아닙니다.”
마법 실력을 볼 필요도 없다.
저 삼인방을 제압한 한 수만으로도 저쪽이 자신보다 몇 수는 위에 있는 괴물이라는 걸 눈치챌 수가 있었다.
“전 눈앞에 보인 현실을 부정할 정도로 멍청이가 아닙니다.”
말락은 지금 상황이 대차게 꼬였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이런 괴물과 시비가 붙었다고? 시라스 녀석, 대체 어떻게 하려고!’
네르하가 말락을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네가 멍청하든 말든 그건 상관없다.”
꿀꺽!
“너희들이 왜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궁금할 뿐이지.”
말락은 대번에 입을 다물었다.
“물론 명령을 받았다는 건 알아. 아까 아녜스의 입에서 나온 시라스라는 놈이 원흉이겠지. 하지만 그래도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너 정도 위치라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상명하복이 확실한 군대 같은 조직이라 해도 검의 낙원은 진짜로 군대가 아니다.
경쟁 상대의 터전에서 난리를 피우는 것에 대한 리스크가 어느 정도인지는 말락 역시 알고 있을 터.
“그, 그게…….”
말락은 고민했다.
이목이 완전히 쏠린 이런 자리에서 자백했다간 검의 낙원 내에서 자신의 입지는 끝장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상대가 압박을 가하더라도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럼 조금 말하기 편하게 해 주지.”
네르하는 살짝 마나를 움직여 그대로 차음막을 둘렀다.
이 막은 주변의 다른 이들이 절대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얇고 은밀했다.
한순간 주변의 감각이 뒤틀리는 걸 알아챈 말락의 얼굴이 숫제 피가 빠질 정도로 창백해졌다.
“헉! 사운드 블록? 당신이 어떻게 이런 고급 기술을?!”
수인이나 주문이 없는 걸 보면 절대로 마법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마나를 제어해 소리를 차단하는 것은 최소 초인의 상징인 귀왕제성신(鬼王帝聖神)으로 일컬어지는 5단계에 발을 들여야만 가능한 수법.
“좋아. 이제 말할 수 있겠지?”
“크, 크윽!”
여기서 또 자존심을 세웠다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까놓고 네르하가 이곳에 있는 전원을 병실로 보내버린다 해도 말락으로선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의외로 말락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왔다.
“모릅니다.”
“모른다고?”
‘말하지 않겠다가 아니라 ‘모른다’라고?’
말락의 말이 이어졌다.
“시라스는 가문의 이름을 걸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케프렌의 이름까지 팔아 명령하는 이상 저희로서도 들을 수밖에 없었죠.”
네르하는 그 말을 듣고는 싸늘하게 웃었다.
“총책임자도 아니고 방계에다 일개 생도인 녀석이 가문의 이름을 팔아?”
“시라스는 나름대로 가문의 상층부에 줄을 대고 있습니다. 저희로선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정에 없다가 갑자기 사절단에 추가된 것을 보면 뭔가 있다 생각되었는데 나름 뒷배가 빵빵한 녀석이었나?
네르하가 말락에게 다음 질문을 날리려고 했을 때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저 멀리서 상당한 실력자의 인기척이 잡혔다.
‘고수, 최소 초절정!’
네르하는 다급하게 차음막을 풀었다. 경지에 이른 고수라면 네르하의 수법을 가볍게 간파할 가능성이 있었고, 나중에 말락이 나불대더라도 지금 당장 눈에 띄어 좋을 것이 없었다.
“베하나스 경!”
자리에 나타난 이는 케프렌 사절단의 총책임자인 베하나스 마그레스였다.
“말락 비어멜, 너희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만…… 지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베하나스는 주변에 널브러진 삼인방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말락의 등에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시라스는 베하나스가 모르게 원래 이번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사건이 터진 지금, 수습해 줘야 할 시라스는 이 자리에 없었다.
베하나스는 천천히 말락에게 다가왔고.
짝!
그대로 말락의 뺨을 후려쳤다.
“흡!”
조용한 공간을 울리는 날카로운 타격음에 대번에 대련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뭐가 됐든 말썽을 일으킨 죄는 가볍지 않다. 하물며 세 명의 생도가 부상을 입도록 방조한 것은 더더욱.”
‘허? 이 새끼가?’
네르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소란을 피운 것이 아닌,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책망이 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네르하가 저걸 어떻게 조져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베하나스가 네르하에게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소란을 피워서 미안합니다.”
“베, 베하나스 님이 존대를…….”
아무리 적대 관계라도 항렬로 따지면 케프렌의 장로인 베하나스가 네르하에게 존대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베하나스의 말은 끝까지 정중했다.
“말락을 비롯해 이번 일에 연루된 이들은 교류전이 끝날 때까지 모두 숙소에 감금될 것이며, 대련회의 참가 자격 역시 박탈할 것이오.”
애초에 모든 사절단이 대련에 참가하는 건 아니었지만 네르하가 보기엔 벌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는 자기 식구 감싸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시죠.”
하지만 네르하는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베하나스의 사과를 받았다.
“호쾌해서 마음에 드는군요. 가자. 부상자를 수습해라.”
“예. 장로님!”
말락은 빠릿하게 자세를 잡고 생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대련실에서 소란을 피우던 말락과 검의 낙원 생도들이 베하나스의 뒤를 졸졸 따라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불편하게 지켜보던 바스톤이 네르하에게 다가왔다.
“저들을 그냥 보내실 겁니까?”
“그럼? 그냥 보내지 말까?”
네르하의 핀잔에 바스톤의 표정이 살짝 새빨개졌다.
“그, 그건 아닙니다만 그 상황에서 주군의 성격이라면 원탁의 기사에게라도 들이받으셨을 것 같아서.”
“내가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다.”
거기서 시비를 걸었다간 항렬과 상관없이 각 가문의 직계들이 충돌하는 판으로 변해 버린다.
상대의 노림수가 ‘소란’ 그 자체라는 걸 고려한다면 이 자리에서 베하나스를 들이받는 건 그리 좋은 책략이 아니었다.
네르하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루시아는 어디 있지? 저녁에 데리고 갈 곳이 있는데 말이야.”
그제야 바스톤 역시 루시아의 존재를 인지하며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그, 그게 저놈들이 들이닥치기 전까진 분명 함께 훈련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귀신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근방에 숨어 있겠지, 뭐. 내가 찾아보겠다.”
“조,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뜬금없는 말을 지껄이는 바스톤을 향해 네르하가 황당한 시선을 던졌다.
“뭐, 인마?”
* * *
그리고 그날 저녁.
네르하와 어깨를 마주한 루시아는 얼굴을 감싸며 쥐꼬리만 한 소리로 사과를 했다.
“죄, 죄송해요. 그 자리에 제가 있었으면 상황이 더욱 꼬였을 터라.”
“이해한다. 아무리 변장했어도 널 알아볼 이가 적진 않았겠지.”
예상대로 루시아는 대련실 건물 구석에 위치한 방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네르하는 그런 그녀를 끄집어 내었고, 상황을 모두 전달받은 그녀는 기꺼이 네르하와 동행했다.
“괜찮을까요? 숙소 근처의 정원이라면 누가 산책이라도 나왔다간 대번에 눈치챌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애초에 정원 자체가 산책용이 아니니까.”
만약 검의 낙원 사절단이 리브라 내부에서 난리를 피웠다간 아무리 이후 제압할 수 있다 해도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그 베하나스 같은 자가 다른 마음을 먹으면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숙소에서 리브라 중앙으로 향하려면 이 정원을 지나칠 수밖에 없어. 만약 허가받지 않은 자가 이 정원에 발을 들이밀면.”
“들이밀면?”
“저렇게 되지.”
“어, 어라?”
네르하의 손가락이 가리킨 장소를 향해 루시아의 눈이 돌아갔다.
그리고 그 끝에는 가운 한 장 걸친 채로 설산의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네시스의 모습이 보였다.
“어, 언니이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