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교류전의 끝 (1)>
“시, 시라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다고?”
“그래. 이 모든 일은 저 시라스란 놈의 독단이며, 너는 마기에 미친 시라스를 제지하려다가 부상을 입은 거다.”
뭐, 사실 시라스가 아무리 마기에 물들어 전투력을 높여도 베하나스에게 이 정도 중상을 입힐 수 있을 리가 만무했지만.
“적어도 여기 있는 모두가 입을 맞추면 사소한 부분 정도는 파묻을 수 있지.”
네르하가 수풀 너머에 시선을 보냈다.
“아녜스.”
“네.”
“……7공녀?”
베하나스는 수풀을 헤치며 나타난 아녜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교류전에 참여하고 있을 아녜스가 여기 있는 건 둘째 치더라도 아녜스의 손에 실종되었던 시라스 루 케프렌이 정신을 잃은 모습으로 들려 있었던 것이었다.
“7공녀가 데리고 있었나? 그러니 찾지를 못했군.”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게 딱 이런 꼴이었다.
털썩!
아녜스는 정신을 잃은 시라스를 장내에 던졌다.
네르하가 말했다.
“자, 여기 ‘마검을 들고 우리를 습격한 비열한 악당’이 있다.”
그 말뜻을 알아챈 베하나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넌 독자적으로 시라스에게서 우리를 지키려다 부상을 입은 거다.”
네르하와 베하나스에 더해 루시아와 아녜스까지.
사실상 네 명 중 세 명이 케프렌 가문이니 입증의 신뢰성은 그야말로 절대적일 거다.
베하나스가 네르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날 살리려는 거지?”
“당연한 거 아니냐?”
네르하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리고 그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베하나스의 멱살을 짤짤짤 흔들어 대었다.
“여기서 네놈의 목을 따 봐라. 원인이 뭔지 파악할 필요도 없이 두 가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거다.”
“끄윽!”
케프렌의 원탁의 기사가 라데우스의 중요 요충지인 리브라에서 급사했다.
그 원인이 설사 케프렌 쪽이라 하더라도 케프렌은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베하나스를 무작정으로 살려야 할 필요도 없었다.
“나에게 있어 최선은 네놈을 살린 다음 입을 막는 것이고, 차선은 네놈을 죽여 내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며, 최악은 네놈이 살아남아 이리저리 입을 놀리는 거다.”
이놈을 죽여서 가문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 해도 네르하는 자신이 개입했다는 증거만 숨길 수 있다면 오히려 몸을 안전하게 만들고 시간을 벌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빨리 선택해라. 답이 늦으면 그냥 죽이겠다.”
“…….”
베하나스는 한숨을 내쉬며 네르하가 제시했던 조건들을 입에 담았다.
“케프렌 계승 전쟁에서 대공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 차후 네르하 라데우스가 케프렌 본가에 방문 시 호위를 맡아 줄 것.”
“네 명예를 더럽힌 것도 아니고 목숨값치곤 싸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긴 하군.”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네르하는 반드시 자신을 죽일 것이다.
베하나스는 자신의 몸 상태와 네르하의 눈빛을 번갈아 확인하며 그 사실을 주지했다.
“좋아.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이는군.”
“언령의 계약으로 이 약속을 구속하겠다.”
언령의 계약은 세뇌나 환혹으로는 맺어지지 않지만 그 구속이 강력하고 또 절대적이다.
그렇기에 어지간해선 그냥 죽는 한이 있어도 언령의 계약 따윈 맺지 않지만 이런 깔끔한 조건이라면 어떻게든 수용할 수가 있었다.
지이잉!
네르하의 몸이 살짝 빛나며 언령 계약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리고 루시아와 아녜스가 자신의 마나를 흘려보내면서 비밀 엄수의 계약을 맺었고.
“미안하군. 내가 살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구나.”
베하나스 역시 자신의 마나를 흘려보내며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계약이 끝나자마자.
서걱!
아주 깔끔하게 베하나스는 시라스의 목을 베었다.
움찔!
설사 악연이라 해도 인연. 시라스와 이전부터 관계가 있던 루시아와 아녜스는 시라스의 목이 깔끔하게 잘리자 자신들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
“…….”
안타깝다느니, 굳이 이렇게 해야 했었냐느니 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도 명가의 여식이자 정치를 배운 자들.
애초에 선공은 시라스가 날렸으며, 베하나스에게 혐의가 가는 것보다는 시라스가 모든 걸 안고 죽는 것이 가장 여파가 작은 선택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 가지만 묻지.”
시라스의 목을 벤 베하나스가 네르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는 정말 네르하 라데우스인가?”
네르하는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네르하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베하나스는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문이었군. 실례했다.”
* * *
그렇게 현재.
“베하나스가 범인이 아니라고?”
“그렇소. 그 사건은 케프렌의 방계인 시라스 루 케프렌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로 판명되었소.”
부학장 네슬렉은 그라갈의 보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네슬렉이 뭐라 말하든 그라갈은 자신이 보고 확인한 내용을 그대로 전했다.
“오히려 베하나스는 마검에 폭주한 시라스 루 케프렌의 목을 직접 베고 이번 사태에 대해 유감을 전했소. 양쪽 가문 간에 원만한 합의를 통해 일을 해결하자고 하더군.”
“일단 그 개소리는 둘째 치더라도 그 자리엔 암살 대상자인 공주까지 있을 텐데도 그런 소리가 나왔다고?”
“그 자리엔 네르하 라데우스와 아네시스 케프렌도 있었소. 그들이 모두 같은 증언을 했지.”
“허어!”
네슬렉은 크게 탄식을 내질렀다.
‘뭔가 일이 있었군.’
그것도 내막을 짐작하기 힘든 아주 큰 일이.
아니, 그 전에 무엇보다…….
“알겠네. 학장님껜 내가 보고할 테니 이만 물러나게.”
“알겠소. 부학장.”
그라갈이 물러난 이후에도 네슬렉은 자신의 자리에서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릿속을 잠식한 생각은 단 하나.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베하나스의 칼날을 피했다고?’
네슬렉 자신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
그것이 바로 케프렌 원탁의 기사이자 검왕 베하나스 마그레스다.
‘분명 그는 공주를 암살하기 위해 케프렌에서 파견한 필살의 수일 터인데?’
아무리 네르하가 강하다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장담컨대 바스텔을 제외한다면 현 후계 중 그 누구도 베하나스와 마주하고도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네르하가 베하나스와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은 낮다.’
네르하가 베하나스를 이길 가능성은 애초부터 제로.
설사 네르하가 베하나스와 어느 정도 수를 겨룰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고 해도 베하나스는 무조건적으로 네르하를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네슬렉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보고로는 발견 당시의 베하나스는 생각보다 큰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주변의 증언으로는 마검에 잡아먹혀 폭주하는 시라스를 막아내느라 그랬다고는 하는데?
‘그럴 리가? 다인슬라이프가 아무리 특급 마검이라 해도 제왕의 경지에 발을 걸친 베하나스를 어찌할 수는 없다.’
그렇다는 건 시라스 외에 그 자리에서 베하나스와 대결한 제삼자가 있었다는 가정뿐.
네슬렉의 입에서 유일한 가정이 흘러나왔다.
“지금으로선, 명왕인가?”
명왕, 시저 루드벡.
얼마 전 네르하 라데우스를 가르치기 위해 리브라에 합류한 시대의 괴짜.
그 역시 대륙 최강자의 반열에 올라 있으니 베하나스를 감당하기엔 충분한 격이 있었다.
네슬렉은 그와 동시에 골치가 아픈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상황을 좀 더 깊게 파고들어야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결과적으로 베하나스는 ‘실패’했으며, 공주와 네르하는 살아남았다는 것.
사실, 베하나스가 암살자라는 건 이미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학장인 루트비히에겐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공주’의 암살을 묵인하는 것으로 네슬렉은 케프렌의 대공자 쪽으로부터 제법 큰 대가를 받았다.
사실, 공주의 신변 따윈 네슬렉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에 생긴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네르하를 좀 더 밀어주는 게 재밌어지려나?’
네슬렉은 피와 전쟁을 좋아하는 광인의 부류였다.
물론 과거, 라데우스의 후계이자 카이젤과 함께 가주의 자리를 다투었던 인물인 만큼 기본적인 사리 분별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후계에서 탈락한 이후에도 그 위험성을 충분히 경계한 본가의 견제 때문에 아직도 리브라의 부총장이라는 한직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네슬렉은 이런 상황에서 꽤나 재미난 가정이 드는 걸 자각했다.
‘네르하가 정말로 가문의 후계 경쟁을 뒤집을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한다면? 정말로 바스텔에게 이빨이 닿을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이 말년에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은 얼마나 크고 즐거울 것인가?
“큭!”
네슬렉은 웃었다.
“크큭, 크크크큭!”
* * *
시라스의 독단으로 일이 결정난 이상 베하나스는 가벼운 조사만 받고 풀려날 것이다.
다만 이 일이 라데우스의 영지에서 일어난 만큼 케프렌은 라데우스에 많은 걸 양보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되고 교류전의 경기장으로 귀환하던 도중이었다.
“베하나스 경을 살린 이유를 알고 싶어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던 와중 뒤를 따라오던 루시아가 이렇게 물어왔다.
네르하는 피식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답했다.
“그래도 나름 한 가족일 텐데 피도 눈물도 없는 발언이로군.”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닙니다.”
평소와는 다르게 루시아의 표정은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리브라의 생도 루시아가 아닌, 케프렌의 공녀 루시엘라로서 네르하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때 베하나스 경을 살리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당신에겐 베하나스 경을 죽이는 쪽이 훨씬 메리트가 컸습니다.”
네르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뭐, 그렇겠지.”
루시아가 담담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기존 기득권층의 힘은 전쟁으로 깎여 나가고, 그만큼 입지가 좁은 당신에겐 기회가 찾아오겠죠. 실력을 숨긴다는 핑계도 소용없어요. 그 누구도 당신이 베하나스를 죽였다는 걸 의심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
네르하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 돌아갔다.
“당신은 거기서 베하나스를 죽였어야 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라데우스의 가주직을 노린다면요.”
네르하는 속으로 감탄했다.
‘종자가 다르다는 건 이런 걸 말함이겠군.’
아직 산전수전 다 겪어 보지도 않았을 텐데 사고방식 자체가 일반인과는 다르다.
“일단 그 호의 어린 충고는 고맙게 받지.”
루시아의 입가가 쌜쭉하게 튀어나왔다.
“이미 다 끝나고 그렇게 말을 하시면 좀…….”
“하지만 그래도 살리는 편이 나아. 어떻게든 살려 두면 쓸모가 많은 패거든.”
지금 수준에서 다시 싸운다면 아마 질 것이다.
그만큼 베하나스는 강적. 그런 자는 괜히 죽여 화를 초래하기보단 빚을 지워두고 이용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가문의 힘이 지나치게 깎이는 건 사양이야. 난 가능한 가문의 전력이 온존한 상태에서 정점에 오르고 싶거든.”
루시아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네르하를 바라보았다.
‘오만하다. 아니, 오히려 당연한 건가?’
이미 후계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만큼 이런 광오한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 대공자조차도 넘어설지도 몰라.’
“그나저나.”
루시아가 네르하의 존재감에 전율하고 있을 때.
네르하가 표정을 싹 바꾸었다.
“너도 정말 모르나?”
“무엇을요?”
“그놈이 사용한 검술 말이야.”
베하나스가 필살의 검술이라 사용한 마교의 혈광패검.
케프렌과 마교의 연관성이 확인된 이상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네르하의 기대와는 다르게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몰라요. 가문에서 금기로 지정한 검술은 못 해도 수십 종류가 넘죠. 아무리 저라도 그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에요.”
“그래? 그렇다면 혹시 네가 알고 있는 금기된 검술들의 형을 내게 보여 줄 수 있나?”
그 말에 루시아는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죠.”
“쩝, 그건 그렇지?”
아무래도 케프렌 가문과 마교와의 관계를 직접 확인하려면 호랑이 굴로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 호랑이 굴에서 살아남으려면 가능한 패가 많은 편이 좋았다.
“나중에 가문에 돌아가게 된다면 말이다.”
“……?”
“그놈을 네 사람으로 만들어라. 가능하다면 네겐 큰 도움이 될 테지.”
“설마 그걸 위해 베하나스 경을 살려 둔 건?”
네르하는 시선을 돌린 채로 자신의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냥 겸사겸사야. 난 내 사람을 놓치진 않지만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네가 이곳에 오래 있지는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
“지금은 단순한 포석이지만 나중에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거다.”
아마 베하나스에게 ‘루시아를 섬겨라’라는 제안 같은 걸 했다면 베하나스는 아마 그냥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네르하가 베하나스에게 제시한 것은 어디까지나 ‘대공자에 대한 지지 철회’.
나중에 다른 세력으로 갈아탈 여지를 줘야 베하나스로서도 선택하기가 편해지겠지.
‘겸사겸사 이 녀석의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기회도 되겠고 말이야.’
즉, 이것은 네르하가 루시아에게 주는 호의이자 시험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