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교류전의 끝 (2)>
“돌아오셨군요, 주군.”
“그래. 바스톤. 교류전은 어떻게 되었지?”
자리에 돌아오니 이미 교류전은 끝나 있었고, 폐회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바스톤은 빙긋 웃으며 주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시다시피.”
“축제 분위기군.”
네르하와 루시아는 어디까지나 자리를 비웠으므로 결과를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주변 분위기를 보면 결과가 어찌 된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승부는 6승 4패로 이쪽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배커 도련님을 비롯해 주군께 훈련을 받은 이들이 상당한 약진을 보였습니다.”
“고작 절반 조금 넘는 승률로 저리 기뻐하나?”
“대대로 승률이 상당히 열세였던 데다 이번 시합은 내용 역시 상당히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으면 한두 명 정도는 더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정도로요.”
“그래. 십 대 영이 아닌 게 좀 아쉽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
“네?”
바스톤의 황당한 시선을 뒤로한 채 네르하는 저 구석에서 쉬고 있는 배커에게로 향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배커.”
“……흥.”
배커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네르하의 시선을 피했다.
“바스톤에게서 들어보니 제스란 놈에게 빚을 갚아 준 것 같던데 소감이 어때?”
“다음에 만난다면 정면에서 박살 낼 거다. 이번처럼 쥐새끼처럼 도망다니진 않을 거야.”
배커는 목창을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르하와 계속해서 얼굴을 마주 보는 게 거북하다는 기색이었다.
네르하는 자리를 떠나려는 배커의 등을 향해 말했다.
“지금은 네가 이겼다지만 다음엔 어떻게 될까?”
“뭐?”
“한 번 쓴 전략이 두 번 통할까? 상대의 수준이나 재능도 나쁘지 않은 것 같던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인상을 구기며 다시금 이쪽을 본다.
네르하는 그런 배커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그냥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다면 빠지지 말고 앞으로도 성실하게 출근하라는 뜻이지.”
으득!
배커는 뭔가 열이 받은 듯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네르하에겐 그런 배커의 모습에서 바늘에 걸린 물고기와도 같아 보였다.
“흥!”
결국 배커는 코웃음 한 번을 끝으로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대회장을 떠났다.
바스톤은 그런 배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배커 도련님도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군요.”
“그러냐?”
“저 제스란 자를 꺾었을 때, 배커 도련님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환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원래 주군께서 있으셔야 했을 자리를 계속해서 힐끔거리셨죠.”
으음, 그런 배커의 모습을 상상하니 뭔가 웃기긴 하다.
“이번에 가르친 건 그냥 잔재주야. 놈이 정말로 껍질을 깨기 위해선 앞으로도 가르쳐야 할 게 많아.”
잠깐 웃던 네르하는 주제를 돌렸다.
“그런데 검의 낙원 측에서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나?”
“이상한 점 말씀이십니까?”
바스톤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신이 느낀 점을 말했다.
“확실히 처음부터 뭔가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는 건 확실합니다. 지도 교수는 물론 원래 출전하기로 했던 이도 한 명 불참했고요.”
“역시 그렇군.”
“뭔가 아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네르하는 단련실 근처에서 있었던 일을 바스톤에게 알려 주었다.
다른 이들에겐 숨겼을 일이었지만 바스톤은 네르하의 첫 번째 수하. 그것만으로도 이번 사건에 대한 전말을 알 자격이 있었다.
네르하에게서 모든 전말을 들은 바스톤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 그게 무슨! 제가 속 편하게 싸움 구경이나 하고 있던 사이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진정해라, 바스톤.”
네르하는 바스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현재 네 수준으로는 인질이나 되지 않았으면 다행이야.”
냉혹한 한마디에 바스톤의 눈에 큰 실망이 일었다.
“내가 이긴 것도 반은 요행이었지. 그자의 검식을 파훼하지 못했다면 꽤 낭패를 봤을 거고.”
“그런…….”
“뭐, 너무 낙심하지 마. 넌 내가 인정한 원석이다. 부족한 건 시간일 뿐이야.”
네르하의 위로에 바스톤은 조금 기운을 차린 듯 어깨를 폈다.
“네. 주군이라면 저라는 원석을 보석으로 다듬어 주실거라 믿고 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바스톤의 자뻑에 네르하는 크게 웃음을 지었다.
“자기가 원석이라는 건 아는구나?”
“당신이 절 선택하셨으니까요.”
곰 같았던 놈이 아부도 수준급으로 늘었다.
“이만한 난리를 쳤으니 아마 한동안 시끄러워질 거야. 우리 같은 이들은 그런 거에 신경 쓰지 말고 힘을 키우는 데 집중하면 된다.”
“네.”
“앞으론 시간이 좀 널널해질 테니 빡세게 성장해 보자고.”
* * *
기숙사로 돌아온 네르하는 한동안 안팎이 시끄러워질 것을 예감했다.
루시아의 피습, 그리고 시라스 루 케프렌의 죽음.
비록 베하나스에게까진 혐의가 가진 않았어도 이것만으로도 두 가문 사이에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바깥의 상황은 네르하의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주인님.”
“응? 네가 여긴 웬일이냐?”
네르하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대면을 요청한 여인의 모습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세이라, 무슨 일이지?”
네르하는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네르하가 베리타스에 박아 놓은 정보 조직, 미네르바의 수장인 세이라였다.
‘아직 날 찾아올 짬이 되지 않을 텐데?’
그녀가 수립한 정보 조직은 아직 조직으로서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그나마 네르하의 요구대로 구성만 맞추어 북방에 정보원들을 파견한 것만 빼면 지금은 조직의 틀을 쌓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때였다.
세이라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특 1급 정보가 들어와 부득이하게 클로이아 님을 거치지 않고 바로 찾아왔습니다.”
원래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클로이아를 거쳐 네르하의 귀에 들어오도록 조직도를 만들어 두었다.
그런데 라데우스 상층부에게 움직임이 포착될 수도 있을 걸 불사하고 찾아왔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것.
“정보?”
“네. 아마 저와 비슷한 시기에 라데우스 본가에도 정보가 들어갔을 겁니다만, 아무래도 이런 식이 아니면 주인님께까지 소식이 들어가기엔 시간이 걸릴 듯하여.”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심호흡까지 하는 걸 보니 정말로 특급 정보인가 보다.
곧이어, 네르하조차 놀랄 만한 정보가 튀어나왔다.
“아르바 라데우스가 패퇴했습니다. 북방에 있던 라데우스 세력은 괴멸했고, 그 일대 전체가 마족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
네르하는 생각보다도 훨씬 심각한 세이라의 정보에 입을 살짝 다물었다.
그러고는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난리 났군.”
클로이아를 거치지 않고 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녀에게 소식이 들어갔다면 현재 상황이고 나발이고 곧바로 북방으로 달려가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그런 혼잣말을 들은 세이라가 갑자기 네르하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음, 그것이 말이죠.”
“응? 또 뭐가 있나?”
세이라는 살짝 우물쭈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아니고…… 최상위 명령 계통이 두 갈래다 보니까 여기 오면서 다른 부하를 클로이아 님에게 보냈거든요?”
“이런.”
네르하의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치 자로 잰 듯한 타이밍처럼.
“도련님!!”
콰아앙!
클로이아가 응접실 방문을 문자 그대로 박살 내면서 네르하를 찾아왔다.
* * *
특유의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타난 귀신.
네르하는 절로 골치가 아파지는 걸 느끼며 일단 제령을 시도했다.
“진정해라, 클로이아.”
“전 진정하고 있습니다.”
“진정하는 놈이 문을 박살 내고 들어오는 건 무슨 경우냐?”
저 멀리서 기숙사 사감 에드발이 도끼눈을 뜨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교수만 아니었으면 잡아 족쳤을 거란 느낌을 팍팍 내고 있다.
하지만 에드발이 무슨 눈빛을 보내든, 클로이아는 다짜고짜 네르하의 눈앞에서 열변(?)을 토해 냈다.
“아르바, 그 병신 같은 새끼를 믿은 내가 잘못이었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말에 사심이 듬뿍 들어가 있군. 그리고 뭐가 늦지 않았다는 거냐?”
“지금이라도 라데우스 측에 요청해서 북방의 관리자를 도련님으로 바꾸는 것을요.”
다짜고짜 북방으로 가자고 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대안이라는 걸 생각해 오긴 했다.
그 대안도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받아들일 확률이 0에 수렴하는 걸 대책이라고 내뱉는 거냐? 일단 진정하고 앉아라.”
네르하의 차분한 권유에 클로이아는 그나마 이성이 남아 있었는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세이라가 가져온 게 썩 달가운 소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우리가 뭘 어찌할 수 있는 건 없다.”
“…….”
“일단 넌 이 가문에선 인질이야, 클로이아.”
“알고, 있습니다.”
현실을 주지시키는 말에 그녀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북방의 소식은 서리 일족이 아르바의 세력과 합류해 남쪽으로 피신했다는 거였지.”
“네. 그랬죠.”
“서리 일족이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몰라도 아르바의 패퇴 소식이 들려온 이상 피해는 어쩔 수가 없다. 라데우스 본가에서 전력을 모아 파견하기 전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클로이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르하는 그런 그녀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전쟁만큼 공을 세운다는 명분을 세우기 딱 좋은 게 없으니 협상을 잘한다면 북방으로 가는 것도 가능하겠지.”
“협상이라면?”
“외부 미션을 말하는 거다. 외부 미션은 규정상 1년에 두 번은 필수로 수행해야 하고, 본래는 그 시기를 학사 측에서 정해 주는 게 원칙이긴 하지.”
네르하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를 생도 측이 지정하는 게 불가능하단 규칙은 없었다.”
지정을 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건 별개이기에 사실상 의미가 없는 학칙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문제는 어떤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교섭을 하느냐인데…….”
위험성이나 다른 부분은 제쳐 두더라도 몇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기에 네르하에게만 또 외부 미션을 부여해 내보낸다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 부분에선 뚜렷한 대안이 없는데, 학장과 타협이 되려나?’
루트비히 라데우스는 네르하의 목적과 야심 등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비록 공식적인 지지 선언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승인 시저를 리브라로 품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편의를 봐주고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다.
적어도 이쪽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확실하겠지.
그때였다.
‘누구지?’
네르하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어느 강자의 기척을 눈치채곤 대번에 전의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 기척이 익숙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며 상대를 기다렸다.
“간만에 보는구나, 네르하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타난 장년을 조금 넘어선 노인.
마치 기다렸다는 듯 네르하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셨습니까, 부학장님.”
“허허허, 사석이니 편하게 대해도 된다.”
리브라의 부학장인 네슬렉 라데우스.
그가 느닷없이 네르하를 찾아온 것이었다.
“자네도 있었군, 클로이아 블루벨벳.”
“아, 안녕하세요, 부학장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소식을 들었나 보군.”
네슬렉의 시선이 구석에 조용히 박혀 있던 세이라에게 향했다.
“으읏!”
기묘한 압박감을 느낀 세이라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재미있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구나.”
“그녀는 제 수하입니다. 겁박하진 말아 주십시오.”
“허허, 실례했군.”
네슬렉 같은 순수 마법사들에게 뱀파이어는 박멸대상 혹은 실험체 취급이었으니 저런 눈빛도 이해는 갔다.
네르하는 어깨를 움츠리는 그녀를 살짝 뒤로 보내고 네슬렉을 향해 조용히 용건을 물었다.
“공사가 다망하신 부학장님께서 제게 무슨 용무이신지요?”
“조카를 보러 오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이냐?”
“물론 저야 언제든 환영합니다만 케프렌과의 문제로 인해 한창 바쁘실 것 같아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네슬렉과 루트비히는 죽은 시라스와 구금된 베하나스에 대한 처분을 두고 케프렌과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다.
그 공방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할 판에 갑자기 네르하를 찾아왔다는 건 이유가 뭘까?
‘굳이 당시의 상황을 다시 한번 취조하겠다는 의미인가?’
그런데 네슬렉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네르하의 예상을 전혀 벗어나는 것이었다.
“네르하야, 혹시 북방에 가 볼 생각은 없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