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북방으로 (2)>
“북방이라…….”
네르하에게서 사정을 전달받은 시저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가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상황을 듣자니 가지 않는 것도 힘들겠군.”
“네. 아마 거의 모든 후계들이 몰려들 겁니다.”
시저는 현재 상황이 못마땅한 듯했다.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너의 몸에 ‘마나 익스텐더’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출발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고는 해도 때를 제대로 맞출 수 있을지는 의문이군.”
벨카서스 학파의 최고 비전, ‘마나 익스텐더’.
그 효용은 다름 아닌 마법사의 단전인 심장 인근에 반영구적으로 가동하는 학파의 비전 술식을 새겨 일반적인 마법사 이상의 출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비전이었다.
시저가 이전에 보였던, 네르하조차도 경악했던 그 힘의 근원은 바로 이 마나 익스텐더에 있었다.
“어차피 너는 술식의 부하를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육체가 거의 완성되어 가니 시간이 곧 해결책이겠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하군.”
이미 술식 자체는 자리를 잡았다지만 지속적으로 시저 본인이 세심한 튜닝을 해 주는 편이 더욱 완성도가 높아질 터다.
네르하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년 단위로 있을 것도 아니고, 길어야 두세 달 정도면 일이 마무리될 테니까요.”
시저가 북방에 동행한다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지만 아쉽게도 시저는 북방까지 따라가지 못했다.
이건 라데우스 가문과 시저 개인과의 문제여서 네르하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시저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과연 몇 달 정도로 일이 해결되려는지 모르겠군.”
네르하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북방에 강림했다는 마왕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르바와 라데우스의 정예들이 패퇴했다면 적어도 서열 20위 이내의 최고위 마족이 분명할 거다.”
20위 이내?
뭔가 이상함을 느낀 네르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색이 왕(王)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많이 존재합니까?”
“마왕이란 이름은 직위보다는 칭호에 가까우니까.”
“아아.”
검왕이니 권왕이니 하는 무림의 별호와 마찬가지로 마계의 마왕들 역시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마족들의 계급은 오로지 작위로만 구분되어 있지.”
흔히 오등작으로 구분되어 마신(魔神)에게서 작위를 부여받은 마족을 마계 귀족이라 칭한다.
거기서 작위가 올라갈수록 마족의 격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보통, ‘마왕’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건 후작급 이상의 마족들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가장 강한 마족은 공작급이겠군요.”
시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대의 문헌에 따르면 마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그런 존재들은 다섯을 넘지 못한다고 했다. 수천 년 전의 기록이기에 지금은 어떤지는 몰라도 그들의 힘은 한낱 인간이 대적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지.”
그쯤 되면 그냥 ‘신(神)’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레벨이라고 보면 되었다.
“어차피 네가 마왕급 존재와 싸울 일은 없을 거다.”
“확신하시는군요.”
“일의 중요성을 고려하면 분명 삼마자와 라데우스의 원로들이 나설 테니까.”
후계라고는 해도 현재로선 원로들의 실력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라데우스의 후계라 해도 규모가 규모이니 수뇌부의 자리 하나를 노리는 게 최선이겠지. 삼마자와 원로들이 마왕을 상대할 때 한 손을 보태는 정도일 거다.”
시저의 말은 타당했다.
‘확실히 북방에 가는 후계들은 자신들의 전투 능력보단 지휘력과 전술의 우수함을 어필하려 들 테지.’
네르하처럼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직접 적에게 들이대진 않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네가 북방으로 가기 전에 최대한 마나 익스텐더의 각인을 진행해 보자꾸나.”
본래의 ‘신무조’였다면 자신의 몸에 장난을 친다며 대노하며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네르하는 달랐다.
마법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할 줄 아는 자세를 갖추었다.
네르하의 몸을 살피던 시저는 흐뭇하게 웃었다.
“확실히 자질이 뛰어나. 비전 술식이 거의 자리를 잡아가는 게 보이는군.”
“많이 고통스러웠죠.”
“그걸 여기까지 참은 건 어디까지나 너의 능력이다.”
네르하를 제자로 들인 이후, 시저는 당연하게도 학파에서 정립한 육체 단련 커리큘럼을 네르하에게 적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흡족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받았던 백여 명의 제자 중 기초 훈련을 통과한 건 단 다섯 명. 중급 훈련을 통과했던 건 고작 두 명이었지.’
그리고 그 두 명 역시 현재 네르하가 거치고 있는 고급 훈련을 견뎌내지 못하고 탈주하고 말았었다.
‘역시 이놈은 종자가 달라!’
벨카서스 학파의 체력 훈련은 단순히 ‘힘들다’는 수준에서 논할 게 아니었다.
‘고통! 고통을 인내하는 능력이 이 녀석에겐 있어!’
마나 익스텐더의 시작은 심장 인근에 영구적인 마법진을 새기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마법진은 심장을 통해 전신의 장기를 강화하며, 결과적으로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마나의 최대치를 높이고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부하(負荷)의 고점을 높여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혁신적인 술식이 존재함에도 벨카서스 학파가 라데우스를 넘어 대륙 제일이 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건 바로 마법진의 출력이 최대치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육체를 강화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술식을 새기는 순간부터 육체에 부하가 찾아오며.
단련을 게을리하거나 재능이 모자라 육체가 부하를 극복하지 못하게 되면 최악의 경우 심장이 터지는 사고가 벌어지곤 했다.
또한 마법진이 자리 잡기까지 일상생활 전반에서 끝없는 고통이 피시술자를 습격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독종이라도 이 과정을 버티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육체적인 재능과 마법적인 재능.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우리 학파의 진전을 이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제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최고의 재목이었다.
‘9레벨.’
마법사들의 최종 목표인 반신(半神)의 경지.
‘이 녀석이라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학파의 역사에 사상 최초로 진정한 대마법사가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시저는 벅찬 마음을 애써 집어넣으며 네르하의 등에 손을 얹었다.
“자, 계속 해 보자꾸나.”
“네, 사부.”
* * *
루트비히 라데우스는 본가에서 보내온 소식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흠, 결국 가주가 칼을 꺼내 들었군.’
라데우스 본가는 아르바의 패퇴를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아무렴, 북방에 남겨두고 온 500명이나 되는 마법사 전력을 모조리 잃어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머르딘, 자네에게도 협조 요청이 왔군.”
루트비히는 자신의 눈앞에서 차를 홀짝이고 있는 백발의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클클, 난 이미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는 노인네이거늘.”
삼마자, 머르딘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농담할 때가 아닐세. ‘회합’이 아니었다면 가주가 직접 움직였을 사안이야.”
“흠, 그럼 총사령관은 시엘 대부인인가?”
루트비히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녀는 본가를 지켜야 하니 움직이지 못해. 류레이아가 이 일을 맡았지.”
“적절한 인선이군.”
머르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상대가 마왕 클래스라면 그녀 혼자서는 불안하지. 규율에 따라 아직 전대 원로들을 투입할 순 없으니 가능한 자네도 참가해 줘야겠어.”
그런데 들려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미안하지만 힘들겠군.”
“……어째서지?”
루트비히의 눈이 가늘게 늘어졌다.
아무리 반은퇴 상태라고는 하지만 머르딘은 아직 공식적으론 현역. 라데우스의 부름에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머르딘은 은은한 분노를 머금은 루트비히의 눈빛을 직시했다.
“이미 드러난 북방의 일보단 아직 드러나지 않은 곳의 일을 신경 써야 하거든.”
“설마?”
머르딘의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한 루트비히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한차례 청소가 끝난 장소에 마왕이 강림했네. 그리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남쪽 그렌 타운에서도 백작급 하나가 소환되었지. 이게 무슨 뜻으로 보이는가?”
“북방이 끝이 아니라는 소린가?”
“당장 의심되는 곳만 세 곳이야. 특히 그중 한 곳은 내가 직접 가 봐야 하고.”
“큰일이군.”
머르딘은 현시대에 살아남은 대마법사들 중에서도 유독 마족과 관련된 사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그걸 고려하면 이번 원정의 거부는 납득이 되는 답변이었다.
“류레이아라면 잘해 낼 걸세. 그것보다.”
머르딘이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네슬렉이 네르하의 북방행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소리가 들리네만.”
루트비히는 긍정했다.
“사실일세. 원래 적당한 핑계를 대서 북방으로 보낼 생각이었지만 네슬렉이 먼저 네르하에게 접촉했네.”
“그 녀석은 여전히 자신의 야심을 숨기지 못하고 있군.”
머르딘이 인상을 썼다.
“이미 한번 사고를 쳤으면 자중할 줄도 알아야지.”
당시, 머르딘이 판데모니엄의 움직임을 알아채고도 침묵한 사실까진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가 라데우스 본가와는 별개로 케프렌이나 다른 반(反)라데우스 세력과 연결점이 있다는 건 파악했다.
루트비히는 쓴웃음을 내지었다.
“하지만 그 녀석의 저돌적인 정치력 덕에 이득도 많이 보았지. 사고를 치는 만큼 이득도 확실하게 가져왔으니까.”
그렇기에 네슬렉이 가주 쟁탈전에서 패배했음에도 아직도 이만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루트비히, 나는 많이 우려스럽네.”
“…….”
“세월이 지나도 누그러지기는커녕 피의 시대를 바라는 녀석의 야심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어.”
“머르딘.”
“지금이야 원로의 입장을 잊지 않고 선을 지키고 있지만 나는 언젠가 녀석이 큰 사고를 칠 거라 생각하네.”
아무리 루트비히라도 머르딘의 말은 허투루 흘려들을 수 없었다.
“자네는 그 사고의 중심에 네르하가 있을 거라 보는군.”
“바스텔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고, 그나마 활약하고 있던 아르바가 몰락했지. 거기에 더해 새로운 판을 짜기엔 아주 좋은 상황이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확실히 이번에 북방에서 일어난 사태는 느슨했던 후계 경쟁에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진행 상황에 따라 기존 후계들의 서열이 급변할 가능성 역시 매우 높았다.
“머르딘.”
“말하게, 루트비히.”
침착하게 차를 한입 홀짝인 루트비히가 자신의 반백 년 지기 친우를 직시했다.
“자네는 네르하가 네슬렉에게 휘둘릴 거라고 가정하고 말하고 있군.”
“그럼 아닌가? 그 아이의 자질이 하늘을 찌를 정도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정치는 아예 분야가 달라. 정치에 필요한 재능은 별개일뿐더러 결국엔 경험 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어.”
네슬렉 라데우스는 이 부분에선 천부적이었다.
과거, 카이젤이 최종적으로 승리했을 당시, 라데우스 가문에 얼마나 많은 숙청이 일어났는가?
하지만 다른 직계들이 모두 쓸려 나가면서도 가장 큰 경쟁자였던 네슬렉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여전히 최고 중직은 아니더라도 가문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고 뒷세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 중이다.
아직 이제 20살 언저리인 네르하가 어떻게 대항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겉으로 보면 분명 그랬다.
“머르딘, 나는 네르하, 그 아이를 볼 때, 그때마다 카이젤이 떠오르곤 하네.”
언더도그로 출발해 모든 직계들을 꺾고 최종 승리자가 된 현 가주 카이젤 아우구스트 라데우스.
“그 깜찍한 놈이 날 휘두르려 할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곤 하지. 후후후.”
“자넬 휘두르려 한다고?”
“물론 선을 넘진 않고 어디까지나 애교 수준이지.”
네르하는 절대로 리브라의 운영에 개입하는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저 루트비히에게 즐길 거리를 보여 주는 대신 그 사이에서 이득을 취해 갈 뿐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해서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지.”
“자네가 그렇게 즐거워 보이는 모습은 처음이군.”
뭔가 떨떠름한 머르딘의 반응에도 루트비히는 유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장담하지. 네르하는 네슬렉에게 휘둘릴 그릇이 아니야. 나는 진정으로 그 아이가 라데우스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줄 거라 믿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