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06화 (106/237)

106화

<북방으로 (3)>

바스톤 페레이라는 경건한 마음으로 양팔의 테이핑을 벗겨 내었다.

지독할 정도의 훈련으로 인해 생겨난 상처가 흉터로 남아 바스톤의 양팔에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나는 아직 주군에게 도움이 될 실력이 되지 못해.’

자신의 주군, 네르하 라데우스가 대륙의 명망 높은 검왕 베하나스 마그레스를 꺾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바스톤의 마음은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일부러 자신을 배제했다는 말을 들었던 순간.

바스톤은 한겨울에 폭포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이미 우리 같은 놈들과 같이 묶일 수 있는 레벨이 아니야.”

천운이든 실력이든 베하나스를 꺾는 순간, 네르하의 실력은 일개 생도 레벨로 묶일 수가 없었다.

“따라가야 한다. 재능의 차이, 노력의 차이. 이런 것에 얽매여 있어선 안 돼.”

다행히 바스톤은 매우 운이 좋은 편이었다.

목표로 하는 존재가 가까이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그 존재가 자신이 따라갈 수 있느냐 없느냐.

이 차이는 어쭙잖은 재능의 간격 정도는 대번에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베네핏이나 다름없었다.

“검왕과의 싸움에 나를 제외하고 루시아 양을 동행시켰다는 건 루시아 양의 기량이 주군의 뒤를 따를 수 있을 수준이라는 것.”

바스톤의 눈은 경쟁심과 약간의 질투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실, 루시아의 경우엔 베하나스를 꾀어낼 미끼 역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것이지, 그녀라고 해서 싸움에 도움이 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다만 바스톤의 입장에서 자신은 빠졌는데 루시아가 함께했다는 게 크나큰 굴욕이었다는 게 문제였을 뿐.

“하지만 이젠 다를 것이다.”

바스톤의 눈앞에 일반적인 두께의 마법서 하나가 존재했다.

제목조차 적혀 있지 않은 무명(無名)의 마법서.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페레이라 가문이 수십 년의 세월과 억 단위의 빚을 지면서까지 만들어 낸 가문의 ‘정수’가 담겨 있는 마법서였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리고 가문의 형제들이여.’

이것으로 바스톤은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나의 주인을 왕(王)으로 만든다.”

자신이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존재가 된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이 정도의 야망 정도는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껏 가문과 외부의 사정으로 짓눌려 있던 바스톤의 눈은 야심으로 활활 불타오르며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기 시작했다.

* * *

“어? 웬일이야, 루시아 양. 시험도 끝났는데 이런 곳에 다시 오고.”

“아, 소니아 씨.”

루시아는 살짝 난감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니아를 보았다.

소니아 이즈넨. 이번 중간 평가에서 2위로 랭크 업한 기대주.

비록 후반 실기에서 점수가 까일 거라 예상되긴 하지만 그래도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을 거라 평가받는 수재이기도 했다.

루시아는 어설프게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잠시 제가 익힌 이론을 다시 되짚어 보고 싶어서요.”

“그래? 별일이네. 우리 여성 동기 중 유일한 헬창인 만큼 단련실에 박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헤, 헬창?”

뭔가 어감이 심히 좋지 않은 단어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를 루시아였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네. 뭔가 상담이라고 해 줄까?”

“아, 아뇨!”

루시아는 소니아가 부담스러웠다.

신분이 신분인지라 평소에 부대끼는 네르하 패거리(?)를 제외한 다른 이들과는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그녀였다.

하지만 학년 대표 범생이 주제에 사교성이 무지막지한 소니아는 이따금씩 루시아의 의식 장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집으며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곤 했다.

소니아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공부하러 온 것과 방황하는 걸 구분하지 못할 거라 생각해?”

“그, 그건!”

“머릿속이 복잡해서 머리나 식힐 겸 돌아다니다가 어쩌다 온 거겠지.”

정곡을 찌르는 소니아의 말에 루시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양이처럼 미소를 지은 그녀가 은근하게 재촉하며 루시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래서? 뭔데? 고민이 있다면 내가 제대로 상담해 줄게!”

원래라면 별다른 일 없습니다라며 벽을 쳤을 루시아였지만 지금은 실제로 고민이 있는 만큼 소니아의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 그럼……. 가벼운 고민이 좀…… 있습니다만.”

“응, 응. 말해 봐. 말해 봐.”

소니아로서도 이런 루시아의 모습은 상당히 신기했다.

사실, 사교성이 좋은 소니아라도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 억지로 접근하진 않았다.

그냥 상대가 루시아여서 그런 것일 뿐이었다.

사실, 루시아는 리브라 내에서 인기가 상당히 좋았다.

굳이 꾸미진 않았어도 기본 베이스가 엄청난 미인인 데다 기본적인 품행이 단정하고 학년 최상위권의 성적까지 거두었으니 뭇 남자들의 시선이 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 라데우스가 지배하고 있는 리브라에서 무려 ‘배커 패거리’에게 굴복하지 않고 맞서던 모습은 그녀의 인기를 폭발시키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뭐, 본인은 전혀 모르는 것 같지만.’

기본 커리큘럼 외엔 워낙 단련실에 박혀 사는 데다 그녀의 옆에 있는 이가 그 ‘네르하 라데우스’였다.

그러니 어지간해선 구설수에 오를 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보이는 빈틈이 소니아의 흥미를 부채질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인과였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소니아는 루시아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경청했다.

“저는…… 쓸모가 없는 존재일까요?”

“……읭?”

“서로 알 만큼 다 아는 사이면서 넌 굳이 따라올 필요가 없다고 벽이나 치고.”

“…….”

꿀꺽!

알 만큼 아는 사이.

고작 이 한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남녀 간의 밀당이 떠오르며 소니아의 망상이 폭주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한마디에 소니아는 김이 팍 새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다 데리고 가는데 굳이 나는 필요 없다고 하고. 요즘 아녜스의 실력도 몰라보게 향상되어서 위기감이 느껴지는데 말이에요.”

“……?”

뭐야. 연애가 아니었나?

뭔가 대화의 흐름을 보면 흥미가 팍 식긴 했지만 그래도 소니아는 끈기 있게 상담을 가장한 푸념을 들어주었다.

소니아는 루시아의 두서없는 주절거림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네르하가 사정이 생겨 위험한 곳에 가게 되었고, 너도 같이 간다고 말했는데 그 녀석은 넌 필요가 없다고 거부했다는 거야?”

“그런 셈……. 아니, 네르하 도련님이 아니라!”

“뭘 부정하고 그래. 척 하면 착이지.”

소니아는 그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험한 곳?’

아직 북방의 정보가 풀리지 않은 시점이니만큼 소니아로선 저 말의 의미가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본래의 의미를 그대로 풀어내자면 북방으로 향하게 된 네르하가 동행할 이들을 지목했는데 그들 중에 루시아가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루시아는 자신도 가겠다며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네르하는 그녀의 입장상 그녀의 안전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막을 모르는 소니아로서는 위험한 곳에 간다는 걸 추상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무슨 말인진 모르겠는데…… 그냥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널 아끼고 사랑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은 가시밭길이니 굳이 네가 함께할 필요는 없다. 뭐 이런 거?”

네르하가 라데우스에서 처한 입지를 고려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추측이었다.

“사, 사랑?!”

루시아의 표정이 그대로 새빨갛게 변했다.

“그, 그건! 우리에겐 허용되지 않는 그, 금단의 감정!”

“금…… 뭐?”

약간의 농담을 담아 한 말이었는데 돌아온 반응이 상당히 의외다.

사실, 리브라에 소속된 소녀들의 입장에서 네르하는 문자 그대로 왕자님이 맞았다.

그런데 그렇다고 금단을 운운하기엔 좀 미묘한 것이 네르하를 상대로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리려면 좋든 나쁘든 신분이 무척이나 특별해야만 했다.

‘평민 출신으론 보이지 않는데?’

가끔씩 보이는 귀족적인 예법들은 몸에 배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고귀한 집안이라고 보기에는 또 루시아는 지나치게 털털하고 투박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소니아는 루시아가 내뱉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조합하며 결론을 내렸다.

‘고백했다 차였군!’

대충 요약하자면 루시아가 네르하에게 고백했지만 네르하는 완곡한 표현으로 거절했다는 모양새가 나온다.

‘아이고오!’

소니아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가문 내 평판도 박살 났고, 입지 또한 불안한 네르하 라데우스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라데우스는 라데우스.

일개 귀족가 영애가 감히 넘볼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소니아의 장대한 착각은 이상한 방향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사랑에 신분이 어때서!’

소니아는 무언가 의무감을 느끼며 루시아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요점은 그 도련님이 널 거부해서 네가 충격을 받았다는 거잖아?”

“그, 그렇죠.”

소니아의 예리한(?) 지적에 루시아는 침묵했다.

사실, 이번 북방행에서 제외당한 건 네르하가 루시아를 배려한 것이 맞았다.

라데우스의 일에 케프렌의 후예인 루시아가 끼어들 일도 아니었고, 현재 북방은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사지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나름 사지를 함께 헤쳐 나가며 우정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냉정하게 자신을 밀어낸 네르하에게 묘한 야속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잘 들어, 루시아. 남녀 관계에선 반하는 쪽이 진다는 말이 있어.”

“아니, 그게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만!”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관계를 진전시키려면 적극적으로 대화의 자리를 마련해야만 해. 용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말을 걸고, 상대가 자신과의 대화에 익숙해지도록 해야 하는 거야! 전략은 그다음!”

뭔가 이상한 착각을 하는 소니아의 모습에 루시아는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소니아의 조언은 묘한 부분에서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했어. 그러니 계속해서 찍어 버려!”

“……과연.”

착각과는 별개로 계속해서 설득을 시도하는 소니아의 조언은 나름 납득이 갔다.

‘그래도 우리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면, 전 고작 이 정도 위험으로 같은 어깨높이에서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 * *

결심을 한 루시아는 다시금 네르하를 찾아갔다.

바스톤, 알페온은 물론이고.

“그래서, 기어코 북방으로 가고자 결심한 거냐?”

네르하의 물음에 루시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입장과 상관없이 당신을 따르겠다는 약속은 유효해요. 하지만 적어도 설득 정도는 가능하잖아요?”

“죽을 수도 있어.”

“고려할 가치도 없는 문제군요. 제 죽음으로 인해 파생될 가문 간의 문제는 확실하게 책임지겠습니다.”

루시아의 의지는 확고했다.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네르하로서도 더 이상 루시아를 배척할 수 없었다.

“이만한 사람들이 몰려가는데 당신의 왼팔인 제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죠.”

“왼팔?”

황당하다는 네르하의 시선에도 루시아는 가슴을 쭉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오른팔은 바스톤 씨로 결정되었으니 왼팔이라도 돼야겠죠.”

“무슨 뒷골목 갱단도 아니고?”

네르하는 피식 헛웃음을 내뱉었다.

장난스럽게 내뱉은 말 속에서 루시아의 확고부동한 마음가짐이 느껴졌다.

사실, 네르하가 루시아를 한차례 배제했던 건 가문 간의 특수성을 고려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보호받으면서 진행하는 외부 미션과는 달리 이번에 갈 북방은 진짜 전장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기사, 그리고 무인으로서의 혼을 가지고 있다 해도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전장에 목숨을 거는 건 힘든 일.

당장이야 가벼운 마음으로 향할 수 있어도 진짜 전장의 참혹함과 매서움을 눈앞에서 겪게 되면 의지는 너무나도 쉽게 육체를 배신한다.

그렇기에 네르하는 루시아에게는 한번 고민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이 정도면 크게 문제없겠어.’

네르하는 고개를 돌려 남색 머리카락의 청년을 마주했다.

“저 녀석은 그렇다 쳐도,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린 라데우스의 지팡이가 되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자들이다.”

디센트 맥퀸.

실전 마법 연구회의 회장이자 네르하와의 첫 대면에서 잠깐 충돌한 적이 있었던 남자.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디센트의 눈은 야심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디센트의 뒤로는 실전 마법 연구회의 정예 생도 네 명이 눈에 불을 켜며 대기 중이었다.

디센트가 말했다.

“얼마 후면 우리는 졸업해서 라데우스에 소속되겠지. 하지만 평민 출신인 우리 같은 놈들은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가려면 무리를 해서라도 큰 공을 세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북방의 위기는 디센트 같은 졸업반에겐 목숨을 대가로 도전하는 거대한 출세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규정상 우리가 자력으로 북방에 갈 방법은 없지. ‘어느 라데우스 직계’의 뒤를 졸졸 쫓아가지 않는 이상.”

평민 출신인 그들로서는 단순한 실력만으로는 지연, 혈연의 벽을 쉽게 돌파할 수가 없었다.

디센트의 뒤를 이어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아놀드가 입을 열었다.

“레이첼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이번 일은 인생을 걸 가치가 있다고.”

“그리고 너라면 우리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바멜 라데우스는 우리를 그저 장기짝으로 삼기 위해 접근했지만 너는 진심으로 다가와 가르침을 베풀었다.”

이들 모두, 교류전 당시 네르하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었다.

비록 레이첼의 부탁이었다고는 해도 비전이나 다름없는 기술들을 가르친 건 네르하의 의지였다.

“설사 북방에서 객사한다 해도 절대로 널 원망하지 않겠다.”

“그러니, 우리의 의지를 받아다오.”

털썩!

그들은 하나둘씩 네르하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선두에 있는 디센트가 결의를 다지며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실전 마법 연구회는 네르하 라데우스를 주군으로 섬기며, 당신이 라데우스의 가주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목숨을 바칠 것을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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