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마계영역 (1)>
딸그닥, 딸그닥!
아르지엔의 경비대장, 마커스 경은 최근 급격히 늘어난 업무량에 스트레스를 한껏 받고 있었다.
‘하아, 가뜩이나 사교도들이 기승을 부리는데 높으신 도련님 놈들까지 와서 접대를 해야 하다니.’
성문을 지나가는 마차들을 검문하며 마커스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높으신 놈이 아니다.
무려 라데우스의 초직계.
이런 도시의 시장 정도는 말 한마디면 갈아 치울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존재다.
시장이 그들의 접대보단 사교도들의 감시에 열을 올릴 때는 그제야 시장의 목이 날아가는 순간이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라데우스의 도련님은 그런 시장의 모습을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고, 오히려 사교도들의 뒤를 캐는 일에 손을 붙잡고 합세하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원…….’
수백에 달하는 경비대의 대장인 마커스가 이런 검문 같은 허드렛일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정지.”
다른 일반적인 여행자들과는 규모가 다른 행렬.
나름 규모가 있는 상단의 무리들이었다.
마커스의 제지에 선두에 있던 사내가 말에서 내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미케네 상단에서 왔소.”
‘왔군.’
마커스가 맡은 임무는 다름 아닌 이 미케네 상단을 성문 쪽에 묶어 두는 것.
“오늘도 많구려.”
마커스는 수십 수레가 넘는 거대한 행렬을 보며 혀를 찼다.
이런 물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도시 내부에 반입되고 있다.
이곳이 주도 베리타스나 제국의 수도도 아닌데 말이다.
“이번 행렬은 좀 특별하오. 상단의 행수께서 직접 관리하는 물건이니 빠른 확인을 부탁드리오.”
사내는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그대로 마커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호오?’
작지만 묵직한 느낌. 은이든 금이든 적지 않은 액수로 보인다.
평상시라면 눈을 감고 통과시켜 줬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마커스는 이들을 통과시키면 안 될 입장이었다.
무엇보다 인근에서 ‘높으신 분’께서 도끼눈을 뜨고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짐을 모두 풀어라!”
“……경비대장?”
사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원래라면 이만한 돈을 찔러 주면 통과시켜 주는 게 관례였다.
기사 서임을 받긴 했어도 마커스 같은 용병 출신들에겐 이런 뇌물이 잘 먹히는 편이었으니까.
“지금 해 보자는 겁니까, 경비대장?”
이를 가는 사내의 협박에도 마커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나는 어디까지나 국법에 의거하여 정확하게 처리를 하려는 것이오만.”
“뭐, 뭐라?”
“쫄리는 게 없다면 그냥 가만히 있으시면 되는 것 아니오? 뭐 하냐, 얘들아. 검사하지 않고.”
병사들이 막 수레에 손을 대려던 순간.
“거기까지 하지.”
덜컥!
선두에 있던 마차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값비싼 북방 몬스터의 가죽 외투를 걸친, 나릇한 목소리의 반백의 청년.
마커스가 그 청년을 향해 물었다.
“상단의 행수시오?”
“그렇다만.”
“말이 짧군.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경비대장의 나이는 올해 마흔다섯이다.
그에 비해 상대의 나이는 아무리 잘 봐줘도 서른을 넘지 못할 것 같았다.
“감히 내 말에 토를 달지 마라.”
“뭐요?”
마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렇게 말하는 상대의 정체는 둘 중 하나다.
철없는 도련님이거나, 아니면 저 오만함이 당연할 정도의 대귀족이거나.
하지만 설사 후자라 해도 마커스는 쫄지 않았다.
“안 되겠군. 당신들의 행렬은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소.”
“뭐라?”
“나는 이 성의 경비대장이오. 예의도 모르고 정체도 불분명한 자들을 성안으로 들일 수는 없소.”
설사 눈앞의 청년이 대륙을 뒤흔드는 대귀족이라 해도 현재 마커스의 뒤에는 제국 황족이 오지 않는 이상 어지간한 귀족들은 다 쳐 낼 수 있는 든든한 ‘백’이 있었다.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가져온 물품들은 압수하겠소. 그대가 신분을 정확히 증명하고 출처를 명확하게 밝힌다면 돌려주겠소.”
물품을 압수한다면 최소 며칠 정도는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시장과 네르하 라데우스의 명령을 확실하게 이행하게 된다.
그런데 노발대발할 줄 알았던 청년이 의외로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며 말했다.
“지금도 저 안에는 신도들과 신도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많이 있지.”
“그래서?”
“춥고 굶주린 그들은 내 뒤에 있는 이것들만 애달프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만약 경비대에서 부당하게 빼돌렸다는 소문이 돌면 어떻게 할 건가?”
“지금, 협박하시는 거요?”
마커스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일시적으로 물류 공급이 늦어질 뿐, 고작 사교도들이 뿌리는 보급품이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아르지엔은 가난하지 않다.
하지만 현재 성내 사교도들의 입지는 절대적.
정말 작심하면 제법 큰 소요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는 된다.
현재, 북방 전선에 군수물자 보급지의 역할을 해야 하는 아르지엔으로서 이런 소요는 치명적이다.
“시민들을 구원하겠다는 자가 이런 치졸한 수를 쓰다니.”
청년은 이를 가는 마커스의 모습을 비웃었다.
“당연히 우리의 목적은 신도를 늘리는 것이니 방해하겠다면 어떤 수를 써도 상관없지 않겠나?”
“이익!”
이를 악물었던 마커스가 외쳤다.
“포위해라!”
이쯤 되면 굳이 명령이 아니더라도 상대를 안쪽으로 들이면 안 된다.
수틀린다고 이런 식으로 나오는 이들을 더 이상 도시 내에서 활개를 치게 둘 수는 없었다.
“흠, 이렇게 나오긴가?”
수십 명의 병사가 창끝을 내밀며 상단원들을 둘러쌌다.
“당신들의 신병을 구금하겠다! 그리고 성내의 모든 사교도들 역시!”
“…….”
마커스는 오러 소드까지 내보이며 청년을 압박했다.
“뭐, 그래. 라데우스 주도로 내려간 부시장이 돌아오기 전에 일을 끝마치려고 했는데 조금 일찍 시작한다고 치지.”
“지금, 무슨 헛소리를!”
“감히 내게 날붙이 따위를 내민 네놈의 눈알부터 뽑아 주마.”
움찔!
마커스는 어째서인지 자신의 몸이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주박의 마법인지, 아니면 상대의 기백이 상상 이상이라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몸이 자신의 의지를 배신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스윽!
마커스의 한쪽 시야가 청년이 뻗은 장갑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하지?”
뚝!
그 순간, 청년의 손길이 정지했다.
저벅, 저벅!
소복하게 깔린 눈길을 밟으며 입구 쪽에서 은갈색 머리의 누군가가 나타났다.
“죽고 싶지 않다면 그 손, 떼는 게 좋을 거야.”
싸늘하게 표정을 가라앉힌 네르하가 청년을 노려보았다.
* * *
“…….”
경비대장에게 손을 뻗었던 청년이 천천히 팔을 거두었다.
그의 눈에는 미미하게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뭐?”
청년이 네르하를 직시하며 물었다.
“왜 나를 방해하는 것인가, 동포여.”
“……?”
“……!”
“이 작전은 비슈나르 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다. 그대가 다른 군주를 섬기고 있다 하더라도 이건 선을 넘는 행위일 텐데?”
네르하를 비롯해 뒤따라온 일행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클로이아가 네르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거, 지금 당신과 다른 누군가를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그러게.”
“댁의 정체가 마족이셨어요?”
“내가 마족이었으면 그놈이랑 싸웠겠냐?”
그녀는 네르하가 그렌 타운에서 마족과 충돌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 저놈이 하는 말은 뭔데요?”
“아마 이것 때문이 아닐까?”
네르하는 자신의 오른손을 감싸고 있는 구슬이 박힌 글러브, 마령수투를 들어 올렸다.
“여기에 뭉쳐진 막대한 마기 때문에 내가 자기처럼 마족인 줄 알고 착각한 모양이야.”
“아아!”
“멋대로 마기를 빨아들이는 것도 그렇고, 가끔은 이놈이 살아 있는 건 아닌가 착각할 정도라니까?”
라데우스 최고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이것은 최고 수준의 마법 보조 능력과 함께 마기를 담아두는 저장고의 역할 또한 하고 있었다.
거기에 제작자가 의도한 건지는 몰라도 ‘마족’을 탐색해 내는 기능이 엄청나게 탁월했다.
네르하의 말을 듣고 있던 청년이 눈을 부릅떴다.
“뭣이? 그럼 네놈은 마족이 아니라는 건가?”
“라데우스의 혈족이 마족이 될 리가 없지.”
“라데우스라고!”
“몰랐나? 하긴, 이차원의 존재가 머리카락 색을 보고 바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
꾸득! 꾸드득!
라데우스라는 말이 튀어나온 순간, 청년의 목덜미 쪽에서 기괴한 실핏줄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눈치챘지?”
“처음부터. 라데우스 본대가 사라졌다고 곧바로 수작질을 벌이는 꼴이 같잖더군.”
뭐, 이 말은 어디까지나 거짓말에, 허세에 불과했다.
당연하게도 그 말이 먹힐 리가 없었는지 청년의 입가엔 조소가 맺혔다.
“같잖은 허세를.”
“혈마법을 이용한 건 아주 신선한 시도였어. 덕분에 연결 수단을 알아내는 데 꽤나 고생했지.”
“……!!”
사실, 고생한 것도 없었다. 그냥 우연히 얻어 걸린 것뿐.
하지만 정신적 타격은 확실히 입혔을 것이다. 자신의 수가 상대에게 파훼될 때의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곳에서 날 잡기 위해 함정을 파놓았다 이건가?”
“적어도 네놈을 성안으로 들이기 전에 잡을 수 있으니까.”
놈의 목적은 이곳 경계 도시 아르지엔의 장악 또는 붕괴.
당연히 놈의 뜻대로 흐르게 내버려 두다간 굳이 라데우스가 아니더라도 애꿎은 시민들이 희생될지 모를 일이다.
“좋아. 어떻게 걸렸는지는 몰라도 일을 조금 앞당긴다고 보면 되겠군.”
꾸득! 꾸드득!
갈색이었던 놈의 머리카락이 점차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그걸 넘어 관자놀이 인근에서 뿔 같은 게 자라나고 있었다.
“헉! 아, 악마!”
자기들이 모시고 온 행수가 마족이었는지는 꿈에도 몰랐는지 마부와 용병들이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가공할 살기와 마기가 주변을 휩쓰는 와중에도.
네르하는 그 영역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동부의 미케네 상단이라. 아마 동부 쪽에서도 너희 마족 세력이 뿌리를 내린 모양이지?”
“그건 명계에 가서 명왕에게 직접 물어보아라.”
화악!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그림자가 네르하를 덮쳤다.
“도련님!”
“주군!”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네르하는 차갑게 대꾸했다.
“너희는 나서지 마라.”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네르하를 완전히 덮치기 직전, 네르하의 손에 새하얀 불이 맺혔다.
“성화(聖火).”
성 속성의 불.
무려 5레벨에 해당하는 주문으로, 살상력으로 따지면 2레벨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지만.
성화는 일반 마법사가 마족이나 흑마법사를 상대할 때 무엇보다도 유용한 대응 마법 중 하나였다.
파파팍!
그림자는 마치 얇은 비닐처럼 불길의 영향력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렸다.
‘익혀 두길 잘했군. 마족이 상대라면 쓸 일이 있을 거라 하시더니.’
자신의 그림자가 대번에 소멸되자 청년, 아니, 마족은 제법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불을 다룰 줄 알다니 아주 애송이는 아니군.”
“헛짓거리 그만하고 제대로 해라. 안 그러면 순식간에 박살 날 테니까.”
“크흐, 자신감이 대단하군. 하긴, 라데우스의 종자라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지.”
촤악!
어느새 놈의 등에는 두 쌍의 박쥐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내 이름은 뮬란! 위대하신 마왕 비슈나르 님의 권속이자 지고하신 마신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부여받은 자!”
“마계 귀족!”
그 말을 알아들은 이들이 탄식을 내질렀다.
“네놈은 큰 실수를 한 거다. 중간계에 소환된 다른 놈들과는 달리 난 이 작전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모든 힘의 제한을 없앨 수 있는 축복을 받았으니까!”
즉, 저 뮬란이란 마족은 이전의 크루갈처럼 힘의 제약 없이 순수하게 100% 힘을 지닌 마족이란 뜻이었다.
뮬란은 검지와 중지를 들어 천천히 자신의 입가에 갖다 대었다.
“마계영역,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