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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12화 (112/237)

112화

<마계영역 (2)>

마치 핏빛 달이 뜬 것 같다.

주변의 색채가 새빨갛게 물들어 가면서 마음속에서 기묘한 흥분과 파괴 충동이 조금씩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 충동을 밀어 넣으며 네르하는 생각했다.

‘마족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고 했지. 육체 능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화된 무투형 마족과 영역을 사용할 줄 아는 결계형 마족.’

그리고 비율로 따지면 거의 대다수의 마계 귀족들은 결계형 마족이라고 했다.

‘남작이라면 오등작 중 최하급. 하지만 간부급은 확실할 터.’

네르하는 뮬란이 펼친 마계영역이 어디까지 뻗어가나 지켜보았다.

아르지엔 시를 모두 집어삼킬 정도라면 지금 네르하의 행동은 큰 피해를 야기할 멍청한 방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네르하는 놈의 영역이 시 전체를 집어삼킬 정도는 아닐 거라 확신했다.

‘그랬다면 굳이 이런 식으로 계략을 짤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직경 2km에 달하는 도시를 일개 남작이 전부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영역을 펼친다면 아무리 라데우스의 역량이 강대해도 맞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츠츠츠츠!

네르하의 예상대로 뮬란의 마계영역은 약 500미터가량 뻗어가다 원형을 그리며 멈추었다.

그렇다 해도 거의 도시의 4분의 1 정도를 잠식한 셈이었다.

뮬란은 자신이 불러낸 영역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이 나의 영역, ‘블러드리아’라고 한다.”

“…….”

“일개 인간들은 이 영역에서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모든 혈기를 영역에 빨리고 죽어 버리지.”

“그래 보이는군.”

“그것뿐일까? 마계영역에선 자신의 권속을 아무런 제한 없이 불러들일 수 있지.”

크르릉!

크러러렁!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곳곳에 존재하던 혈기와 그림자가 마수와 마물의 형상으로 빚어지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못 해도 수백 이상.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병사는 상대하기도 힘든 마성을 띠고 있다.

“오늘, 이 도시의 모든 인간은 사라진다. 그리고 네놈은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네르하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감싸고 있는 마계영역을 차분하게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엄청난 힘이로군.”

“뭐?”

“혈옥환마진(血獄幻魔陣)에 버금가는 살진을 혼자 힘으로 구현하다니.”

“무슨 헛소리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힘을 오랫동안 유지할 순 없겠지. 한번 진이 깨지면 다시 구현하는 데 힘과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들 것이고.”

아마 그 진을 다시 구현하는 대가는 이 성의 생명들이 될 것이다.

네르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장.”

“네. 말씀하시죠.”

“시민들의 대피는 모두 끝났습니까?”

“일단 되는 대로 시장 권한으로 반대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의 보호는요?”

“이곳에 투입된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경비병들을 투입했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린 네르하는 배커에게 시선을 돌렸다.

“배커.”

“말해라.”

“클로이아를 제외한 일행을 모두 데리고 가서 경비병들을 지원해라.”

“둘이서 저걸 잡겠다고?”

배커의 목소리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이전 상대했던 흑마법사와는 차원이 다른 강자임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잡을 수 있다. 그러니 가.”

“……알았다.”

배커는 의외로 별다른 항명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와 바스톤은 사뭇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들 역시 배커를 따라 자리에서 이탈했다.

그렇게 남은 클로이아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네르하와 같은 어깨선상에 섰다.

“역시 나뿐이죠?”

“뭔가 즐거워 보이는 것 같다?”

“기분 탓이에요.”

그런 말로 치부했어도 클로이아는 어째서인지 제법 기분이 괜찮은 것 같았다.

뮬란은 이런 상황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다가 이를 내보였다.

“준비는 제법 철저히 한 모양이구나.”

“아무리 그래도 만약은 대비해야겠지.”

“하지만 헛수고로 끝날 것이니 미리 애도를 표하마!”

촤르르륵!

뮬란의 등에 있던 두 쌍의 박쥐 날개가 급격히 커지더니 그대로 수많은 잔상을 그리며 네르하를 덮쳤다.

‘이건 그때 그놈의 수법이랑 비슷하군.’

분명 주단이었나? 암흑 교단 출신인 6레벨의 흑마법사.

어쩌면 저 뮬란이란 놈은 주단과 일면식이 있을 가능성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암흑 교단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곳도 분명 동쪽이었으니까.

“어딜!”

“서리 군주의 방패!”

클로이아가 손을 휘젓는 동시에 그녀의 손목에 감긴 팔찌가 빛을 발했다.

카가가강!

강철도 잘라버릴 것 같았던 날개의 찌르기는 얼음 방패에 막혀 허무하게 튕겨나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쩌저저적!

“……!”

어느새 튕겨 나간 날개에 얼음 결정이 맺히며 급격하게 얼어가기 시작했다.

“제법 잔재주를 부리는군!”

뮬란은 마기를 밀어넣어 빙결을 밀어내는 동시에 그대로 소환수들을 향해 두 사람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크라라랅!

작게는 늑대 형태의 마수에서 크게는 촉수가 여러 개 달린 정체불명의 마물까지.

클로이아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확실히 까다롭군요. 6레벨 이하의 마법사는 혼자서 상대할 만한 존재가 아니에요.”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이 상황에서요?”

“얼마나 죽이면 저 마물들이 나오지 않을까?”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지적 호기심에 클로이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마법이라기보단 권능의 영역이에요.”

“그건 들었어.”

“그리고 지금 우리 주변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마물들은 저자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 영역 안에 소환된 ‘소환수’의 개념이고요.”

“마법사의 영역과는 다른가?”

“많이요. 대마법사들만이 펼칠 수 있다는 ‘영역’은 저 마계영역과 비슷하지만 달라요. 만약 소환 계통의 대마법사가 영역을 사용했다면 저 마물들은 영역 자체를 부수지 않는 이상 무한히 튀어나오겠죠.”

“그럼 지금은?”

“마계에 있는 놈의 영지에 권속이 얼마나 있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죠?”

결과적으로 보면 저 뮬란이란 놈의 소환도 거의 무한에 가까운 개념이라는 건 맞았다.

수천 년을 살아왔을 마계 귀족이 수많은 권속을 거느리고 있다는 건 기록이 증명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결과가 같다고 과정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마법의 ‘영역’이란 측면에서 이건 하늘과 땅을 넘어서는 차이였다.

“그런데 이건 왜 물어본 거에요?”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지난 2개월간, 네르하는 수하들을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마나 익스텐더를 완전히 이식받고 벨카서스 학파의 술식을 꾸준히 익혀 나갔다.

마법이란 학문을 꾸준히 파고들면서 네르하는 어느 순간, 저 너머에 있는 ‘경지’가 무엇인지 얼추 감을 잡을 수가 있게 되었다.

비록 실체를 잡기엔 무척이나 멀었고 지금은 그저 장님이 손을 내밀어 더듬는 수준이었지만 시저나 루트비히가 들었다면 그야말로 경악을 넘어 혼비백산했을 내용이었다.

“클로이아, 잠깐 시간 좀 끌어 봐.”

“얼마든지요.”

네르하가 가져다준 극음의 영약을 모두 소화하면서 클로이아는 진정으로 7레벨의 마도사에 걸맞는 마나 절대치를 이룩할 수가 있었다.

“이것들이 감히!”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뮬란은 노성을 터트리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어마어마한 피의 구체가 폭발하며 두 사람을 향해 쏘아졌다.

“죽어라아아아앗!”

피한다면 그대로 도시 성문을 꿰뚫고 직선상에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킬 게 분명한 위력.

“확실히 마계 귀족의 이름값에 걸맞는 힘이군요.”

“어디서 그따위의 여유를 내게 보이느냐!”

“당연히 막을 만하니까 그러는 거겠죠?”

클로이아가 피의 파도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만년빙정(萬年氷晶).”

작년까지만 해도 익히긴 했어도 마나의 절대치가 모자라 쓸 수 없었던 서리 일족의 비기가 그녀의 손에서 펼쳐졌다.

쩌저저저적!

그녀의 주위에서 서리의 폭풍이 나선을 그리며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엔 어느새 어린아이 팔뚝만 한 빙정이 생성되어 느린 속도로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었다.

“……!”

“받아랏!”

터엉!

한순간 빙정의 위력이 어떠할지 계산이 끝난 뮬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계산은 절대로 틀리지 않았고, 뮬란의 비기인 블러드 매서커(Blood massacre)를 정면에서 찢어발기고 말았다.

“크아아아악!”

클로이아가 쏘아낸 만년빙정은 뮬란의 마법을 정면으로 파훼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대로 어깻죽지를 꿰뚫고 상반신 일부를 날려 버렸다.

“이런 빌어먹을 인간 따위가아아아!”

“그 인간에게 처발려 놓고 뭐래?”

“반드시 네년의 사지를 찢어 개 먹이로 줘 버리겠다!”

촤악!

뮬란의 날아간 상반신이 피로 채워지더니 그대로 어느새 육체가 완전히 복구되었다.

기세는 줄었을지언정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말끔하게 회복되자 클로이아도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영역을 펼친 마족은 진짜 성가시다더니 할머니 말이 맞았네.”

마나 소모량이 어마어마한 만년빙정을 괜히 쐈다는 후회가 뒤늦게 몰려왔다.

하지만 자신의 역할은 승부가 아닌 지연.

적의 기세를 누그러뜨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역할을 다했다.

“죽어라!”

“어딜!”

그 직후, 클로이아와 뮬란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한쪽은 모든 제한이 사라진 남작급 마족.

다른 한쪽은 20대의 나이에 7레벨에 이른 대륙 굴지의 천재.

서리의 폭풍과 피의 폭풍이 서로를 잡아먹으며 상잔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 모두 흥이 돋았는지 제법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법 쓸 만한 솜씨구나, 인간이여!”

“내가 할 소리야!”

“하지만 아직 동수 이상을 상대로 한 경험이 부족한 모양이구나.”

“……!”

뮬란의 말마따나 클로이아는 성인이 되기 전부터 라데우스 가문에 인질로 와서 실전을 겪어 본 경험이 적었다.

“흐흐흐, 내 권속이 되는 것은 어떠냐? 너라면 구울 따위의 저급 흡혈종이 아닌 영원불멸한 수명을 지닌 상급 권속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햇볕도 못 쬐는 그런 반푼이는 되기 싫거든!”

뮬란 같은 순혈 마족이 아닌 이상 뱀파이어 계열의 권속들은 햇빛에 극도로 취약하기 마련이었다.

“그럼 죽어라!”

이미 네르하의 존재는 완전히 뒷전이었다.

뮬란의 권속들은 클로이아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뮬란이 소환한 피의 창들이 엇박자로 클로이아의 방어를 헤집으며 틈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젠장!’

당장 몰아치는 공격들을 쳐 내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수 싸움이 길어질수록 이쪽이 조금씩 말려들고 있다는 거였다.

오랜 세월을 살아 원숙하고 노회한 뮬란에 비해 클로이아는 아직 그 재능을 모두 피우지 못한 가공이 덜 끝난 원석이었으니까.

그때, 클로이아의 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어, 클로이아. 여기까지만 하고 물러나.”

“도련님!”

“볼 만큼 보고 느낄 만큼 느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게 무슨 소리…….”

“휘말리기 싫으면 내 뒤로 빠져.”

그 순간, 클로이아는 네르하의 말을 무시했다간 자신의 안위를 보전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그녀가 대응을 포기하고 빠지자 뮬란이 대로하며 네르하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감히 즐거운 승부에 찬물을 끼얹다니!”

“여기까지다, 마족.”

“저년보다 약해 보이는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영역 전개.”

“뭐?”

네르하가 내뱉는 말의 의미가 머릿속에서 해석되기까지 아주 약간의 딜레이가 있었다.

그만큼 황당하고 믿기 힘든, 그리고 있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콰지지직!

“……?!”

쩌저저저적!

네르하가 ‘영역 전개’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뮬란이 펼친 마계영역, 블러드리아의 공간이 마치 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 나며 소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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