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비슈나르>
쩌적!
쩌저적!
마계영역이든 대마법사의 영역이든.
그것이 깨지기 위해서는 셋 중 하나의 조건을 달성해야만 한다.
첫째는 시전자의 목숨을 거두거나.
둘째는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영역의 공간을 통째로 붕괴시키거나.
마지막으로 같은 영역을 시전해 상대의 영역을 잡아먹는 것뿐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뮬란은 물론 클로이아마저 눈앞에 벌어진 이적에 경악을 토해냈다.
네르하가 마족의 권능처럼 똑같은 마계영역을 다룬 게 아니라면 8레벨에 이르러 ‘심상영역’을 구축했다는 소리였으니까.
“실패군.”
그런데 그런 전설적인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네르하의 표정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안타깝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탄식을 내뱉을 뿐이었다.
“네놈, 지금 뭘 한 거지?”
블러드리아가 깨지면서 누구보다 당황한 건 당연히 뮬란 본인이었다.
네르하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상쇄.”
“사, 상쇄라고!”
“공간을 다루는 것은 역시 어렵군. 숙련된 차원 계산 능력이 없다면 오히려 막대한 반동이 일어나니, 원.”
“어, 어떻게 애송이 따위가?”
네르하는 뮬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딱히 대단한 걸 한 게 아니다. 그저 저 너머의 경지를 현재의 힘으로 한번 구현해 보고자 시도했을 뿐. 결과적으론 멋지게 실패했지만.”
“그,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이번엔 경악한 클로이아가 따져왔다.
사실, 지각 능력이 초인의 경지에 이르면 공간의 흐름을 어느 정도 느낄 수는 있다.
초고위의 마법사들은 그들이 느끼는 공간의 흐름을 이론화, 도식화하여 ‘공간 계열’의 마법으로 정립했다.
하지만 그런 이론이 없는 네르하는 무적권신 시절의 감각과 블러드리아의 생성 방식을 참고해 ‘영역’이 어떤 현상으로 일어나는지만 대략적으로만 깨닫고 그걸 시도해 본 것이다.
“마나 감각 능력, 공간 지각 능력, 의념의 제어 능력이 모두 초월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인데!”
“뭐, 내가 그 정도의 천재인가 보지.”
“…….”
순식간에 재수 없다는 기색을 풍기며 그녀의 표정이 구겨졌다.
네르하는 그런 클로이아를 뒤로하며 뮬란에게 다가갔다.
“뭐가 됐든 실패는 실패지. 원래라면 펑 터지면서 리바운드 현상이 일어나야 하지만 네놈이 펼친 영역이 완충제 역할을 해 준 모양이야.”
“미친 인간이로군! 자칫 잘못하면 그 터지는 것이 네놈의 육체일 수도 있었다!”
“안 터졌으니 잘된 거잖아?”
팟!
네르하가 땅을 박차곤 그대로 하늘에 떠 있는 뮬란에게 접근했다.
“……!”
“이제 처맞을 시간이다, 빌어먹을 놈아.”
콰직!
네르하의 발차기가 그대로 뮬란의 목덜미를 짓누르며 불길한 소리를 내었다.
“커! 끄어어억!”
발차기의 방향을 아래쪽으로 향하자마자 뮬란의 신형이 그대로 추락하며 바닥에 처박혔다.
쾅!
“마족의 영역이란 상당히 무서운 기술이더군. 일정 수준 이하는 대항조차 하지 못하고 잡아먹힐 테니까.”
“끄억! 끄르르륵!”
입에서 피거품을 문 뮬란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 어째서 재생이?”
화 속성이나 성 속성 마법에 직격당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단순한 발차기. 고작 그것뿐이었다.
“당연한 거 아니냐?”
네르하의 손에 시꺼먼 마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재생 능력을 방해한 원흉이 마기라는 것을 알아차린 뮬란은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표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대, 대체!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서, 서, 설마 네놈이! 네놈이 그 초마인(超魔人)이라도 된다는 것이냐!”
“……초마인?”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뮬란의 말에 네르하와 클로이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게 무슨 소리냐?”
“……!”
무언가를 내뱉으려던 뮬란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투레질을 하듯 고개를 털었다.
‘아니, 괜한 말로 인간들에게 정보를 줄 수는 없지.’
영역을 펼친 상태에서도 클로이아에게 조금 우위를 점한 정도였는데 여기에 영역을 깨부순 네르하가 합류한다면 결과는 뻔했다.
‘이 임무에 실패하면 그분에 의해 친히 소멸당할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네르하는 그 순간, 뮬란이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속셈을 알아차렸다.
“어디서 도망가려고!”
“크윽!”
대번에 도주 경로를 읽힌 뮬란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선택지가 전투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나, 뮬란이 이렇게 당할 줄 알고!”
뮬란은 최후의 방법으로 네르하에게 근접전을 걸었다.
근접전에 취약한 마법사라면 쉽게 빈틈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역효과였다.
퍽! 퍽! 퍽! 퍼퍼퍽!
“크억! 억!”
“주단이란 놈보단 확실히 낫지만 그래도 고수의 영역이라 할 수는 없군.”
놈의 날개와 혈마법은 확실히 위협적이었지만 마법도 아니고 근접전 수 싸움으로 네르하에게 승부를 걸은 건 패착이었다.
놈이 휘두른 그림자 날개를 부드럽게 흘린 네르하가 그대로 주먹에 나선의 불을 일으켰다.
“……!”
그 일격의 위험성을 감지한 뮬란이 대번에 속도를 내며 네르하에게서 떨어졌지만.
마나 익스텐더 활성화.
속성 변환 및 삼중 속성 결합.
형태 변환.
출력 증폭.
대번에 다섯 가지의 과정을 건너뛴 네르하의 주먹이 어느새 다채로운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엘리멘탈 볼텍스.”
쩌적!
네르하의 고유 계통인 ‘속성 통합’이 발동되면서 대번에 삼중 속성이 융합되어 벨카서스 학파의 비전이 발현되었다.
“꺼어어억!”
6레벨에 달하는 일격을 고스란히 얻어맞은 뮬란은 고통과 함께 이성이 증발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즉, 뮬란이란 존재의 영원한 소멸을 뜻했다.
“이, 이대로, 이대로 죽을 수는!”
“거, 엄청나게 질긴 놈이군.”
심장 부근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고도 뱀파이어 특유의 질긴 생명력은 여전히 뮬란의 육체를 지상에 붙들어 놓았다.
그런데.
화륵!
“응?”
“비, 비슈나르시여!”
끈질기게 저항할 것처럼 보였던 뮬란의 신체가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흑염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저것이 외부의 작용으로 인한 것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저, 저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제바아아아알!”
뮬란은 하늘을 바라보며 비슈나르라고 불리는 누군가에게 미친 듯이 빌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허망한 울림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절망이 되었다.
화르르!
그렇게 흑염은 뮬란의 몸을 완전히 먹어 치워 버렸고.
곧 사그라들 것 같았던 흑염은 어째서인지 마치 인간의 얼굴 형상으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그 흉측한 변이를 지켜본 클로이아가 소름 끼친다는 비명을 내질렀다.
‘괴사로군.’
네르하 역시 이런 경험은 처음인지라 굳은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목구비가 완전히 자리 잡은 염면(炎面)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구나, 라데우스의 아이야.
“네가 비슈나르인가 뭔가 하는 놈이냐?”
―그렇단다.
목소리나 얼굴의 형태로 볼 때, 아무래도 비슈나르라는 마족은 여성체인 듯했다.
―설사 7레벨의 마법사가 대기하고 있다 해도 뮬란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을 거라 생각했거늘.
그 뮬란이란 마족에게 조금 밀렸던 누군가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익숙한 힘을 다루는구나. 네게 흥미가 생기는구나.
익숙한 힘.
뮬란이란 놈이 말했듯, 정말로 이 마나와 마기의 융합기가 초마인과 관련이 있는 건가?
네르하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입가에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
“전방에서 한창 털리기 바쁜 마왕님께서 내게 흥미를 가질 짬이 있나?”
―현재의 전황이 결과를 정하지는 않지. 그대와 나는 그리 오래지 않아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 같구나.
고대 문헌에 따르면, 마왕급에 도달한 마족들은 결코 허언을 내뱉지 않는다고 했다.
세계의 인과를 읽어 들이는 그들의 발언은 사실상 예언이나 다름없다고 하는데?
―지금의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대의 귀에 들어갈 리는 없겠지.
잘 아는구만.
―하지만 그대 주변의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란다.
“협박도 참 고상하게 하시는군.”
―후후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대의 마음 나름일 것이니라.
네르하는 뚱한 목소리로 고개를 꺾었다.
“설마 이렇게 인사나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아니, 그대의 말이 맞다. 오늘은 그저 인사차 찾아온 것이지.
설마 뮬란이란 마족 놈이 실패할 거라 예상했었나?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흐르던 때, 비슈나르의 얼굴 형태를 만들던 흑염이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럼 정식으로 얼굴을 마주 보기를 기대하고 있겠다. 북방에서의 유희가 그대에게 즐거움을 주기를 바라지.
수만, 수십만의 존재들이 생사를 걸고 싸우는 전장을 고작 ‘유희’라는 말로 정리하는 걸 보니 확실히 정상적인 존재는 아니다.
―다시 보자꾸나. 이자카르의 힘을 얻은 아이야.
‘이자카르!’
아무래도 저 마왕은 융합기보다는 마기의 근원인 이자카르의 힘에 더 주목한 듯 보였다.
“목 씻고 기다리는 게 좋을 거다.”
―후후, 크루갈이 너와 다시 싸우고 싶다고 떼를 쓰더구나. 나를 만나는 건 그 아이를 넘어선 뒤가 될 것이다.
“……!”
* * *
갑자기 튀어나온 비슈나르가 꽤나 흥미로운 말을 남기고 돌아간 뒤.
“감사합니다, 네르하 도련님. 도련님의 계획이 없었다면 도시는 마족들에 의해 큰 화를 입었을 겁니다.”
사건이 진정되자마자 아르지엔의 시장인 넥스가 네르하에게 돌아왔다.
“덕분에 제 목도 간수할 수 있게 되었고 말이죠. 하하하!”
“피해는 어떻소?”
“사전에 경고를 무시하고 대피하지 않은 시민들이 제법 다쳤습니다. 사망자도 꽤 있고요. 다만 경고를 받아들여 대피한 시민들은 전원 무사합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사교도들은 모두 사로잡아 지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도시에서 내란을 획책한 자들이니 정식으로 재판에 회부하여 목을 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어마어마한 물자는 자연히 시에 귀속될 것이다.
거기에 마족 뮬란이 행수로 변장한 미케네 상단은 고강도의 조사를 받게 될 것이고 말이다.
“비록 시간을 지체했지만 그래도 귀족급 마족 하나를 잡은 건 큰 소득이군.”
그렇게 기분 좋게 시를 떠날 준비를 하려고 할 때였다.
“네르하 도련님.”
갑자기 넥스 시장이 네르하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인지?”
“사실, 네르하 도련님께서 도시에 도착하셨을 당시, 제가 직접 마중을 나가지 않은 건 사교도들에 대한 문제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본가의 직계들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습니다.”
본가 직계들이 세력을 불리기 위해 무슨 짓을 해대었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눈앞의 시장은 그런 그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는 것도.
“하지만 당신은 다르더군요. 이걸 그릇의 차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성품의 차이라고 해야 할지는 아직 의문입니다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도시의 운명을 걸고 싶습니다.”
“……!”
“보통, 도시의 시장은 제국의 황제가 임명합니다만 라데우스 직할 영지 안에 있는 42개의 도시는 라데우스 본가에서 인사를 결정합니다.”
라데우스 가문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후계 경쟁이 시작되면 각 시장들은 후계 중 누군가를 공식적으로 지지해야 합니다.”
지지할 수 있다가 아니라 지지해야 한다.
그 어감이 주는 차이는 꽤 기묘했다.
“그렇다는 건 당신이 저를 지지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