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합류>
“네. 사실, 무력적인 측면에서 각 시장들의 지지는 있으나 마나입니다. 열 개 도시를 합쳐도 본가의 무력 부대 하나보다 못할 테니까요.”
그건 그렇긴 하다.
골육상쟁까지 벌어지는 후계 경쟁의 특성상 최종적으로 승리자를 만드는 건 본신의 무력과 그 무력을 뒷받침하는 무력 부대의 질.
“하지만 무력 외의 모든 분야에서 시장들의 지지는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그렇겠죠.”
금력, 인력, 그리고 그 외 머릿수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
각 시장들의 지지는 도시의 지지나 다름없으며 그것은 곧 권력이며 힘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에게서 나오는 건 바로 판을 짤 수 있는 힘이지.’
시장이 말을 이었다.
“라데우스의 후계 경쟁은 물밑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가주께서 직접 정식으로 후계 경쟁을 천명한 적은 없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사실, 장남이자 큰형인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가 차기 가주가 될 것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도련님께서는 정식으로 후계 쟁탈전이 벌어지기 전에 아직 지지자를 정하지 않은 다른 도시의 시장들을 설득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3년이라…….’
판데모니움 건의 공으로 네르하가 가주로부터 허락받은 3년의 시간.
그 시간이 지나고 네르하가 리브라를 졸업하면 그때야말로 정식으로 후계 경쟁이 벌어진다.
네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당신의 충성과 조언은 잘 받아들이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네르하 도련님.”
넥스 시장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 * *
시장의 충성 맹세가 있은 직후, 네르하와 일행은 빠르게 북방 전선으로 갈 채비를 했다.
“아주 잠깐 사이에 도시 하나를 또 손에 넣었네요. 정말 수완이 대단하세요.”
“글쎄.”
그런데 어째서인지 네르하는 말끝을 흐리며 묘한 반응을 보였다.
“왜요? 도시 하나를 먹은 게 딱히 성에 차지 않나요?”
“그건 아니지. 다만 아직 그를 신뢰하기엔 여러모로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야.”
시장 넥스 데인이 네르하 덕분에 목숨을 건사하게 된 것은 맞다.
또한 네르하의 선견지명으로 도시 전체가 마족의 손아귀에서 자유를 되찾은 것 역시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이어진 넥스의 충성 맹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렌 타운과는 사정이 달라. 정식으로 후계 경쟁이 시작되고 지지 선언을 하기 전까진 내 편이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오히려 다른 형제들의 이중 첩자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굳이 그렇게 단정하기보단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는 거지. 개인의 인품, 능력과 정치적 입장은 별개의 사안이니까.”
네르하는 북방의 일이 끝나면 한번 시장의 역량과 충성심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시장이 선지자일지 이중 첩자일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빨리 출발하자고. 우리가 활약해야 할 장소는 이곳이 아니니까.”
“동의해요.”
네르하와 클로이아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은 마계영역으로 생성된 마물 몇 마리를 때려잡은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경지의 상승과 공을 노리고 온 만큼 네르하가 싸웠던 뮬란 정도의 거물 사냥에 목말라 있었다.
보급품을 가득 채운 네르하 일행이 경계 도시를 나서기 직전, 시장이 일행을 배웅하며 이렇게 말했다.
“라데우스 본가와 북방 전선의 사령관께 이번에 있었던 일의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특히 북방 전선에선 분명 도련님께서 세우신 공적을 알아주실 겁니다.”
“고맙군요.”
“다음에 뵈었을 땐 도련님이 아닌 주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될 겁니다. 부디 대업을 이루시길.”
네르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네르하와 일행들은 경계 도시를 지나 본격적으로 북방에 발을 내디뎠다.
경계 도시 이후의 북방은 유목 민족들이 간간이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너른 설원만이 존재하는 황량한 곳이다.
그리고 그 설원마저 지나치면 진정한 의미로 북방이라 불리는 거대 산맥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곳은 클로이아의 고향인 서리 일족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생명체를 찾기가 어렵군요.”
“그러게. 흔히 돌아다니는 야생동물조차 찾아볼 수가 없군.”
“곳곳에서 마력의 잔향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꽤나 전에 이곳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마족들이 이런 곳까지 영역을 넓혔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일행은 하루를 꼬박 더 북상할 때까지 주변에서 아무런 생명체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이틀째가 되어서…….
“군대다!”
설원 한가운데에 진을 치고 있는 후방 보급 부대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정지! 신원을 밝혀라!”
꽤나 오랜만에 발견하는 인간의 모습에 일행은 제법 반가워하며 순순히 검문에 응했다.
그렇게 상대의 신분을 알게 된 보초병들은 그 자리에서 납작 엎드려 오돌오돌 떨었고 말이다.
“네, 네, 네르하 도련님을 몰라뵈어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됐고,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말씀만 하십시오!”
아르지엔의 경비대장인 마커스 이상으로 이곳의 병사들은 가문 직속이니만큼 라데우스라는 이름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결국 진지 안에서 라데우스 소속 마법사가 튀어나오고 나서야 병사들은 안정을 되찾았다.
“여기서 얼마만큼 더 올라가야 총사령관이 있는 진지에 도착하지?”
“본진은 이곳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군.”
나름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던 북방 전선은 현재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좀처럼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대체 얼마나 쏟아지길래 6만이나 되는 대군이 진격을 못 하고 있지?”
마법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처리한 마물의 수만 10만이 넘었습니다.”
그 가공할 숫자에 네르하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엄청나군.”
“이것도 그나마 나은 겁니다. 최전선에서 본대를 가로막던 백작급 마족이 쓰러지기 전엔 일반 병사들은 물론 본가의 전투부대 역시 희생이 엄청났으니까요.”
“결국엔 쓰러트렸다고 들었는데.”
“삼마자께서 라데우스의 원로들과 협공해서 놈을 쓰러뜨리셨습니다. 산 하나가 무너질 정도의 접전이었지요.”
마법사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
“…….”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일행은 구불구불하면서도 규칙적인 산맥의 모습 어딘가에서 원래 있어야 할 봉우리 하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저, 저게 말이 되나?”
딱 봐도 해발고도가 수천 미터 단위는 될 것 같은 봉우리인데 그게 사라져 있던 것이었다!
“무슨 메테오를 떨어뜨린 것도 아니고.”
“8레벨의 마법사와 그에 준하는 이들이 힘을 합치면 비슷한 짓이 가능한 모양이더군요.”
일행들은 감탄사를 터트리며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살폈다.
그런 와중, 네르하의 반응을 살피던 클로이아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별로 크게 감흥이 없는 것 같네요?”
“아니, 뭐…….”
산을 무너뜨리는 신위야 분명 대단한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주변 이들처럼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다.
하다못해 전생의 자신 역시 전력을 다한다면 저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했고.
‘천마’의 경우는 더더욱 그랬으니까.
네르하는 시선을 돌려 화제를 바꾸었다.
“일단은 본대로 가서 사령관을 만나고 직무를 부여받아야겠군.”
“네!”
일행은 보급 부대를 지나 계속해서 북상했다.
그렇게 얼추 3킬로미터를 질주해 마법사가 말했던 라데우스의 본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본대의 모습을 보고는 네르하조차 할 말을 잊었다.
‘무슨 성을 쌓아 놨군.’
보급 부대처럼 천막 위주의 진지를 꾸린 줄 알았는데 눈앞엔 아르지엔의 3분의 1 크기에 달하는 거대한 설성(雪城)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 어마어마하군요. 과거, 라데우스의 축성 마법은 케프렌의 정예들조차 뚫지 못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고 하던데 그걸 눈앞에서 볼 줄이야.”
루시아 역시 눈앞의 광경에 압도당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네르하 역시 감탄했다.
‘저런 식으로 임시로나마 축성이 가능하다면 그 전략적인 우위는 대체 얼마나 압도적일까?’
네르하와 일행들은 문을 지나 총사령관이 있는 내성까지 도달했다.
‘이런 압박감은 가주가 직속 호위대를 이끌고 온 이후로 처음이군.’
내성으로 들어갈수록 라데우스 직속 전투 마법사들이 포진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그 백령대라 불리던 투귀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압도적인 숫자가 내뿜는 기백은 산전수전 다 겪은 네르하조차도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압박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들은!’
수백 명의 마법사들의 중심에서 특이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네 명.
그중 일부는 한 번이나마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마중을 나왔을 줄은 몰랐군요.”
뒤에서 루시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루시아로서도 저들의 정체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전원이 은갈색의 머리카락을 기른 자들.
즉, 전원이 라데우스의 직계 혈족이자 네르하의 형제자매들이었다.
“어서 와라, 동생아.”
개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30대의 미역 머리 사내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르하는 그 사내를 보자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드빅 형님.”
라데우스의 차남, 루드빅 게일런 라데우스.
온화한 성품과 깔끔한 매너로 가문 내외로 인망이 두터운 존재였다.
“왔네, 우리 막내?”
“…….”
“늦었다.”
순서대로 삼녀 세티안, 사남 바멜의 말이었다.
무뚝뚝한 차녀 레티안은 묵묵하게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둘째 누님을 제외하면 수여식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간만입니다, 형님들, 누님들.”
네르하는 주눅 들지 않고 그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는지 루드빅을 비롯한 다른 형제자매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변했군.”
긴 생머리가 인상적인 레티안 라데우스가 나지막하게 한마디를 날렸다.
“그러게? 벌벌벌 떨면서 오줌이라도 지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레티안의 옆에 있던 트윈 테일의 소녀(?) 세티안 역시 묘한 웃음을 지으며 네르하를 살폈다.
잠깐 묘한 침묵이 흐르던 때, 루드빅이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일단 형제자매 간의 회포는 다음에 풀기로 하지. 총사령관이 널 기다리신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경계 도시에서 남작급 마족 하나를 잡았다며? 시작부터 제법인데, 우리 막내?”
벌써부터 그 정보가 수뇌부의 귓가에 들어간 건가?
“운이 좋았나 보군. 마계 귀족 중에서도 허약한 놈을 만났나 보지?”
바멜의 말이 끝나자마자 네르하의 뒤편에서 울컥거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네. 정말로 운이 좋았습니다.”
네르하는 눈짓으로 일행을 진정시키면서 바멜의 말에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공을 폄하하는 건 당연히 예상한 일이었다.
“흥, 별거 아닌 공을 세웠다고 우쭐해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고작 그런 피라미 잡았다고 우쭐해할 리가요? 앞으로 잡아야 할 놈들이 수두룩한데 말이죠.”
그 순간, 네르하의 표정에 ‘이죽거림’이 생겨났다.
“형님처럼 마계 백작급을 혼자서 때려잡으신 정도는 절대 아닙니다.”
“뭐?”
“아, 아니었나요? 그 정도는 잡으셨으니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신 것 아닙니까?”
“이 자식이 지금 무슨 시건방진 말을……!”
“그만!”
바멜이 분노를 터트리며 네르하에게 달려들려던 찰나, 루드빅이 서릿발 같은 노성으로 바멜을 제지했다.
“바멜, 동생의 공을 그런 식으로 비꼬는 건 형제간의 예의가 아니다.”
“…….”
바멜이 인상을 구기며 침묵했다.
“네르하, 너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래도 네 형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죄송합니다, 루드빅 형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네르하는 루드빅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루드빅에게지 바멜을 향한 사과는 절대 아니었다.
“우리 막내, 말발이 좀 늘었네?”
옆에서 지켜보던 세티안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여기서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이들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