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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15화 (115/237)

115화

<삼마자, 류레이아>

“총사령관께는 내가 안내해 주마. 너희 모두 따라와라. 총사령관 집무실 안에선 멋대로 굴지 말고.”

“……네. 형님.”

“알겠어요. 오라버니.”

바멜과 두 자매는 루드빅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바멜은 네르하 옆을 지나치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두고 보자’는 말을 남겼다.

‘흠, 내게 두고 보자는 놈들은 많았지만 정말로 두고 보다 실행한 놈들 중에 살아남은 놈은 없었는데.’

그래도 명색이 형제인데 죽이는 건 좀 그런가?

‘정말로 두고 볼 생각이라면 적당히 조져야겠군.’

네르하는 이 생각을 끝으로 바멜에 대한 인상을 털어 버렸다.

그것보단 이제 곧 새로운 삼마자를 만나는 거에 신경이 훨씬 기울어 있었다.

백년하수오를 채집할 때 만났던 머르딘 이후로 만나게 되는 라데우스의 최고 전력 삼마자(三魔子).

“어서 와.”

“……!”

‘류레이아’라는 이름에서 얼추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상대는 여성이었다.

다만 지금까지 봐 왔던 대마법사들이 하나같이 백발이 무성한 할아버지들이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연배가 분명할 상대도 다 늙은 할머니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는 상대는 에메랄드 빛이 반짝이는 눈동자를 지닌 경국의 미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네르하의 시선을 끌어당긴 것은 다름 아닌.

“엘프?”

삼마자 류레이아 엘마이넨은 다름 아닌 숲의 종족이라 불리던 엘프였다.

류레이아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엘프, 처음 봐?”

“이렇게 직접 마주 보는 건 처음입니다만.”

“어? 그래?”

주도 베리타스에서 엘프는 물론 여러 이종족들을 본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직접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내가 딱히 할 말이 없는데.”

류레이아는 입술을 비죽이며 네르하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살아온 세월에 비해 대화를 이끌어가는 기술은 그다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 지금 내가 커뮤니케이션이 결여된 머저리라고 생각했지?”

“아니, 그런 생각은 안 했습니다만.”

네르하는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고개를 털었다.

비슷한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상대를 모욕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

류레이아는 뚱한 기색으로 네르하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표정을 풀었다.

“뭐, 좋아. 나는 가슴이 넓은 엘프니까 조금 의심스럽지만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실제 류레이아의 가슴은 딱히 넓지도 않았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류레이아의 표정이 살벌하게 변했다.

“죽는다.”

“…….”

네르하는 그 순간, 자신의 생각을 마음속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저 엘프는 독심술 비슷한 무언가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괜찮을까, 이 토벌군.’

네르하가 북부 전선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을 때, 류레이아는 자신의 옆에 쌓여 있던 보고서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르지엔의 시장인 넥스 데인에게서 보고서를 전달받았어. 뒤에 있는 서리 일족의 후계자와 힘을 합쳐 뱀파이어 계통의 마계 귀족을 잡았다며?”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서도 도시 내의 피해는 고작해야 대피 권고를 무시한 수십 명 이내. 제법인데?”

아무래도 시장이 꽤 정성을 들여서 보고서를 작성한 모양이었다.

류레이아가 묘한 코웃음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흐흥, 머르딘이 나중에 크게 될 놈이라고 극찬을 했었는데 마냥 빈말은 아니었나?”

만난 건 단 한 번이지만 머르딘이 제법 낯간지러운 칭찬을 날린 모양이었다.

“거기에 시저 놈도 드디어 제대로 된 제자를 얻게 되었다고 애처럼 좋아하더니만.”

대마법사들 간에 뭔가 커뮤니케이션이 있는지 류레이아는 시저와도 안면이 있었다.

류레이아가 네르하를 칭찬할 때마다 주변에 앉아 있던 다른 직계들의 표정은 점차 좋지 않게 변했다.

그만큼 네르하가 세운 공적을 류레이아가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 원래 이번 북방 전장은 좀 특수하지. 원래라면 너희 직계들은 사령관 자리를 하나씩 맡아 전선을 총괄하는 게 일반적이야. 하지만 가주는 이번 전쟁에선 참가한 모든 직계들이 일개 소대장에서부터 시작해서 올라오는 걸 원했다.”

‘호위가 없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나?’

직계들과 조우하기 전, 수백의 마법사들이 있었지만 정작 그들의 곁에 붙어 호위하는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원래라면 너도 가장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경계 도시에서 세운 공을 참작한다면…….”

류레이아가 뭔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원한다면 참모진에 넣어 줄 수 있는데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네?”

“뭐, 뭐라고요?”

“잠깐만요! 그건!”

뒤에 있던 직계들에게서 대번에 반발이 쏟아졌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루드빅마저도 류레이아의 이 발언에 얼굴빛이 달라질 정도였다.

하지만 류레이아는 요지부동이었다.

“시끄러워. 이 토벌대 총대장은 나야.”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말단 병사로 강등당하고 싶지 않다면 내 의견에 토를 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에 대번에 소란이 잦아들었다.

라데우스는 상명하복이 철저한 집단. 아무리 직계들이라도 현재 상황에선 류레이아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아직도 누군가를 지지하지 않은 중립의 입장이라면 더더욱.

“어떻게, 제안을 받아들일래?”

참모진이라는 말에 모두가 동요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참모란 전쟁에서 총사령관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보직이면서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가장 무난하게 공을 세울 수 있는 자리였다.

게다가 모두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만큼 첫 시작 지점이 참모진이라면 그 이점은 대체 얼마나 클 것인가?

과장해서 해석하면 류레이아가 네르하에게 후계 지지 선언을 한다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

네르하는 깔끔하게 참모진의 자리를 거절했다.

“정말로? 네 형제자매 중에서 참모진에 합류한 건 루드빅뿐이야. 그 이점을 정말 모르겠니?”

“알면서도 하는 소립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 자리에 있지 않아서요.”

“후후후, 정말 재밌는 아이야.”

류레이아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 야심도 크고.”

네르하가 노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대번에 파악한 듯싶었다.

“굳이 마음도 없으면서 제안을 날리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아, 들켰나?”

류레이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르하의 말마따나 그녀는 처음부터 네르하에게 참모진 자리를 줄 생각이 없었다.

“하긴, 진심으로 소가주 자리를 노린다면 참모 자리에 묶여 있으면 안 되겠지.”

움찔!

그 말에 속으로 나름 안도하고 있던 루드빅의 표정이 다시금 변했다.

네르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르바 형님이 이 자리에 없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어서겠죠.”

“아하하, 맞아. 아주 눈치가 빠르네.”

류레이아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어진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후계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공을 세운 건 사실. 원하는 게 있다면 적당한 선에서 들어주도록 할게.”

이번에야말로 류레이아는 제대로 된 보상을 제시했다.

“원한다면 직계로서 체면치레를 할 수 있을 수준의 전투 마법사들을 내줄 수도 있어.”

현재, 다른 직계들이 휘하에 거느린 전력은 전부 5레벨 이상의 정예 중의 정예들.

하지만 이쪽은 클로이아를 제외하면 전부 리브라의 재학생들. 즉, 아직 애송이 틀을 벗지 못한 이들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전투원은 제가 데려온 이들로도 충분하니까요.”

“진짜야?”

류레이아는 이번에는 정말 놀랐는지 눈을 살짝 게슴츠레하게 떴다.

“다만 언제 어느 때든 가장 먼저 식사와 보급 장비 지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만 조치를 해 주십시오.”

“그거면 돼?”

“네. 그거면 됩니다.”

“네 직급은 일선 부대 소대장에서 시작할 거야. 직급으로 따지면 말단 간부에 불과하지.”

“다른 형님, 누님들도 다 그렇게 시작하셨을 거 아닙니까? 상관없습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다른 이들은 데려온 부하들의 힘으로 초고속으로 진급했을 테니 여전히 후발 주자인 네르하에게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뭐, 좋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감사합니다.”

* * *

그 후로는 별다른 일은 없었다.

이 자리는 군략 회의가 아니라 네르하를 환영하는 자리였으니까.

류레이아는 다른 부대에 배속시키기보단 자율성을 부여받은 특수작전 소대의 자리를 부여해 주었다.

‘고맙군.’

네르하는 그런 류레이아의 배려에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 특수작전 소대는 타 부대의 지시를 받지 않는 만큼 결원이 생겼을 때 인원 보충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긴 했다.

“하지만 역량이 된다면 그 어느 부대보다 공을 쓸어 담을 수 있죠.”

루시아가 네르하의 등 뒤로 다가오며 이렇게 말했다.

“참모진의 자리를 거부한 이유가 이것이군요.”

“눈치챘냐?”

“네. 참모는 안정적인 공을 쌓을 수는 있어도 제일공(第一功)을 세울 수는 없는 자리이니까요.”

“그렇지.”

네르하가 노리는 건 어디까지나 이 전쟁의 최고 수훈자.

지금까지 뒤처져 있던 후계 경쟁에서의 경쟁력을 확 좁히다 못해 넘어서는 것이었다.

네르하는 뒤따르는 루시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루시아.”

“말하세요.”

“앞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건 전투가 아니라 전쟁이다.”

“귀에 딱지가 나도록 들은 말이네요.”

“대부분의 상황에서 개인의 무력보단 집단의 전술이 더욱 빛을 발하는 장소이지.”

“어차피 최종 결착은 우두머리 간의 승부일 테지만 뭐 그렇다고 해두죠.”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야. 전술이란 결국 어딘가의 희생을 담보로 승리를 따내는 것이니까. 네 옆에 있던 누군가가 내일이 되면 눈 속에 파묻힌 시체가 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것 역시 네르하가 수차례 강조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리브라에서 내뱉는 말과 실제 전장에 도착해서 내뱉는 말은 그 무게에서 차원이 달랐다.

턱!

그때, 루시아는 자신의 도검형 아티팩트인 ‘그란디아’를 쥔 채로 네르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당신은 겁쟁이로군요.”

“뭐?”

“혼자 모든 걸 짊어질 생각 하지 말아요.”

루시아의 환한 미소가 시야에 잡혔다.

“난 당신의 부하가 아니니까.”

언젠가 오른팔이니 왼팔이니를 따지며 바스톤과 다투지 않았던가?

“그럼 뭐지?”

“동반자.”

스릉!

화아아악!

어느새 검집에서 칼날을 꺼낸 루시아가 가볍게 ‘오러’를 일으켰다.

“……!”

마나 소드를 넘어선 오러 블레이드.

그걸 저렇게 가볍게 뽑아냈다는 것에서 그녀의 실력이 얼마나 고절한 경지에 올랐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눈에 뜨인 건 오러만이 아니었다.

그 오러를 타고 찬란하고 몽환적인 빛을 내뿜는 ‘별빛의 마법’이 나선의 길을 그리며 존재감을 드리우고 있던 것이다!

“그건!”

“이건 검과 마법의 가능성을 합친 나만의 융합기.”

루시아는 그 검을 바깥쪽으로 쭉 뻗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름은 유성검(流星劍)이라고 해요.”

네르하의 블레이즈 피스트 정도의 위력이 아닌, 금철유성과도 견줄 수 있는 잠재력이 저 검 안에 존재하고 있다!

하필이면 네르하와 같은 ‘유성’이라는 이름을 지은 건 과연 우연일까?

‘굉장하군.’

융합기의 가르침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확실하게 자기류로 만들어 내는 재능.

이 녀석이 세기의 천재라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

“어때요?”

“감탄스러워.”

네르하의 진심이 담긴 칭찬에 루시아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썩 괜찮죠?”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그런 걸 만들고 있었구나.”

“당신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죠.”

유성검을 거둔 루시아는 네르하의 눈앞에 서서 당당하게 말했다.

“바스톤 씨도 자기만의 비슷한 필살기를 만들고 있어요. 아직 저처럼 완성형은 아니지만 뭔가 계기만 있다면 큰 진전을 보일 거예요.”

“그런가? 가끔씩 딴짓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턱!

“네르하.”

루시아는 웃던 표정을 싹 가라앉히며 네르하의 양 뺨을 감쌌다.

“당신은 남을 이끌어 본 경험은 많은 것 같지만 정작 군주의 업(業)을 지니고 남을 부려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군요.”

네르하는 정곡을 찔렸는지 이를 살짝 깨물었다.

루시아의 말은 더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험난한 패업의 길에 희생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어린아이들의 동화책 속에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이야기죠.”

말로는 죽을 수 있다,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네르하는 정작 행동에서는 마지막 한 걸음이 모자란 모순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마족 뮬란과의 결전이었고 말이다.

루시아는 네르하의 마음속에 깊숙하게 새겨진 상처를 정확하게 읽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결정한 것은 끝까지 밀고 나가세요.”

네르하는 루시아의 얼굴에서 아녜스를 겹쳐 보았다.

이전, 크루갈과의 전투에서 자신을 따르던 기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음에도 이를 악물고 적을 물어뜯던 그 모습.

그에 비해 자신은 어떠한가?

십여 년이 넘는 정마대전 속에서 신무조가 무적권신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주변의 희생이 있었나?

그때의 감각이 이젠 무뎌졌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루시아에겐 전혀 다르게 보인 모양이었다.

“적어도 이곳 북방에서는 제가 그 짐을 함께 짊어져 줄게요.”

“루시아, 나는…….”

“알아요. 당신 역시 나와 같이 누군가의 ‘업’을 짊어지고 있다는 걸.”

그 순간, 네르하는 전생 이후 가장 크게 놀랐다.

루시아가 자신의 내막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닐 테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직감은 네르하가 숨기고 있는 진실의 파편 하나를 꿰뚫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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