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서리 일족 (1)>
바스톤은 한결 편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네르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군, 뭔가 좋은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니, 그냥 마음이 좀 홀가분해졌을 뿐이다.”
“네?”
바스톤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고 있을 때, 디센트가 바스톤의 등을 툭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남녀가 따로 만나서 할 일이라곤 정해져 있지. 안 그런가?”
“안 그렇습니다, 선배님.”
뒤에 있던 루시아가 새빨개진 얼굴로 디센트를 타박했다.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클로이아는 어디 있지?”
“교수님이시라면 사령관실에서 나오자마자 서리 일족의 주거지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주군을 기다리고 있겠다더군요.”
“그래?”
애초에 그녀가 이곳으로 온 목적은 자신의 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감격스럽군요. 전설로만 듣던 삼마자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리브라의 생도들이라 해도 8레벨의 대마법사를 보는 건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디센트와 다른 이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확실히 굉장하긴 하더군.’
마나의 절대량으로 따지면 지금까지 만나봐 온 이들 중에선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마법사에 대해 단순히 기도만으로 전투력을 추측하는 건 어렵다곤 해도 시저나 머르딘, 루트비히 같은 이들에 뒤지지 않는 엄청난 강자임은 확실하게 느꼈다.
네르하와 일행들은 서리 일족이 머무르는 구역에 도달했다.
“어?”
“주군?”
마치 마을처럼 만들어진 서리 일족의 구역의 앞에서 네르하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눈앞에는 클로이아와 비슷한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이들이 북방 민족 특유의 복장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
네르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다른 수하들은 이 추운 날 식은땀까지 흘리는 네르하의 모습에 의아함을 표했다.
―들어오너라, 라데우스의 아이야.
그때, 저 안쪽에서 텔레파시가 들려왔다.
―류레이아와는 다르게 굳이 감추진 않았다지만 이런 거리에서 내 존재감을 알아채다니 클로이아가 너에게 모든 것을 건 이유가 있었구나.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나왔던 강자들과는 사뭇 다른 압도적인 존재감.
그건 기도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상대의 수준이 현재의 네르하조차 압도할 정도라는 뜻이기도 했다.
“가자.”
“네? 네에.”
수하들은 지나치게 긴장한 네르하의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뒤를 따랐다.
그렇게 네르하가 서리 일족의 구역에 완전히 발을 들인 순간…….
“여기예요!”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이쪽을 부르는 클로이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한 노파의 모습이 보였다.
네르하는 자신에게 압박감을 준 장본인이 저 노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 사람이군.’
백발이지만 하늘색의 흔적이 남아 있는 꾸부렁 머리카락.
인자한 미소로 의자에 앉아 있는 저 모습은 곱게 늙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대번에 알 수 있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노파가 네르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노인네의 장난에 조금 당황한 모양이로군.”
“조금 심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나로서도 시험을 해 볼 수밖에 없었네. 다음 족장으로 내정된 아이가 타인에게 일족의 명운을 맡긴 만큼 어쩔 수가 없었지. 자네가 이해를 좀 해 주게나.”
“시험이라뇨, 할머니?”
“그런 게 있단다.”
저 괴물 노파는 아무래도 이쪽이 느낄 수 있게만 자신의 기도를 조절한 듯했다.
마도사인 클로이아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보면 말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네르하 라데우스라고 합니다.”
“엘로이아 블루벨벳이라 하네.”
이름을 보면 클로이아의 혈연인 듯했다.
“그리고 현재 서리 일족의 족장이기도 하지.”
확실히 저 정도의 존재감을 지니고 족장이 아니라고 하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클로이아에게서 들었네. 자네가 가주가 된다면 우리 일족을 라데우스의 주박에서 풀어 주겠다고 말이야.”
“그렇게 약속하긴 했습니다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뭐가 말인가?”
“당신만 한 존재가 버티고 있었는데도 어떻게 서리 일족이 라데우스에게 굴복했는지.”
“끌끌끌, 칭찬 고맙군.”
아무리 세력이 약하다고 해도 절대자는 그 존재만으로도 거대한 전쟁 억지력이 된다.
게다가 십여 년 전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기력이 펄펄했을 테니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엘로이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만큼 자네의 부친이 규격 외의 괴물이라는 뜻이지.”
카이젤 아우구스트 라데우스.
눈앞의 노파는 자신 같은 강자조차 카이젤에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또 달리 말한다면 자네가 우리를 해방시키려면 최소한 부친의 경지에는 도달해야 한다는 거고. 하여튼 서리 일족의 마을에 온 걸 환영하네. 비록 진짜 마을은 마족의 손에 불타 버렸지만 말이야.”
네르하는 길게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엘로이아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부탁이 있습니다.”
“일족의 힘을 빌려달라는 것이겠지?”
“네. 비슷합니다.”
라데우스 본가 마법사들을 붙여 주겠다는 류레이아의 호의를 저버리고 굳이 서리 일족에게 손을 내민 건 이유가 있었다.
“서리 일족만이 알고 있는 북방의 샛길을 알고 싶습니다.”
할머니를 보조하고 있던 클로이아의 눈이 살짝 떠졌다.
엘로이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감하군. 그리고 오만하기도 하고.”
“들어주시는 겁니까?”
일족의 전력을 빌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길잡이를 붙여 달라는 것 정도의 부탁이다.
클로이아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만큼 족장인 엘로이아가 네르하의 제안을 거절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데.
“그 대답을 들려주기 전에 한 사람과 합의를 해야 할 듯하구나.”
“합의라고 하시면?”
네르하는 그 합의의 대상이 엘로이아 본인인지, 아니면 서리 일족의 다른 누구인지를 생각했지만.
그 합의의 대상은 네르하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었다.
“저길 보거라.”
“……!”
네르하와 클로이아는 물론이고, 엘로이아를 제외한 장내의 모든 인물이 눈을 부릅떴다.
엘로이아가 앉은 자리의 뒤쪽에 있던 저택에서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이었다.
그 청년의 머리카락 색은 은갈색이었다.
“간만이구나, 동생아.”
“아르바 형님.”
약간 초췌해진 듯한 청년이 네르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르바 세타 라데우스.
어째서인지 그는 지금, 서리 일족의 영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 * *
“일단 불을 쬐면서 이야기를 하자꾸나.”
완전히 몰락한 줄 알았던 아르바가 서리 일족과 함께하고 있다는 건 의외의 사실이었다.
네르하는 클로이아를 제외한 다른 이들을 모두 물렸다.
남은 일행들이 자리를 잡자 일단 네르하는 아르바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에 대해선 유감입니다.”
“내 팔자고 실력이지. 초반 진화에 실패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뿐이다.”
“그래도 아직 모든 걸 포기하진 않은 것 같으시군요.”
“맞다. 그나마 너에게서 건네받은 자료가 나름 도움이 되었다는 게 다행이었지.”
네르하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그 말씀은?”
“수백에 달하는 본가의 전력을 증발시키고도 내가 이런 모습으로나마 기회를 받은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아르바는 조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왕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입혔다는 뜻입니까?”
“그래. 내가 너에게서 받은 자료를 통해 나는 마왕을 역소환의 함정으로 끌어들였다.”
원래라면 그 마왕은 역소환을 통해 마계로 추방당했어야 정상이었다.
그렇게 되면 북방에 떼거리로 나타난 다른 마족들 역시 힘을 잃고 순식간에 와해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 함정에 걸린 그 마왕은 역소환이 아니라 힘의 일부가 봉인되는 예상 밖의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지.”
“그 말씀은?”
“놈의 힘이 이미 역소환시킬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는 소리다.”
아르바는 당시의 상황을 상기하는 듯, 잠시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문제는 마왕만이 아니었다. 이미 소환된 고위 마계 귀족들의 힘 역시 무시할 게 못 되었어.”
대체 언제부터 소환되었고, 얼마만큼의 준비를 했던 것일까?
그때 마주했던 전력을 고려하면 적어도 1, 2년 정도라 생각하는 건 큰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엘로이아 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북방 전력은 거기서 전멸했을 거다.”
서리 일족 족장인 엘로이아의 추정 마법 경지는 8레벨.
그런 대마법사가 참전했는데도 승리는커녕 전멸을 면하게 하는 수준에 불과했다는 점이 놀랍다.
“대패는 했어도 그나마 마왕의 힘을 봉인한 탓에 약간의 참작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단 한 명의 가신도 없이 홀몸으로 구르는 백의종군인 것이었다.
네르하는 아르바의 사정을 모두 듣고 상황을 정리했다.
“형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놈들은 오래전부터 북방에서 힘을 축적하고 있었고 가주님의 북방 원정 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거군요.”
“그렇지.”
카이젤이 황실의 요구로 직접 북방에 원정을 나가 마물들을 한차례 쓸어버린 건 유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후 북방에 대한 이목을 돌리기 위한 마족들의 ‘쇼’에 불과했다면?
이후 카이젤이 ‘회합 회의’로 인해 자리를 비우자 본색을 드러내며 북방의 전력을 쓸어버린 거라면?
‘만약 가주의 부재 역시 마족들이 의도한 바라면?’
수백 년간 역사의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마족들이 이런 수작을 부렸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가정이 맞는다면 이번 원정은 그야말로 죽음의 원정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마 본가에서 충분한 전력이 파견되었으니 전략만 잘 짠다면 승리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다. 가주님이 안 계신다 해도 이쪽에는 대마법사가 두 명이나 있으니까.”
앞으로의 미래 예측이 어떻든 그건 네르하에겐 그다지 감흥이 없는 문제였다.
“그게 제게 할 말씀은 아닐 텐데요?”
“큭큭! 맞다.”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 주시죠.”
아르바와 마주한 건 신세 한탄을 듣는 게 아니라 엘로이아가 말했던 ‘합의’를 도출하기 위함이었다.
아르바가 진지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네르하, 네게 동맹을 제안하지.”
“동맹이라고 하신다면?”
“나는 서리 일족의 전력을 움직이고자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너의 협조가 필요하다.”
네르하는 살짝 눈을 돌려 엘로이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별다른 반응 없이 푸근한 눈빛 그대로 불을 쬐고 있을 뿐이었다.
‘합의라는 게 이런 의미였나?’
아르바가 현재 상황을 어떻게든 타파하려면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영락한 지금, 본가의 전력을 얻을 수는 없으니 결국 남은 선택지는 서리 일족뿐이었다.
“서리 일족의 힘은 네 생각 이상이다. 굳이 족장의 존재를 제외하더라도 이 북방에서 이들의 힘은 라데우스 토벌대 내부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일 거다.”
“그들을 발판으로 공을 세우시겠다는 뜻이군요.”
그 말에 네르하의 옆에 있던 클로이아의 눈에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발판이 아니다. 마왕을 직접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나누는 것뿐이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르바의 담담한 말에 네르하와 클로이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두 사람의 경악을 직시한 아르바는 입술을 살짝 뒤틀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왕의 영역까지 직접 닿을 수 있는 직통 루트를 알고 있다. 주변의 방해만 어떻게 뚫을 수 있다면 마왕을 처리하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