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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17화 (117/237)

117화

<서리 일족 (2)>

아르바의 말은 상당한 파급력을 일으켰다.

“직통 루트라고요?”

“그래. 원래 북방을 장악한 마족의 영역은 마왕이 펼친 마계영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마계 귀족들이 자신만의 영역을 펼쳐 보호하고 있는 형국이지.”

그들이 한곳에 힘을 모으지 않고 영역을 펼쳐 넓게 퍼진 건 다른 게 아니었다.

어차피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유리해지는 건 마족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영역이 전부 평원에만 펼쳐진 것은 아니다.”

“그렇죠.”

북방은 어디까지나 곳곳에 거대한 산맥과 협곡이 즐비한 천연의 험지다.

그런 만큼 곳곳에 토착민조차 모르는 비밀 통로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긴 했다.

아르바는 타오르는 불빛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가주님으로부터 북방의 뒷정리를 지시받은 만큼 지리에 대한 조사는 철저하게 했지. 그건 마왕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으득!”

어째서인지 옆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클로이아가 곱지 않은 눈으로 아르바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르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이해했다.

지금, 아르바는 공을 독식해 실패를 만회할 생각으로 일부러 상층부에 이 정보를 숨기고 있었단 소리니까.

‘그 때문에 전쟁이 길어지고 근심이 커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네르하는 굳이 아르바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 역시 그런 상황이었다면 아르바와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그래도.

“망할 자식.”

짝!

클로이아가 아르바의 귀싸대기를 돌려세우는 것까진 막을 생각이 없었다.

아르바는 돌아간 뺨을 매만지며 비릿하게 웃었다.

“여전히 매섭군. 네게 이렇게 맞아보는 건 10년 만인가?”

“뺨으로 끝나서 다행인 줄 알아. 생각 같아선 주먹을 날리고 싶었으니까.”

클로이아가 이렇게 남을 막 대하는 건 처음 본다.

“무슨 염치로 이곳에 있는 거지?”

“당연히 다시 기회를 잡기 위해서지.”

마치 이게 당연하다는 태도.

담담하고 메마른 아르바의 어조는 클로이아의 분노를 더더욱 부채질했다.

“네놈의 잘못된 판단으로 수십 명이나 되는 일족이 희생되었어. 그런데도 염치없이 이곳으로 기어 들어와?”

클로이아가 손가락을 들어 출구를 가리켰다.

“당장 꺼져. 더 이상 우리와 얽힐 생각 하지 말고.”

“조금 서운하군.”

“뭐라고?”

아르바는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클로이아를 직시했다.

“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너를 생각해서 서리 일족에게도 상당한 배려를 했지.”

“배, 배려……라고?”

“장담하지. 만약 그때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이가 루드빅 형님이나 마하 누님이었다면.”

가문의 직계 중에서도 특히나 냉철하고 합리적이라고 평가받는 두 사람이라면?

“내가 잃어버린 본가의 전력 대신 서리 일족이 전멸했을 거다.”

“……!”

“정 믿지 못하겠다면 여기 계신 일족의 족장이자 네 조모님께 직접 여쭤보시든가?”

클로이아의 시선이 할머니에게로 향했다.

서리 일족의 족장인 엘로이아는 해명을 요구하는 손녀의 시선에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무, 무슨?!”

“정말로 아르바 녀석이 우리 일족에게 큰 해를 입혔다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 버렸을 테니까.”

“어, 그, 그!”

클로이아의 표정이 홍당무처럼 붉어지던 찰나.

“그렇다고 사과할 필요는 없단다.”

세월이 흘러 주름으로 뒤덮인 노파의 얼굴은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기색으로 아르바를 직시했다.

아르바 역시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과실을 따질 생각이 없다는 걸 피력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으니 이야기를 계속하지.”

아르바의 시선이 다시 네르하에게 향했다.

“네르하, 동맹을 맺을 의향이 있느냐?”

* * *

생각지도 못한 아르바의 동맹 제의에 네르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너와 나의 공훈은 반반으로 나누자.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번 실패를 상당 부분 만회할 수 있고, 너는 너대로 바멜 정도는 추월할 수 있는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것이다.”

마왕 살해자라는 명성은 그만큼 드높은 것이었다.

물론 절반의 공훈이라도 마왕을 죽일 수 있다면 아르바의 말대로 될 것이다.

하지만 네르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옳지 않은 거래인 듯합니다만.”

“뭐?”

“일단 형님께선 바로 마왕을 잡을 수 있다는 어조로 말씀을 하셨지만 일이 그렇게 쉽고 빠르게 풀릴 일은 없겠죠.”

네르하의 지적에 아르바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네 말이 맞다. 확실하게 도달하려면 그 사이에 존재하는 백작급 마족 하나를 잡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면 그렇지.

“굳이 저나 클로이아가 없어도 서리 일족이 협력한다면 가능성이 있다는 뜻. 그걸 위해 이곳에 자리를 잡으셨다지만 여기 계신 족장님께선 형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셨겠지요.”

“…….”

그걸 받아들였다면 굳이 족장이 ‘협의’란 말을 꺼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그 말을 꺼내신 건 서리 일족의 협력이 저의 의사에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하고요.”

정확히 말하면 클로이아겠지만 그녀가 나를 따르고 있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비율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거죠.”

네르하가 손가락 하나를 폈다.

“9 대 1”

“무슨 헛소리를? 6 대 4.”

“8.5 대 1.5.”

소수점 단위로 비율을 줄이자 아르바의 이마에 한 줄기 혈관 자국이 생겨났다.

“내가 가진 정보의 가치가 고작 마왕에게 도달할 샛길만이 있는 건 아니다. 아직 그 엘프에게 주지 않은 많은 마족들의 정보가 내 손에 있지.”

독하다 독해.

네르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네르하와 아르바의 합작은 2가 아닌 3 이상의 결과를 낼 수 있을 터였다.

“7 대 3. 더 이상은 저도 양보 못 합니다.”

“……좋다.”

마치 선심 쓰듯 내뱉는 네르하의 발언에 아르바는 이를 갈며 수락했다.

“다른 부대의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얻어낸 건 아주 잘했다. 자세한 정보 공유나 앞으로의 일은 차후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지.”

아르바는 머리에 살짝 열이 받은 듯, 그 말을 끝으로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렇게 아르바가 나간 뒤 클로이아가 원망을 담은 눈으로 네르하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방금 건 선을 넘었어요. 제 동의도 없이 일족을 전쟁의 굴레로 밀어 넣다뇨?”

“글쎄, 라데우스와 얽혀 있는 이상 서리 일족이 이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없어.”

“하지만!”

“그걸 알기에 족장님 역시 그 방향성을 내게 일임한 거고.”

그 말까지 있고 나서야 클로이아는 침묵했다.

먼저 족장과 만나 대화를 나눈 만큼 그녀 역시 어느 정도 사정을 들었을 것이다.

족장 엘로이아가 네르하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텐가?”

“아르바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충분히 유용하다면 서리 일족도 충분한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차후 일이 편해지겠죠.”

“자네가 가주가 되었을 때 서리 일족을 해방시킬 수 있는 명분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아무리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가주라도 북방과 서리 일족이라는 거대한 전력을 아무런 명분 없이 해방시키긴 힘들었다.

어느 정도 이들에게도 공이 있어야 쉽게 일을 진행시킬 수 있을 거다.

“그래. 우리도 그걸 알기에 단순한 길잡이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 결심했지.”

엘로이아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르바는 안 돼. 그놈은 너무 속이 검어. 놈이 이 아이를 원하는 건 이 아이를 보는 게 아니라 ‘차기 족장’이란 명함을 보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군요.”

아르바가 리브라 시절부터 클로이아에게 제법 집착했었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그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게다가 믿을 수도 없지. 놈은 마치 우리를 배려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놈이 우리 일족을 특공대로 사용하기 위해 따로 전력을 빼둔 탓이네.”

“……!”

“우리의 피해가 적은 건 어디까지나 마계 귀족들의 힘이 예상 이상이어서 우리가 투입되기 전에 라데우스의 전력이 너무 허무하게 밀려버린 탓일세.”

그나마 엘로이아가 뒤늦게 개입한 덕에 완전 전멸은 피할 수 있었지만 수백에 달하는 마법사 전력이 증발한 건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엘로이아가 천천히 허리를 펴고 일어나 네르하의 앞에 섰다.

‘여전히 어마어마한 존재감이로군.’

못해도 70은 넘는 것 같은 노인의 눈빛이 이쪽으로 향했다.

“그래. 클로이아의 주군인 자네는 우리 일족의 구원자가 될 마음이 있는가?”

“약속했으니까요. 목숨을 버렸으면 버렸지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습니다.”

“흠, 자네와 클로이아가 한 약속보다 훨씬 좋은 방법이 있는데, 한번 들어볼 생각이 있는가?”

“……? 그게 무엇입니까?”

그때, 네르하는 한순간 엘로이아의 눈빛에서 ‘장난기’라는 감정을 읽었다.

그녀가 천천히 네르하의 손을 움켜잡았다.

“내 손녀와 혼인을 하는 건 어떠한가?”

“네?”

“하, 할머니?!”

네르하와 클로이아가 눈을 부릅뜨며 경악하고 있을 때, 엘로이아의 말은 계속되었다.

“솔직히 나이 차이가 좀 나는 건 인정하네. 하지만 내 손녀이기에 잘 알지. 미색도 저 정도면 출중한 데다 최소 앞으로 30년 정도는 저 외모를 고스란히 유지할 거야. 사내라면 누구나 품고 싶어 하는 그런…….”

“그게 지금 무슨 소리세요, 할머닛!!”

“성깔이 좀 있는 게 흠이다만 어릴 적부터 직접 철저히 가르친 만큼 마법 실력도 쓸 만하지. 자네 정도의 인재라면…….”

“으악! 아아악! 아아아아악!”

엘로이아의 말은 중간에 난입한 손녀의 발악에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클로이아의 표정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아, 아무리 할머니라도 못 하시는 말이 없어요?!”

“뭘 못 하는 말이 없느냐? 내가 네 보호자고 이 일족의 족장일진대.”

“그, 그래도!”

“내가 라데우스의 직계들을 모두 만나본 건 아니다만 적어도 북방에 와 있는 놈들 중에선 이 녀석에게 비빌 놈은 없다.”

엘로이아는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네르하를 살폈다.

“시저, 그 영감이 진정한 후계자를 찾았다기에 어느 정도일지 기대하긴 했는데 생각 이상이야. 솔직히 탐이 나는군.”

“음, 그게…….”

네르하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골랐다.

여기서 말 한번 잘못했다간 관계가 어떻게 틀어질지도 모르고, 특히 클로이아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그 말씀은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습니다.”

“그런가?”

엘로이아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적어도 나는 적극적으로 밀어줄 생각이 있으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말하게.”

네르하는 그녀의 장난에 조금 어울려 줄 생각으로 씨익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네. 새겨듣겠습니다.”

“새겨듣긴 뭘 새겨들어요!”

결국 참다못한 클로이아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 * *

한차례 헤프닝이 지나가고.

엘로시아가 네르하에게서 뭔가 기색을 읽었는지 먼저 말을 건네왔다.

“내게 물어볼 게 있는 모양이군.”

“음, 죄송합니다.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아직 마법사 간에 결례의 선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지 못하여서.”

“내 손녀사위가 될 수 있을 텐데 뭐든 부담 갖지 말고 물어보게나.”

“할, 머, 니!”

뿔을 내는 클로이아를 뒤로하고 네르하는 살짝 헛기침을 했다.

“그럼 사양 않고.”

“말해 보게나.”

네르하는 얼마 전 마족 뮬란과의 전투를 상기하며 마음에 품고 있던 의문을 털어놓았다.

“영역(靈域)에 대해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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