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첫 작전 (1)>
검성(劍聖).
케프렌 가문이 귀왕제성신(鬼王帝聖神)의 다섯 단계로 구분한 검술의 경지.
검성은 그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지고한 경지로, 단순히 한 시대가 아닌 역사에 이름이 남을 만한 존재를 일컫는 말이었다.
“감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군요.”
“그렇게 반응하겠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딱히 문제 될 것이 있습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만큼 신용할 수 없는 건 또 없지.”
뚜둑! 뚜둑!
네르하는 어느새 자신의 손발이 차갑게 얼어붙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건…….’
엘로이아는 단순히 마법으로 네르하의 손발을 얼린 것이 아니었다.
극소 단위로 영역을 발휘하여 ‘현상’으로서의 빙결을 구현화한 것이었다.
“대단하군요.”
“질문에 대답하게.”
시간이 갈수록 빙결이 잠식하는 부분이 커지기 시작했다.
납득할 만한 답을 주지 않는다면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우회적인 협박.
이건 단순히 화 속성의 마나나 일반적인 열을 통해 몰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최소 그녀와 ‘동급’의 위치에서 ‘빙결의 의지’를 몰아낼 수 있을 정도의 영역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네르하에게 남은 결말은 죽음뿐이었다.
“제 대답은 같습니다.”
네르하는 천천히 마나를 끌어올렸다.
사실, 무인에게 의념의 단계는 절대적인 경지에 오르지 않는 이상 파괴력에 있어선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법사와 비슷한 자신만의 영역을 구현하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공권’에 대한 개념일 뿐 마법사들처럼 전능의 영역이라 부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의념의 활용보다는 네르하는 마법과의 융합을 통해 절대적인 파괴력을 손에 넣고자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인의 의념이 마법사의 의념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활용도의 문제일 뿐 기본적으로 무인의 의념은 마법사의 의념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강력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파파팟!
“허!”
자신의 영역이 아주 간단하게 밀려 나가자 엘로이아는 살짝 입을 벌리며 놀라움을 표현했다.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손대중을 한 것도 아니었다.
가볍게 엘로이아의 의념을 떨쳐 낸 네르하가 양손을 털며 말했다.
“당신에게 중요한 건 하나잖습니까? 내가 당신들을 배신하지 않는 것,”
“그렇긴 하지.”
“난 나의 명예를 걸고 가주 자리에 올라 당신들을 풀어줄 겁니다.”
네르하는 여기서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저를 믿지 못하겠다면 클로이아, 그리고 당신들과의 약속은 여기서 끝나겠죠.”
“만약 내가 너의 진짜 모습을 가주에게 알린다면 어떻게 할 테냐?”
“딱히 정체랄 것도 없지만 그러면 서리 일족은 자유를 찾을 기회를 영영 잃게 되는 거죠.”
어차피 다른 이들에게 마법에 대해 조언을 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진면목이 탄로 날 것이라는 각오는 했다.
다만 서리 일족의 족장 정도라면 어느 정도 ‘거래’가 가능하다고 계산했을 뿐.
네르하의 엄포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엘로이아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갑자기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끌끌끌, 정말 재밌는 녀석이로고.”
“확신이 생기셨다면 더 이상 간 보는 건 그만해 주시죠.”
“그러도록 하지.”
그녀에게 있어 네르하의 존재는 확실히 불가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이레귤러일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가 아닌 ‘족장’으로서의 그녀는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네르하의 근원을 캘 이유가 없었다.
무슨 마족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오히려 네르하의 특출 남은 그녀와 서리 일족에겐 훨씬 유리하게 돌아갈 테니까.
더 이상의 시험은 없는 건지 엘로이아는 네르하가 막힌 부분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자네가 영역의 구축에 실패한 이유는 간단하네. 가장 먼저 각성한 고유 계통에 대한 충분한 개발이 없었기 때문이지.”
네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이아에게서 마법의 경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듣던 당시, 네르하 역시 비슷한 결론을 내렸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사의 영역에서 의념을 다루는 게 너무 익숙한 탓에 마법사가 다루는 영역의 감각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것일세.”
“……!”
“지금도 보이는군. 자신의 의념을 밖으로 퍼트릴 생각을 하지 않고 몸 주변으로 두르려고 하는 것이.”
엘로이아의 지적은 정확했다.
의념을 아주 얇게 펼쳐 몸 주변에 두르는 방식은 능숙한 화경에 이른 무인들에게만 허락된 지고의 경지였다.
이런 식으로 얇고 좁게 펼친다면 어떤 공격에도 대응할 수 있는 궁극의 후발선제를 완성할 수 있게 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마법사의 방식과는 완전히 상반된 방법이지.’
“뭔가 방법이 있겠습니까?”
“다른 놈이라면 애먼 곳에 한눈팔지 말고 자신의 계통이나 먼저 개발하라고 구박을 하겠지만…….”
엘로이아는 네르하라면 어느 정도의 단계는 건너뛰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의념과 계통을 융합하는 나만의 노하우를 가르쳐 주도록 하지. 당장 100% 활용은 무리더라도 응용에는 도움이 꽤 될 거야.”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원래라면 클로이아가 자격을 갖추면 알려 주려고 했던 건데 이걸 처음 가르치는 게 일족이 아닌 외부인이 될 줄은 몰랐군.”
엘로이아의 눈빛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정말로 결혼할 생각은 없나?”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꽤나 진심을 내비치는 권유였다.
“아직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네르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 * *
네르하와 일행들은 서리 일족의 거주지에서 하루를 보냈다.
서리 일족은 네르하 일행이 클로이아의 인솔하에 있다는 말을 듣자 무척이나 환영해 주었다.
“자, 자, 한 잔 들게! 클로이아의 제자들이라니!”
현재 바깥에 있는 라데우스의 군대에겐 상당히 쌀쌀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비하면 대조적인 반응이었다.
“크으으! 그 꼬꼬마가 제자라니!”
“그때, 마을을 나설 때만 해도 죽을상이었는데 그래도 다시 보니 표정은 나쁘지 않았지.”
살얼음이 잔뜩 섞인 설원 맥주는 추운 북방의 날씨임에도 꼴깍꼴깍 잘도 넘어갔다.
‘괜찮은데?’
게다가 보드카나 위스키 종류라는 술은 중원의 도수 높은 명주들과 비교해도 그 독함이 꿀리지 않았다.
“어허! 도련님은 아직 이걸 마실 나이가 아니야!”
문제는 얼마 먹지도 못하고 어린애 취급을 받으며 빼앗겼다는 데 있었지만 말이다.
‘제길, 무림맹에 아는 놈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박장대소를 했겠군.’
네르하의 나이는 제국법을 기준으로 충분히 성인이었지만 아직 얼굴에는 앳된 티가 많이 남아 있었다.
저들이 술을 빼앗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닌데.
그러면서도 맥주는 보리 음료랍시고 권하는데 대체 기준이 뭔지를 모르겠다.
“자, 자, 우리 클로이아가 학교에서 어떤 선생이었는지 얘기를 좀 해 주겠나?”
“음, 그게…….”
푸른 머리카락 때문에 하나같이 이국적인 모습을 한 서리 일족이었지만 막상 직접 경험한 그들의 모습은 순박한 시골 사람들과 별다를 게 없었다.
물론 일행 중에서 클로이아를 제대로 겪어 본 이는 네르하 하나뿐이라 대부분의 이야기는 네르하의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다행이군. 다행이야.”
약간의 각색(?)을 거친 네르하의 경험담에 서리 일족은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클로이아는 이곳 서리 일족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는지 많은 이들이 그녀의 일을 궁금해하고, 또 걱정해 주고 있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군.’
네르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잔에 입술을 대었다.
족장인 엘로이아에게 잡혀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야말로 얼굴이 홍시가 되어 꼼짝도 못 했을 것이다.
그때, 네르하의 근처에 묵직한 존재감이 나타났다.
“네르하 라데우스라고 했나?”
“그렇습니다만.”
대답을 하면서도 네르하는 상대의 출중한 기도에 상당히 놀랐다.
‘강하다. 족장까진 아니지만 그에 거의 근접할 정도로군.’
네르하에게 접근한 이는 상체를 일부 드러낸 중년의 남성이었다.
전신의 근육이 꽉 조여져 있는 데다 수많은 고난을 거쳐왔는지 상체 대부분이 거의 흉터로 뒤덮여 있을 정도로 인상적인 몸이었다.
“반갑군. 서리 일족의 전사장 바실리라고 한다.”
“네르하입니다.”
네르하는 바실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에게 상당한 흥미가 일었다.
대부분이 이능력자인 서리 일족 중에서 몇 안 되는 무인인 데다 그 수준이 능히 검왕 베하나스와 비교해도 전혀 꿀릴 게 없는 강자였다.
‘아니, 실전 경험을 고려하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군.’
게다가 그에게선 단순한 강함 이전에 익숙한 향취가 느껴진다.
‘남방투왕이 딱 이런 느낌이었는데.’
십대 고수 중 하나이자 천마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던 남만 밀림의 절대자. 지금 바실리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그와 상당히 흡사했다.
바실리는 네르하의 손에 들린 잔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술잔을 빼앗겼다고 들었는데 불만이 많은가 보군.”
“좀 그렇네요.”
“이해하게. 북방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건 전사라고 인정받은 자들뿐이거든.”
즉, 서리 일족은 비록 친근하게 대했을지언정 아직 네르하와 일행들을 전사로는 취급해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네르하는 황당하다는 듯 들고 있던 맥주잔을 들었다.
“이건 술이 아닙니까?”
“그건 음료수잖나.”
정말로 일정 도수 이하는 술로 취급도 해 주지 않는 게 북방의 풍습인가?
그는 허리춤에 있던 수통의 뚜껑을 따서 그 내용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사이로 독한 브랜디의 향이 네르하의 코끝을 자극했다.
“클로이아에게선 대강 들었네. 이번에 가문 내 후계 경쟁을 위해 북방에 왔다고?”
“클로이아와 친하신 모양이군요.”
“내 조카니까.”
네르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순간 멈칫거렸다.
“그 아이는 돌아가신 내 형님의 딸일세.”
바실리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리고 형님께선 십수 년 전 라데우스와의 항전에서 돌아가셨지.”
“…….”
그 말에 더더욱 반응할 거리를 잃은 네르하였다.
바실리는 굳어버린 네르하를 향해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어나갔다.
“선대 전사장이신 형님이 돌아가시고 그 혈육인 클로이아가 인질로 잡혀갔을 때 서리 일족은 두 갈래로 나뉘어 버렸네.”
그 두 갈래는 분명 결사 항전과, 라데우스에게 복속되는 걸 인정하자는 의견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쪽이었네. 수백 년간 우리 일족은 북방의 마물들이 남쪽으로 몰려가는 걸 막아서 왔는데 거기서 북방의 천연자원을 얻기 위해 뒤통수를 때린 라데우스의 행위를 용납할 수가 없었지.”
“결국 그 의견은 기각된 모양이로군요.”
담담하게 대답한 그 한마디에 바실리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맞아. 족장의 결정을 당시 일개 전사였던 내가 뒤집을 수는 없었지.”
“그렇다면 전사장이 되신 지금은 뒤집으실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실제로 그럴 계획을 세웠었네. 아직도 서리 일족 중엔 마족보다도 라데우스를 더 증오하는 이가 많으니까.”
족장이 그 계획을 허락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녀를 제외하고도 서리 일족의 전력은 절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일족 전체가 마법사이자 이능을 타고난 특별한 전투 종족.
만약 서리 일족이 마족과 연계하는 일이 생긴다면 라데우스 원정대는 그야말로 치명타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현 원정대의 규모가 절대 적지 않은 만큼 이들을 모두 잃는다면 라데우스란 가문은 근본부터 뒤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오싹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