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첫 작전 (2)>
등골에 한기가 이는 착각이 일면서도 네르하는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지금 제게 이 말씀을 하시는 건 그 계획이 파기 혹은 실패했다고 봐도 좋겠습니까?”
“일단은 보류라고 해두지.”
상당히 묘한 어조의 말이었다.
“그 보류의 원인은 저입니까?”
“그러하네.”
“이유는요?”
“그 아이가 너에게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지.”
바실리가 네르하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결국 하나뿐이었다.
이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그 기대를 충족시키냐 실망시키냐는 시험.
‘갑자기 판이 커지는군.’
그리고 그 판에서 돌아가는 판돈과 리스크 역시 꽤나 극단적이었고 말이다.
‘이런 걸 보고 제로섬게임이라고 했던가?’
가벼운 마음으로 서리 일족의 거주지로 왔던 네르하로선 원치 않게 무거운 짐을 짊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어깨가 무거운 건 네르하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재미있군요.”
타오르는 장작을 바라보는 네르하의 입가가 씨익 호선을 그었다.
“재미있다? 자네에겐 일족의 운명을 건 우리의 도박이 재미있는 모양이지?”
“요는 그거지 않습니까?”
네르하와 바실리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내가 당신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것.”
“……!”
“그러면 당신들은 굳이 라데우스와 척을 진다는 리스크를 짊어지지 않아도 되고, 저는 그저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만으로도 서리 일족의 호의를 살 수 있고 말이죠.”
“꽤나 자신만만하군.”
“그럴 만한 자신감과 실력이 있으니까요.”
화악!
바실리의 투기가 네르하를 향해 짓이기듯 들어왔다.
어지간한 마법사나 기사들은 대항조차 못 하고 오줌을 지릴 강대한 투기.
하지만 네르하는 그런 바실리의 투기를 가볍게 밀어내었다.
이리 쉽게 투기가 밀려날 줄은 몰랐는지 바실리의 표정에 작게 감탄이 일어났다.
“멋지군. 족장님께서 극찬하신 이유가 있었어.”
“이 정도는 기본이죠.”
“마법사보단 기사의 길을 걸었다면 시대를 초월하는 괴물이 되었을 거라던데.”
“딱히 그렇진 않습니다. 전 마법에서도 충분한 가능성을 보았으니까요.”
“그런가?”
바실리는 조용히 자신의 수통을 네르하에게 건네주었다.
네르하는 아직 절반 이상의 내용물이 남아 있는 수통의 뚜껑을 열었다.
벌컥벌컥!
“크으, 화끈하군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바실리는 팔을 뻗어 네르하의 눈앞에 주먹을 내밀었다.
“서리 일족은 자네와 클로이아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 줄 것이네.”
이건 그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일까?
툭!
네르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주먹을 마주쳤다.
* * *
그렇게 날이 밝았다.
클로이아는 반송장이 되어 있는 네르하를 향해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으세요?”
“……너무 신나서 조금 과음을 해 버렸군.”
네르하는 관자놀이를 빙빙 문지르면서 지끈거리는 이마를 달랬다.
사실상 전생 이후 처음 벌이는 술판이었다.
나름 무림맹에서도 한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주당이었던 만큼 뒤를 보지 않고 마셔댄 게 이 참사의 원인이었다.
“아직 술이 익숙하지 않은 꼬맹이 주제에 그렇게 마셔대니까 탈이 나는 거라구요.”
“내가 너보다 훨씬……. 아니, 말을 말자.”
내가 너보다 나이를 먹어도 수십 년은 더 먹었다는 말은 미친놈 취급받기 딱 좋으니 잠시 접어두고.
“후우우.”
네르하는 운기조식으로 가볍게 주독을 빼냈다.
대번에 막사 안에 시큼한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자 클로이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열어 환기를 시도했다.
“전사장님과의 만남은 어땠나요?”
“화끈하신 분이더군.”
네르하는 어젯밤 일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특히 브랜디 같은 독한 술을 수십 병이나 들이켜고도 멀쩡한 건 그야말로 괴물의 영역이었다.
아무리 무적권신 시절이라도 그 정도 양을 퍼부었다면 절대 맨정신으로 있을 순 없었을 텐데 말이다.
“도련님이 마음에 드신 모양이더라구요.”
“내가 좀 잘나긴 했지.”
“표정이 좀 안 좋으신데요? 어젯밤에 뭔 일이 있으셨나요?”
“딱히, 그냥 숙취가 덜 풀려서 그래.”
네르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돌려 클로이아의 시선을 외면했다.
자연스레 어젯밤 바실리와의 대담이 네르하의 뇌리에 떠올랐다.
“아르바 라데우스를 조심하게.”
“아르바 형님을 말입니까?”
“애초에 라데우스의 뒤를 친다는 계획은 아르바 라데우스의 협조 의사가 있었기에 실행이 가능한 일이었네.”
“허?”
“그런 독심을 지닌 만큼 언제 어느 순간 자네를 벼랑 밑으로 내몰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네르하는 바실리에게서 들은 아르바의 흉계에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권력이 뭐라고.”
자신이 공을 세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경쟁자를 실패의 구렁텅이로 내몰아 버리는 것.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아르바는 상대적으로 지위의 회복이 가능하게 된다.
‘진짜 여러 가지를 노리고 서리 일족에게 빌붙고 계셨군. 존경스러울 정도야.’
아르바와 손을 잡게 된 건 어찌 보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 집념과 집요함이 이쪽으로 향하게 되면 얼마나 골치가 아프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다.
네르하는 아르바를 머릿속에서 털어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클로이아. 오늘은 군략 회의가 있다는 모양이니.”
“네. 모두 기다리고 있어요.”
* * *
네르하는 라데우스의 직계 권한으로 군략 회의에 참석했다.
물론 현재 전선에서 네르하가 부여받은 직급으론 군략 회의에 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학연, 지연, 혈연 중 최고는 혈연이라고 그 깡패 같은 혈연의 수혜를 받아 네르하는 군략 회의에 참석할 수가 있었다.
웅성웅성!
확실히 수만 단위 군대의 군략 회의는 최소 수십에 이르는 간부들이 참석하는 게 정석이었다.
‘많기도 하군.’
저 구석을 보니 바실리와 클로이아 역시 각각 서리 일족의 전사장과 족장 대리라는 이름표를 내걸고 참석한 것이 보였다.
“다들, 모였나?”
쟁쟁한 인물들이 내뿜는 기세와 열기로 막사 안이 화끈해질 무렵, 총사령관인 삼마자 류레이아가 참모진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의 뒤로는 참모진의 자리를 따낸 차남 루드빅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대충 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지.”
가늘지만 위엄이 서린 류레이아의 목소리가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 군략 회의는 각 방면의 전선을 책임지는 장로들까지 참석한 자리다. 그만큼 새로운 작전이 전선에 하달될 예정이다.”
“……!”
“……!”
사전에 통보받지 못한 다른 간부들은 당황과 기대가 뒤섞인 눈으로 류레이아를 직시했다.
반대로 사전에 작전을 수립하고 내용을 공유받은 참모진과 장로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지도를 펴라.”
류레이아의 지시에 한 참모가 마법으로 북방의 지리와 상황을 담은 지도를 구현해 냈다.
그 지도는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이었는데, 최근 수십 일간 전선의 변화를 담은 내용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확실히 나쁘진 않군.’
총 네 곳으로 나뉜 북방 전선은 아주 착실하게 북방의 영토를 수복해 나가고 있었다.
빨간색으로 보이는 마족의 영역이 날이 갈수록 북쪽으로 밀려나는 게 보였다.
“원래 다섯 개로 나뉘었던 전선은 한 달 전, 백작급 마족인 에키두스를 척살하고 네 곳으로 좁혀졌다.”
류레이아의 지팡이가 지도의 어느 한 군데를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 동북쪽 전선을 보면 또 다른 백작급 마족의 마계영역에 근접했지.”
“오오, 그 말씀은?”
“그래.”
류레이아가 눈을 번뜩이며 좌중에게 선언했다.
“앞으로 3일 후, 이 마계영역에 진입하여 두 번째 마계 백작의 목을 따겠다.”
그 말에 막사 안은 대번에 흥분의 도가니로 달아올랐다.
이전, 아르바의 군세를 궤멸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마왕 휘하 마계 백작 5인.
하나하나가 라데우스의 전투부대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들.
그렇기에 마왕을 치기 전에 반드시 제거해야 할 1순위의 표적이기도 했다.
그런 그때.
“위험합니다.”
막사의 어딘가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르하는 그 목소리가 제법 젊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고개를 돌렸다.
류레이아가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르미안 엔시스, 이유가 뭐지?”
저벅!
그녀의 지명을 받은 다르미안이란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나이로는 30대 중반 정도? 참모진은 아니었고 어느 전투부대의 소속인 듯 보였다.
그의 청량한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첫 번째 마계 백작의 처리는 어디까지나 그자의 영역이 지나치게 돌출되었기에 진압이 가능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바로 인근의 영역에 또 다른 마계 백작의 영역이 존재합니다. 게다가 더 좋지 않은 건…….”
다르시안은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놈의 영역 바로 인근에 가파른 협곡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그 말인즉?”
“네. 협공의 위험성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까지 마계영역을 공략해 온 우리가 절대적으로 기피하고 싶었던 그것을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참모진 쪽에서 반박이 흘러나왔다.
“다르미안 경, 그쪽 영역은 이미 결론이 난 곳입니다. 정찰대가 진입하기도 힘든 험지에다 설사 병력을 숨길 수 있다 하더라도 투입 자체가 힘든 지형이죠.”
다르미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일반적인 병력이라면 맞는 말씀입니다만 우리가 상대하는 주적은 어디까지나 마물입니다. 거친 날씨로 비행정을 투입하기 힘든 우리와는 다르게, 두꺼운 외피를 자랑하는 비행형 마물들에게 절벽이나 험지는 별다른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설사 그게 가능하더라도 놈들이 협곡에서 투입할 수 있는 병력 자체는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충분한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협공은 충분히 가볍게 떨쳐 낼 수 있습니다.”
대번에 참모와 다르미안 사이에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네르하는 두 사람의 주장을 들으며 승산을 점쳤다.
‘솔직히 공략 가능성이야 충분하긴 하다.’
저 참모의 말대로 현재, 북부 전선에 파견된 라데우스의 전력은 네 명의 마계 백작을 포함한 영역 전체와 정면충돌해도 승리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계영역이란 권능의 특성상 협공 및 퇴로가 차단될 가능성이 높고, 또 마왕이란 변수 때문에 쉽사리 힘을 뭉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반대로 저 다르미안이란 녀석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지. 설사 공략은 가능하더라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아. 특히나 총사령관의 투입이 불가능한 만큼.’
아무리 류레이아가 8레벨의 대마법사라고는 하나 그의 직책은 어디까지나 총사령관.
절대 함부로 작전에 투입할 수 없는 지위에 있는 존재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른 마계 귀족이 영역을 펼쳐 구멍을 메울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린 큰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당신이 책임지실 겁니까?”
“그렇게 책임을 떠넘길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견해입니다!”
안타깝게도 상황은 다르미안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루드빅을 비롯한 참모진이 합세해서 다르미안의 말을 지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입으로 여러 입을 막기 힘든 다르미안으로선 점차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론이 공략 쪽으로 무게가 완전히 실리기 직전.
류레이아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며 외쳤다.
“그만!”
뚝!
그녀의 말 한마디에 대번에 소란스럽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의견이 모두 그럴듯하니 이번 작전에 관련된, 그리고 관련될 이들의 의견을 모두 들어보도록 하지.”
류레이아가 가장 먼저 상석에 앉아 있는 한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렌 장로.”
“예. 총사령관.”
“당신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지렌 라데우스.
라데우스 본가의 장로 중 하나이자 루드빅의 강력한 후원자인 존재였다.
그리고 이번 작전이 실행된다면 마계 백작을 상대할 대장으로 내정된 이이기도 했다.
지렌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찬성입니다. 위기 없는 전쟁은 없는 법. 당연히 기회가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잡아야겠지요.”
고개를 끄덕인 류레이아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레티안 라데우스.”
직계 중 차녀인 레티안은 특유의 과묵함으로 간단하게 한마디만을 날렸다.
“찬성입니다.”
“세드릭 하이넨.”
“반대입니다. 그 이유는 다르미안이 설명한 대로입니다.”
라데우스 직속 전투부대의 대장인 세드릭 이후로 대여섯 명의 관계자들이 류레이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결과는 찬성 다섯, 반대 둘.
반대 의견을 낸 두 명이 모두 전투부대의 대장들이라는 점은 꽤 주목할 만한 요소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류레이아의 시선이 지금까지 한마디도 내뱉지 않고 침묵하던 한 은갈색 머리의 청년에게로 향했다.
“네르하 라데우스.”
어? 나?
네르하는 순간, 자신이 지목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