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마계 백작 아스타로스 (3)>
“이, 이럴 수가!”
마엘론 경은 저 지평선 너머에서 몰려오는 마물들의 군세에 넋을 잃었다.
“하필이면 마법사 전력이 전부 집중되어 있을 때 이런 일이!”
전방에서 몰려오는 마물들의 군세는 족히 1만은 가볍게 넘어 보인다.
물론 이쪽은 2만에 달하는 데다 라데우스의 재력으로 전원이 중장갑을 착용할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대형 마물과 마족들로이군요.”
“그렇지.”
부관의 말에 마엘론 경은 이를 악물었다.
소, 중형 마물 정도야 군의 힘으로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다지만 이런 마계영역이 펼쳐진 곳에서 그런 마물들만 튀어나올 리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저, 저길 봐!”
눈이 좋은 한 병사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주변 병사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마, 마족들이다!”
“못해도 수십 마리는 되는 것 같아!”
머리에 뿔이 달리거나 팔다리가 짐승처럼 날이 서 있거나 피부가 각양각색이거나.
인류와 똑같이 두 팔, 두 다리가 모두 달려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완전히 결이 다른 이계의 종족.
‘마족’들이 하늘에서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왕이 바로 나오진 않는다는 건가?”
네르하는 싸늘한 시선으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마족들을 눈에 담았다.
“어때? 너희들, 저것들을 감당할 수 있겠어?”
저들은 귀족이 되기엔 모자라지만 지성체로서 마족만의 마법과 권능 등을 사용할 수 있었다.
생도 중 가장 먼저 5레벨에 이른 디센트가 말했다.
“일대일이라면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수가 문제군요.”
“하이로드인 백작이라면 휘하에 마계 귀족들을 다수 거느리고 있을 수도 있어요. 진짜 문제는 그들이죠.”
“아마 그들이 전부 오진 않았을 거다.”
네르하는 기감을 최대한 넓히며 위협적인 적들을 찾았다.
‘성동격서를 제대로 이루려면 타격대의 발목을 잡아야 할 놈들은 남겨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들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지금 달려드는 마물과 마족들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저 멀리서 느껴지는 마계 백작이 움직이는 순간,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질 거다.
“네르하 도련님!”
마엘론 경이 지원조의 마법사들을 모두 이끌고 네르하에게 다가왔다.
“후퇴 준비가 끝났습니다! 어느 쪽으로 후퇴하시겠습니까?”
“어, 어느 쪽이라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반대로 그 말을 이해한 네르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본대로는 가지 못합니다. 너무 멀어요. 적들은 그걸 상정하고 기습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시.”
“북쪽으로 가서 타격대와 합류해야 합니다. 놈들의 돌진을 최대한 저지하면서 타격대가 함정을 뚫고 남하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살 수 있습니다.”
“제 생각도 네르하 도련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적들의 목표는 이 군대 자체인 듯싶습니다. 반드시 큰 피해가 나지 않게 교전을 피하면서 북상합니다.”
네르하는 마엘론의 뒤에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신들은 일시적으로 내 휘하에 들어옵니다.”
“그, 그것이…….”
당연히 그러겠다고 말할 것 같았지만 골 때리게도 그들은 네르하의 지휘를 거부했다.
“저희의 주인은 루드빅 도련님이십니다. 함부로 네르하 도련님의 말씀을 들을 수는……. 컥!”
선두에 있던 중년의 마법사는 말을 다 이어나갈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네르하가 자신의 목을 잡고 제압해 버린 탓이었다.
‘어, 어느새?!’
그가 경악하든 말든 네르하는 살기를 풀풀 피워 올리며 마법사를 향해 일갈했다.
“모두가 죽나 사나의 갈림길에서 파벌을 따지는가? 지휘에 따르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
“컥! 커걱!”
뒤에 있던 다른 마법사들은 감히 어떻게 할 생각도 못 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보, 보르자 님이 이렇게 허무하게 제압당하다니?”
“곧 6레벨에 이를 거라 기대받는 마도사이신데!”
네르하가 일수에 제압한 보르자라는 중년은 5레벨 후반대에 머물러 있는 마법사인 듯했다.
‘하긴, 불혹이 다 되도록 6레벨을 뚫지 못했으니 전투부대가 아니라 지원조에 배정되었겠지.’
그래도 나름 전투 경험은 있을 테니 적어도 민폐는 끼치지 않을 거다.
“따, 따르겠습니다! 도, 도련님!”
보르자의 항복 선언에 네르하는 쥐고 있던 목을 놔주었다.
“켁! 케헥!”
“시간이 없으니 잘 들어라. 너희는 우리와 합류해서…….”
막 작전을 전달하려던 네르하는 아군 방향에서 익숙한 인영이 나타나자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새 그 익숙한 인영은 10여 명의 인원을 이끌고 네르하의 앞에 도달했다.
“그렇게 사람을 윽박질러서야 쓰나, 동생?”
“아르바 형님?”
네르하의 눈앞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아르바 세타 라데우스.
그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쓸 만한 전력이 필요하지 않나?”
아르바가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아르바 라데우스는 분명 7레벨에 도달한 마도사였다.
아마 개인적인 강함이나 성취를 보면 클로이아보다도 더 뛰어날 것이 분명했다.
‘저 뒤에 있는 자들. 분명 전원이 6레벨을 돌파한 실력자들이다.’
저들이 지금 상황에서 합류해 준다면 분명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뭘 망설이는 거지, 동생? 도와주러 나타난 형님의 선의를 설마 거절할 생각인 건 아니겠지?”
“…….”
“걱정 말라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 동생과 약속했던 공적 비율을 깎으려 들진 않을 테니까.”
아르바의 등장은 매우 시기적절했고, 또 치명적이었다.
네르하는 자신의 머리를 잠식한 위화감을 애써 털어내고는 아르바에게 고개를 숙였다.
“일단 형님께서 도와주신다니 정말 든든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하하, 의심하고 있구나, 동생.”
“꼼짝없이 속았는데 당연한 일이죠.”
네르하가 알기로, 아르바는 모든 지휘 통제권을 박탈당하고 오로지 혼자 힘으로 백의종군 중이라고 알고 있었다.
아르바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라고. 나름 총사령관도 묵인해 주고 있는 거니까.”
그렇겠지.
아무리 아르바라고 해도 저런 전력을 들키지 않고 숨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아르바는 마물들이 있는 방향으로 턱짓을 했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건 나중에 하고, 일단은 눈앞의 위협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겠지?”
어째서 아르바가 이곳에 있는가?
정말로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 모든 의문의 근원은 그가 전투 도중에 배신을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에 한해선 그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나와 수하들이 마족들을 맡지. 너희는 후퇴하는 군대의 후방에서 최대한 방어에 집중해라.”
“괜찮겠습니까?”
아르바의 말은 자신이 가장 먼저 나서서 희생하겠다는 소리였다.
“이 정도는 해 줘야 네 녀석이 의심을 거두지 않겠나?”
“…….”
“그래도 지금 상황에선 희생이 좀 커질 테니 클로이아만 빌려달라고. 그럼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
뭐가 됐든 지금, 네르하의 수하들은 저 마족들과 정면충돌해서 좋을 게 없었다.
“클로이아.”
“말하세요.”
“만약 위험하다 싶으면 전력으로 두드려 패고 빠져나와.”
‘누구’를 두드려 패라는 건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테니까.
“큭큭! 알았어요.”
클로이아는 살포시 웃으며 아르바의 진형에 합류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아르바의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게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그녀를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군.’
뭐, 그렇다고 해서 아르바에게 클로이아를 넘겨 줄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네르하가 시선을 돌렸다.
“루시아.”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좋아. 저들이 저 하늘 위의 마족들을 붙잡아 두는 사이 우린 군대를 짓밟으려는 저 대형 마물들을 사냥한다.”
그냥 대형도 아니다.
코끼리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거대한 짐승에서부터 언덕을 통째로 뽑아 온 것 같은 거대한 골렘까지.
설사 특수 능력이 없다 해도 저 덩치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것들이었다.
“검을 써도 될까요?”
“들켜도 딱히 상관없다면. 여력을 숨기다가 허무하게 죽지만 마라.”
“핏! 그쪽도 제대로 된 전력을 내보인 적도 없으면서.”
루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네르하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마엘론이 주변 전령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전군, 전투준비!”
뿌우우우우!
고동 소리와 함께 준비하고 있던 방패병들이 일제히 방진을 펼쳤다.
“우리들은 진에서 나가 대형 마물을 공략할 것이다. 너희들은 방패병들이 뚫리지 않도록 최대한 보조하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네르하 도련님.”
보르자는 뛰쳐나가겠다는 네르하의 말에 황당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네르하를 포함한 아홉 명의 인원들이 그대로 방진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잡다한 놈들은 무시해! 기병들이 해결해 줄 거다!”
두두두두!
그 말마따나 좌우에서 중장기병들이 튀어나와 네르하 일행을 호위하듯 잡다한 마물들을 베어 나갔다.
크아아아악!
“가장 먼저 앞에 있는 놈부터! 아군에 붙기 전에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네르하는 대형 마물 중 가장 선두에 서 있는 크기가 수십 미터나 되는 거대한 골렘을 가리켰다.
“마운틴 골렘!”
어지간한 마족보다 훨씬 까다로울 게 뻔한 괴물 중의 괴물.
저놈이 그냥 엎어져도 아군의 진형 따위는 가볍게 풍비박산 날 것이다.
쩌저적!
놈이 움직일 때마다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인탱글!”
“어스 오브 머드!”
실마연 소속의 수하들이 마법을 영창하며 골렘이 밟고 있는 대지에 수작을 부렸다.
쿠구구궁!
대번에 골렘의 무게중심이 흐트러지며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리고 루시아가 뛰쳐나갔다.
“그란디아!”
아티팩트형 보검, 그란디아.
‘절대 불굴’과 ‘절대 절삭’의 인첸트가 걸려 있는 이 검은 잡다한 기능을 모조리 제외하고 검 특유의 강점만을 극한으로 살린 최고의 유물 중 하나였다.
부우웅!
오러와 함께 바람의 기운이 루시아의 검에 맺혔다.
3레벨 공격 마법 윈드 커터. 4레벨 공용 마법 와이드 브레스.
네르하에게 전수 받은 융합기를 그녀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재창조한 결과물 중 하나가 세상에 튀어나왔다.
―융합기, 절풍(絶風)!
서걱!
한순간 거대한 참격이 반달 모양의 궤적을 그림과 함께 수 미터에 달하는 골렘의 한쪽 다리가 잘려 나갔다.
그렇게 중심을 잃은 골렘이 무너지려던 찰나.
“언제까지 루시아 양에게 뒤질 수는 없겠죠.”
어느새 골렘의 머리 부분에 나타난 바스톤이 그대로 머리 부분을 향해 강력한 킥을 날렸다.
쿠웅!
원형의 충격파가 퍼지면서 그대로 골렘의 신형이 마물들이 몰려 있는 쪽으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허허허.’
네르하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저것들, 언제 저렇게 강해졌지?’
나름 기대를 가지고 빡세게 굴리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급격히 성장할 줄은 몰랐다.
확실히 육체적인 베이스가 있는 녀석들은 굳이 융합기니 뭐니 하지 않아도 급격히 강해지기 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