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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26화 (126/237)

126화

<마기 (1)>

고오오오!

전신에 흘러넘치는 선명한 검분홍빛의 마기.

그 모습을 본 순간, 네르하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위험하다!’

마기는 생명체에게 공포, 위압감 등을 불러일으켜 전의를 상실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 마인들과 지겹게 싸워왔기에 잘 알았다.

‘색공(色功)인가?’

저 여마족에게선 채양보음(採陰補陽)을 익힌 마녀들 특유의 느낌이 난다.

하지만 결은 같더라도 수준의 차원이 달랐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일반인의 이성 정도는 가볍게 증발시키는 압도적인 위험성.

물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실력자들이라면 충분히 버텨낼 수 있겠지만.

마나를 깨닫지 못한 일반인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저런 기운을 두르고 병사들 한가운데 들어가기만 해도…….’

장담컨대, 진형은 삽시간에 무너지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 일어날 것이다.

“장난질이 도를 넘었더구나.”

네르하는 침착하게 그녀의 말에 대응했다.

“그 장난질이 제대로 먹혔다면 그건 장난질이 아니지.”

“아하하하! 하긴, 그렇긴 하지.”

간지러운 조소가 네르하의 신경을 건드렸다.

나타날 때만 해도 이쪽을 찢어 버릴 것만 같이 분노한 것 같았는데, 의외로 상대는 침착했다.

‘역시 버티는 것도 쉽지 않겠어.’

저 여마족 하나만이 아니라 근방에 함께 나타난 다수의 마족들도 문제다.

저들 하나하나에게서 이전에 만났던 뮬란이란 녀석과 동급의 격이 느껴지고 있다.

“루시아, 바스톤.”

“네.”

“만약 저들이 모두 움직인다면 군을 보호하는 걸 포기하고 도망쳐라. 가능하면 디센트 일행만 회수해.”

“네, 네!”

“알겠, 습니다.”

두 사람은 네르하의 말에 살짝 당황했지만, 곧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전력으로 여기까지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때.

딱!

“전투 중지.”

마계 백작 아스타로스가 손가락을 튕겼고, 그와 동시에 모든 마족과 마물들의 동작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뭐지?’

남은 전력을 모두 투입해서 몰아쳐도 모자랄 판에?

그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아스타로스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대, 이름이 무엇이냐?”

목소리가 좀 부드러워졌다는 건 착각인가?

“네르하 라데우스.”

“라데우스라? 라데우스에 너 같은 것이 있었나?”

저건 칭찬일까 욕일까.

“네게 기회를 주마.”

“기회라고?”

“내 권속이 되어라. 너와 저 뒤에 있는 여아까지.”

이쪽만이 아니라 루시아까지 탐내고 있다.

좋은 건(?) 알아 가지고.

“거절한다면?”

기껏해야 죽인다, 같은 틀에 박힌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네 영혼을 영원히 가지고 놀아주지.”

사령술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족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네르하는 살짝 침을 삼켰다.

아마도 패배하거나 인질로 사로잡힌다면 정말로 죽는 것이 자비로울 정도의 처지가 되겠지.

“조금 무섭군.”

“그래서, 대답은?”

그래도 대답은 정해져 있다.

“당연히 거절이다.”

네르하는 그 말과 동시에 반대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의 끝에는 여전히 아르바와 클로이아가 물러선 마족들과 대치를 하고 있다.

‘상황이 뭔가, 조금 이상하군.’

네르하는 하늘의 전장을 보고선 무언가 위화감이 도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이유를 파고들기 전에 클로이아에게 전음을 보냈다.

―클로이아, 이쪽으로 합류해.

―아, 알았어요!

‘얼만큼 시간을 벌 수 있을까?’

저 눈앞의 여마족을 붙잡아 둘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 기회에 ‘그걸’ 제대로 시험해 봐야겠어.’

네르하가 막 아스타로스를 향해 돌진하려고 할 때였다.

“성급하구나. 시작부터 다짜고짜 왕을 잡으려 드느냐?”

그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 시립해 있던 귀족급 마족들이 아스타로스의 앞에 서며 네르하를 가로막았다.

“왕에게 도달하려면 먼저 내 종복들을 뚫어야 하지 않겠느냐?”

‘역시, 일대일로 상대해 줄 생각은 없나?’

그런데.

“그래도 이들 모두를 감당하라고 하는 건, 그대에겐 너무 가혹한 처사겠지.”

아스타로스가 내뱉은 말은 이쪽의 예측을 한참이나 빗나가 있었다.

네르하가 잠깐 멍한 표정으로 멈칫거리고 있을 때.

“누가 내게 저 인간을 잡아다 바치겠느냐?”

그녀가 오만한 태도로 네르하를 손가락질하자 나타난 마족들이 대번에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부디 이 바르마렉에게!”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이게 지금 뭐하자는…….’

분명 시간을 끌어야 하는 것은 이쪽이다.

하지만 상대는 속전속결로 이쪽을 처리해야 하는 입장인데도, 마치 연회의 주최자 같은 모습을 보이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그사이 클로이아가 네르하의 곁에 착지했다.

“아무리 분노했다고는 해도 직접 나서지는 않는군요.”

“그게 무슨 소리지?”

“상대가 마왕의 휘하에 있는 자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백작급 마족이라는 건 마족들 사이에서도 군주의 위치니까요.”

“군주? 아, 그렇군.”

‘전사’가 아닌 ‘군주’.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직접 나서지 않고 부하들을 내세우는 것이다.

“물론 지금 저렇게 나오는 이유는 저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요.”

“그건 나도 그래.”

아무리 상대가 직접 나서진 않더라도, 이런 식으로 불리한 행동을 취하는 것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대, 네르하 라데우스.”

아스타로스가 네르하를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뭐지?”

“지금 상황은 이 몸이 네게 기회를 주는 것인데, 아무래도 그에 대한 대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대가라고?”

“이 몸으로썬 네가 그렇게 지키고 싶어 하는 인간들을 노려도 딱히 상관은 없다만?”

네르하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확실히 현재 상황에서 주도권은 상대가 쥐고 있다.

아스타로스가 은근한 기색을 풍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몸은 그러지 않고 친히 너에게 집중하고 있지.”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세 명.”

그녀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그대의 힘으로 내가 신뢰하는 세 명의 대전사를 꺾어 보거라.”

“나 혼자서 말인가?”

“당연히.”

일기토.

네르하가 바라마지 않았던 일을 오히려 적이 제시하고 있다.

“물론 승부를 질질 끄는 그런 재미없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 정도는 어울려 줄 수 있겠지.”

마계 백작의 대전사라면 분명 하나하나가 엄청난 강자일 터.

어설픈 전략으로 시간을 끌 상대는 아닐 것이다.

* * *

일기토가 결정된 뒤에도 후퇴는 계속되었다.

아니, 이젠 슬슬 군대는 저 북쪽 너머로 사라질 정도로 거리를 벌린 상황이었다.

타격대가 어디까지 들어갔는지는 몰라도 저 정도면 충분히 합류할 수 있겠지.

다만, 그 대신.

네르하는 셋째 형의 분노를 정면으로 직시해야 했다.

“네르하, 감히 멋대로 일을 진행하다니!”

아르바는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형님. 저쪽에서 알아서 시간을 끌어주겠다는데 거절할 수가 있어야죠.”

“젠장,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아르바는 묘한 말을 내뱉곤 사나운 눈으로 네르하를 쏘아보았다.

“어떻게 할 거냐? 네가 지기라도 하면 너 혼자만의 목숨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인간은 네르하와 일행, 그리고 아르바와 부하들뿐.

인근엔 수만에 달하는 마물과 마족들로 쫙 깔려 있었다.

이만한 숫자에 둘러싸이면 7레벨이고 나발이고 목숨을 유지할 방도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북진했던 타격대가 이쪽으로 도착하기까진 앞으로 30분은 걸릴 것이다.”

“30분이라.”

“그리고 너는, 자작급 마족 셋을 상대로 그 30분을 버텨야 하지.”

네르하는 묘한 눈빛으로 아르바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도착할 시간을 제법 정확히 알고 계시는군요. 연락용 아티펙트도 없을 텐데.”

군을 이끌던 마엘론 정도면 모를까.

백의종군 중인 아르바가 본대도 아닌 타격대와 연결된 라인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아르바는 그게 어땠냐는 듯 당당하게 면박을 주었다.

“그 정도는 당연히 계산할 수 있어야지. 그것도 못 하면 네놈의 머리가 멍청한 것이다.”

‘정말 그럴까?’

네르하 역시 수많은 전투를 거친 베테랑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실전에서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아군의 움직임을 이리 정확히 예측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슬슬 준비가 되었느냐?”

여전히 하늘의 옥좌에 앉아 있는 아스타로스가 네르하를 독촉해 왔다.

여전히 저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네르하는 앞으로의 행동 방침을 이미 결정한 상황이었다.

“언제든지.”

“좋다.”

마물들이 물러나면서 자연스레 원형의 간이 경기장이 만들어졌다.

쿵!

그리고 그 경기장 중앙으로, 근육질의 마족이 거칠게 내려앉았다.

‘무투형!’

양쪽 관자놀이에 돋아난 거대한 뿔.

하지만 그 뿔보다도 인상적인 건, 상대의 신장이 못해도 3m는 되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마나고 나발이고 맨몸으론 스쳐도 치명상이겠군.’

게다가 놈의 몸엔 근육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전신 곳곳에 송곳같이 울긋불긋한 무언가가 돋아나 예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인간이여, 나는 마계 자작 바르마렉이라고 한다.”

“네르하 라데우스다.”

“저 멀리서 주군과 함께 네놈을 지켜보았다. 라데우스의 인간치고는 제법 몸을 쓸 줄 알더군.”

“그러냐?”

“그래 봤자 그런 비루한 육체로는 이 몸을 어찌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하하하!”

자신의 육체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진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

“호오오?”

하지만 그것이 네르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확실히 육체만으로도 오우거를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몸이긴 하다만.

그게 이 몸 앞에선 얼마나 오만한 소리인지 깨닫게 해 주지.

“시작하거라.”

저 위에서, 아스타로스가 전투 개시의 신호를 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금방 끝내주지.”

“뭣?”

네르하는 마령수투에 담긴 힘을 끌어올렸다.

‘속성 통합.’

네르하가 완성한 5레벨의 고유 계통.

그 능력은 한 번이라도 자신이 다루어 본 속성이라면,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그 속성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었다.

‘굳이 조작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 영역이라는 밑그림에 색과 형태를 새겨 넣을 수 있다면.’

네르하가 전생에서부터 구축한 경지는 8레벨의 ‘영역’에 닿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현재 상태로는 아직은 그 영역의 밑그림을 그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엘로이아에게 고유 계통의 개발을 지적받았듯이, 지금 상황에서 굳이 8레벨의 영역을 아등바등하며 구현할 필요는 없었다.

네르하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무인이니까.

콰과과과!

네르하의 전신에서 ‘검은 무언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설마?”

바르마렉의 표정이 크게 굳어졌다.

게다가 당황한 건 그만이 아니었다.

“어머.”

“……네르하?”

“네, 네르하 도련님?”

주변의 모든 이들이 네르하가 뿜어내는 ‘마기’를 보며 경악을 내질렀다.

바르마렉은 전신에서 마기를 흘리는 네르하를 향해 침음을 흘렸다.

“인간이, 마기를 다뤄? 그것도 순수한 마기를?”

그런 바르마렉을 향해 네르하가 이죽거렸다.

“뭐가 그리 신기하지? 흑마법사들도 마기는 잘만 다루는데.”

“아니, 흑마법사는 절대 너처럼 마기를 다룰 수 없다.”

흑마법사와 네르하는 완전히 사정이 달랐다.

흑마법사는 어디까지나 ‘영혼’을 매개로 마족에게 마기의 제어권을 양도하지만, 눈앞의 네르하는 그런 것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만으로 마기를 다루고 있다.

“정체가 뭐지?”

“알 것 없다.”

팟!

짧은 일갈과 함께, 네르하가 자리를 박찼다.

허공에 떠오른 네르하의 전신에, 바르마렉조차 경시하지 못할 막대한 마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온다.

그 폭발력의 근원은, 심장 인근에 새겨진 벨카서스 학파의 비전 마나 익스텐더.

원래라면 단순한 증폭제로서의 역할로만 끝났을 마나 익스텐더였지만.

네르하의 고유계통인 속성 통합과의 조합이 희대의 궁합이 되면서 그 가능성이 폭발했다.

“어딜!”

노련한 전사인 바르마렉은 당황하지 않고 대응했다.

팟!

마족의 육체가 가진 특수성이 발현하여, 바르마렉의 팔이 거대한 기둥처럼 늘어나며 네르하를 향해 쏘아졌다.

파파파팟!

하지만 네르하는 애초부터 피하거나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마기를 듬뿍 담은 네르하의 주먹이, 그대로 그 기둥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기둥과 주먹이 부딪치고.

투―웅!

거대한 파동이 전장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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