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배신의 전조 (1)>
류레이아는 그 말에 대번에 답하지 않았다.
그 전에 고개를 돌려 떨떠름한 표정을 한 네르하를 바라보았다.
“저도 좀 당황스럽긴 합니다.”
다짜고짜 침실에 침입해 와서 동맹 제안이라니.
네르하가 막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던 찰나.
“흐음.”
쿵!
류레이아가 갑자기 자신의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찍더니, 고대어를 영창하기 시작했다.
‘큭!’
순식간에 거대한 마나 폭풍이 일어나 이쪽을 덮쳐왔다.
역시나 대화가 통하지 않는 건가, 싶던 찰나.
마나폭풍의 여파에 직격당한 네르하는, 몸이 날아가기는커녕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자 눈을 깜빡였다.
“뭐 하신 겁니까?”
어떤 종류인지는 몰라도, 밀집된 마나의 양을 고려하면 최소 7레벨 이상의 마법이다.
그걸 고작 몇 마디 말로 실행한 류레이아의 기량은 놀라울 정도였지만, 문제는 이게 무슨 마법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거다.
“세뇌 제거(Brainwashing Remover)에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세뇌당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제가 그 정도로 허술하진 않습니다만.”
“그렇다면 가스라이팅인가?”
“…….”
네르하는 침묵했다. 여기서 뭘 대답해도 설득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거기까지 하지.”
그런 상황을 타파한 건 아스타로스였다.
“비슈나르가 내 역심을 눈치채기 전에 놈을 제거하고 싶다. 그걸 위해선 너희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지.”
“뭘 믿고? 그게 함정이 아니라는 증거는?”
“물론 이 상태로는 너희가 믿을 건덕지는 없지.”
“당연하지.”
“그렇다면 천천히 유도해 주면 되는 문제 아닌가?”
“유도라고?”
류레이아의 눈이 살짝 찌푸려진 순간, 아스타로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머지 네 명의 마계 백작들을 모두 제거하고, 비슈나르 혼자 남게 되도록 유도하면 되지 않겠느냐?”
류레이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바로 어제 아스타로스와 네르하가 합의를 도출하기까지 꽤나 언쟁을 벌였던 사안.
“그래도 안 돼. 단 한 번의 전투로도 치명상이 될 수 있으니까.”
“완고하군.”
“언령의 계약을 맹세할 수 있어? 그렇다면 고려할 순 있어.”
확실히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는 만큼 가장 확실한 건 언령의 계약이긴 하다.
하지만 아스타로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이쪽이 안 돼.”
“그럼 교섭 결렬이군.”
쩌저적!
그 순간 땅바닥에서 나무덩굴이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네르하와 아스타로스의 육체를 옭아매었다.
고작 나무 따위라고 하기엔 지금까지 네르하가 봐왔던 어느 물질보다도 강하고 질기고 또 유연했다.
‘끊으려면 힘을 좀 많이 써야겠군.’
하지만 이 상태에서 힘을 썼다간 총사령관에게 반역을 저질렀다는 결과밖에 남지 않는다.
“후후후, 요새 내 목이 남아나질 않는 것 같군.”
“유언이 있다면 한마디 정도는 들어주지.”
“애초에 섣불리 언령의 계약을 했다간 금방 들켜 버리고 만단다.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
류레이아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건 상대의 말이 맞다는 걸 긍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비슈나르 정도의 상위 존재라면 언령 계약의 내용은 몰라도, 계약 자체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지. 애초에 언령의 계약 자체가 제삼자인 ‘세계’의 보증을 얻는 계약이니까.”
“흐음.”
“죽으라고 보낸 부하가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누군가와 언령의 계약을 체결해 있다? 배신한 걸 당장 들켜도 이상할 게 없어.”
“그럼 어쩌자는 거지? 서로 간의 신뢰가 불가능한 이상 너희와 내가 어떻게 믿고 일을 도모하지?”
“다른 방법이 있지.”
그 순간, 아스타로스가 그윽한 눈빛으로 옆에 있던 네르하를 바라보았다.
‘끄응!’
네르하는 두통이 이는 걸 느끼면서 고개를 돌렸다.
“언령의 계약은 인과율을 끌어들여 세계의 보증을 받는 만큼, 상위 존재라면 쉽게 그 흔적을 관찰할 수 있지. 하지만 반대로 ‘일대일의 구속 계약’이라면 계약의 당사자가 아닌 이상 설사 신적 존재라도 쉽게 발견할 수 없어.”
일반적인 마법사들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지만, 경지가 올라가고 고위의 존재가 되어 갈수록 이 차이는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나름 고위 존재인 류레이아는 그 말뜻을 아주 잘 알아들었다.
“아니, 지금 그 말은…….”
천하의 류레이아조차도 당황할 정도로 파격적인 말.
“주종 관계. 이거면 들킬 우려도 없고, 충분한 신뢰도 생기겠지.”
그 말과 동시에 아스타로스가 네르하에게 달라붙었다.
“안 그래? 주인님?”
네르하는 대답 대신 이마를 짚는 거로 표현을 대신했다.
주종관계.
언령이 서로 간에 동등한 계약 관계라면, 주종 관계는 말 그대로 주인과 종이 나뉘는 절대적인 갑을 관계다.
당연한 말이지만 화신체를 넘어 본체에까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계약이기도 하다.
“미친년인가?”
류레이아가 이런 소리를 내뱉는 것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다.
“후후후, 이 몸은 지극히 정상이니라.”
아스타로스는 읽기 힘든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 몸은 지배하는 것도 좋지만, 지배당하는 것도 좋아하지. 뭐, 그래도 확실하게 하는 게 너희로서도 좋지 않겠느냐?”
“너, 정말 세뇌당한 거 아니야?”
류레이아가 다시금 의심스러운 기색을 보냈고.
네르하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황당하겠지만, 녀석이 보여 준 자료를 보면 어느 정도 진정성이 보이긴 합니다.”
아스타로스는 책으로 엮으면 한 권은 족히 나올 정도로 세세한 정보를 건넸다.
그 정보의 진위야 천천히 싸우면서 알아가면 되는 문제고.
“무엇보다 우리의 공세에 이 녀석이 호응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 녀석의 배신에 호응한다는 점이 괜찮죠.”
네르하는 아스타로스에게 건네받은 정보가 담긴 스크롤을 류레이아에게 넘겨주었다.
“정 그렇게 불안하다면 마지막 쐐기를 박아 주지.”
“호, 자신만만하군. 뭐지?”
류레이아의 표정은, 이어진 아스타로스의 말 한마디에 급격하게 굳어 버렸다.
“너희 중에 섞여 있는, 비슈나르의 꼬임에 넘어간 배신자들의 존재를 말이야.”
* * *
척!
“다시 뵙겠습니다. 다르미안 엔시스입니다.”
“세드릭 하이넨, 이번 북방 원정 동안 도련님을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바스톤과 알페온, 디센트 등.
네르하가 데려온 수하들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신들의 앞에는 백여 명은 가볍게 넘는 전투마법사단 ‘하이네’와 ‘살로페’의 일원들이 오와 열을 갖춰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 이거 우리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
실마연(실전마법연구회)의 수하 하나가 긴장감에 입가를 부르르 떨었다.
저들 대다수가 리브라의 졸업자들이며, 그건 즉 자신들의 선배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너희들은 내가 데려온 녀석들을 훈련시키는 데 전력을 다해 줘야겠어.”
이런 전쟁 중에, 저런 대량의 고급 인력들을 고작 자신들의 교사로 써먹는다고?
그것도 선배들을?
“주, 주군!”
“뭐, 이 정도의 인원이 있으면 모의 훈련은 물론이고 이론 수업도 충분히 가능하겠지.”
“저, 저기.”
“다 대 일 과외 수업이다. 이런 환경이라면 리브라에 있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겠지.”
“아, 아니!”
“실전만이 능사는 아니다. 아무리 전투 마법사라고는 해도, 마법사의 성장은 탁상에서의 고민에 있으니까.”
무인과는 달리 마법사의 성장 방법은 확실히 결이 달랐다.
“…….”
수하들은 네르하의 결정에 미칠 것만 같았다.
능글거리며 웃는 세드릭 하이넨이나, 담담한 표정의 다르미안 엔시스는 그렇다 쳐도.
저 뒤에서 완벽한 무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선배들’의 시선에서 더할 나위 없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네르하가 수하들에게 신형을 돌렸다.
“물론 전력 면에서 너희 열 명과 저 백오십 명은 비교할 수가 없겠지.”
당연한 소리다.
지금 당장의 기량으로 따지면, 저들 중 한 명이라도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건 루시아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저 백오십보다 너희 열 명에게 거는 기대가 더 크다.”
움찔!
“너희가 무난하게 성장한다면 몇 년 후면 저놈들 중 하나가 되어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선 안 돼.”
장차 라데우스의 패권을 쥘 네르하 라데우스의 직속 수하라면 절대 그 정도 선에서 만족해선 안 된다.
“너희 하나하나가 한 부대를 이끄는 대장의 자리까진 올라가야 한다. 그것도 최소 10년 안에.”
“……!”
수하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난 그게 가능하다고 본다. 너희는 그 정도의 재능이 있어. 거기까지 올라가는 길은 내가 마련해 줄 테니 나머지는 너희의 노력에 달렸다.”
“주군…….”
수하들은 자신의 주군이 보이는 기대와 확신에 감동했다.
다만.
그 말을 이렇게 선배들이 눈앞에서 노려보는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서 했으면 더 감동했을 텐데 말이다.
그때, 세드릭 하이넨이 빙그레 웃으며 네르하에게 공손히 읍했다.
“네르하 도련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도련님께선 저희를 일종의 용병으로 여기시고 있습니다만.”
“사실상 그렇지.”
당장 세드릭만 해도, 이쪽을 대하는 호칭은 ‘주군’이 아니라 ‘도련님’이다.
그저 떠나기 전까지 부하들을 위한 양분으로 쓰기만 하면 그뿐.
“하지만 저희를 꼭 그렇게 나쁘게 보실 만한 건 아닙니다.”
“무슨 의미지?”
“저희는 ‘삼마자’의 직속 부대. 그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네르하는 ‘내가 굳이 알아야 하나?’라고 쏘아붙이는 대신 잠깐 생각하는 걸 택했다.
삼마자란 기본적으로 라데우스의 장로들보다 한 수 위로 쳐주는 최고의 실력자들.
하지만 기본적으로 라데우스의 혈족이 아닌 ‘외부인’인 만큼 이런 특수한 전시가 아닌 이상 가지고 있는 실권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걸 고려한다면.
“후계들을 위해 육성된 부대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네, 맞습니다.”
세드릭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시엔 데려오지 못했지만, 기본적으로 후계분들은 본가에 최소 하나 이상의 전투부대를 휘하로 거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후계 경쟁에서의 큰 경쟁력이 되죠.”
“지금 이건 너희를 거둘 수 있는 기회라고?”
“네. 저희는 부디 네르하 도련님의 휘하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보통은 그 전투부대를 제공한 배경은 후계 본인의 힘이라기보단 그들의 지지층인 장로들과 부인들이었다.
“건방지게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만, 저희가 도련님께 합류한다면 적어도 도련님께선 세력 면에서 바멜 도련님이나 레티안, 세티안 아가씨를 넘어서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네르하의 표정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확실히 건방진 말이군.”
움찔!
네르하의 차가운 눈빛을 직시한 세드릭이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이 내가, 고작 눈빛에 압도되었다고?’
직계 중에서 세드릭에게 이런 감정을 일으킨 건, 단 두 명.
장남 바스텔과 장녀 마하 라데우스뿐이었다.
세드릭이 전율에 부르르 떨고 있을 때.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지.”
네르하는 세드릭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순서가 틀려.”
“무슨, 순서 말씀이십니까?”
“너희가 나를 시험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시험하는 거다.”
네르하는 오만한 눈빛으로 마법사들을 둘러보았다.
“라데우스의 후예는 너희 따위에게 시험받을 위치가 아니지. 우릴 시험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가주님 단 한 분뿐. 너희가 아니야.”
뭐, 저들 중에선 감히 너 따위가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하냐고 발끈하는 놈도 있을 거다.
하지만 네르하는 진심으로 저들을 거두든 말든 상관없었다.
눈앞에 있는 이들은, 네르하에게 있어 신용도, 신뢰도, 전우애도 없는 완벽한 타인이었으니까.
얼핏 보면 실력도 세력도 변변찮은 후계가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뭔가, 있다.’
세드릭과 다르미안은 어째서인지 저 오만함이 만용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다른 직계들이 자신들을 얻기 위해 얼마나 자존심을 팔았는가?
게다가 일반 병사들도 아니고 백여 명이나 되는 마법사들 앞에서 한 치의 떨림도 없이 저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범인과는 다르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오히려 너희가 내게 너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거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너희에게 큰 실망을 할 테니까.”
그 말을 남기고 네르하는 신형을 돌렸다.
“…….”
“…….”
세드릭과 다르미안은 멀어지는 네르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