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32화 (132/237)

132화

<배신의 전조 (2)>

그렇게 네르하가 임시로 두 개의 전투마법사단을 휘하에 거두고.

북방의 차디찬 밤바람이 라데우스의 기지를 강타했다.

돌아다니는 보초들을 제외하면 모든 움직임이 정지된 듯한 밤.

기지 어딘가에 위치한 조그마한 막사에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 하나가 들어섰다.

“늦었어.”

카랑카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사내의 귓가를 강타했다.

“나름 이쪽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좀 이해해라.”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여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레티안은?”

여인, 세티안 라데우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언니 성격 알잖아? 만사 귀찮아하면서 방에 늘어지더라.”

“레티안답군.”

“애초에 언니는 후계 패권에 관심이 없어. 북방에 온 것도 그냥 날 도와주기 위함이지.”

“알고 있다. 그래서 너와 나의 대담이 될 걸로 알고 왔는데…….”

사내, 바멜의 시선이 옆쪽으로 향했다.

“루드빅 형님까지 계셨을 줄은 몰랐군.”

세티안의 옆에는 조용히 녹차의 김을 감상하고 있는 지적인 미남, 루드빅 라데우스가 있었다.

“재밌군요. 그렇게 엉덩이가 무거웠던 형님이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바멜의 말 속엔 실전을 치르지 않고 후방에서 공을 빨아먹기만 하는 루드빅에 대한 비아냥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루드빅은 태연했다.

“상황이 상황이니까.”

“큭! 그만큼 네르하의 약진이 형님에게도 위협이 된 모양이죠?”

바멜은 작게 웃으며 루드빅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지만 그런 바멜의 비웃음은 루드빅의 다음 말에 의해 대번에 지워져 버렸다.

“위협이라. 나보단 너희들이 더 급할 텐데? 내 예상대로라면 본가에 귀환할 때쯤이면 너희는 이미 네르하의 밑이 되어 있을 거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바멜과 세티안의 표정이 대번에 사납게 변했다.

“아무리 네르하가 전투 부대 둘을 얻었다고는 해도, 우리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후발주자인 바멜과 세티안이 지금까지 후계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서로 간의 협력과 공조가 상당히 유기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바스텔의 칩거 이후 마하―루드빅―아르바로 이어지는 시엘 대부인의 3남매가 서로를 물어뜯으며 제 살을 깎아 먹었지만.

바멜―레티안―세티안 세 남매는 끈끈한 팀웍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며 가문 내의 위치를 사수할 수 있었다.

돈 외에는 변변찮은 세력이 없는 네르하와 네이하 남매가 아무리 발악한다 해도, 이 세 명의 세력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하이네와 살로페, 두 전투 부대만으로는 너희를 넘어설 수 없겠지.”

후룩!

녹차를 한 모금 들이킨 루드빅이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충격적인 정보를 내뱉었다.

“하지만 북방 서리 일족이 네르하의 편에 섰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

“……!”

바멜과 세티안은 경악했다.

“그들은 아르바 형님의 편에 선 게 아니었습니까?”

루드빅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들은 결국 네르하의 손을 들어 줬다. 아르바가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지난 몇 달 동안 발악한 것치곤 의외의 결과지.”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당사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당사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막의 입구를 젖히며 또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느새?!’

바멜은 경악했다.

자신이 이곳에 들어와서 이야기를 나눈 시간을 생각하면, 상대는 이 근방을 서성거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내가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바멜이 경악하든 말든, 루드빅이 사내를 향해 턱짓을 했다.

“왔으면 앉아라.”

“야박하시군요, 형님.”

“아르바 형님?!”

바멜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대번에 상대의 정체를 알아맞혔다.

그리고 이 자리의 주최자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인지했다.

하지만 그 전에.

“아르바 형님은 네르하와 손을 잡으신 게 아니었습니까?”

“물론, 손을 잡았지. 그렇기에 이번 공을 나눠 먹은 거고.”

“그럼 어째서?”

아르바가 이 자리에 나타난 의미를 모를 정도로 바멜은 멍청하지 않았다.

“너희도 알다시피 네르하의 기세가 지나치게 커졌잖아?”

“그렇긴, 하죠.”

“그러니 조금 눌러 줘야 할 필요성이 있어서 말이지.”

“…….”

정말로?

아무리 아르바가 세력을 좀 회복했다곤 해도, 기본적으로 아르바와 네르하는 순망치한의 관계다.

그런데 이제 와서 뒤통수를 후려치고 이쪽 편에 서겠다고?

“다 좋은데, 네르하를 어떻게 견제할 생각이지?”

바멜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던 때, 루드빅이 지적했다.

“네르하에게 붙인 마법사단을 전멸시키는 건 그리 현명한 짓이 아니야. 가능성은 둘째 치더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총사령관의 수족이니까.”

최악의 경우 총사령관만이 아니라 삼마자 전체가 등을 돌릴 수도 있게 된다.

“물론 그들을 전멸시키는 건 안 되죠. 불가능하기도 하고. 하지만 깎아내는 정도는 가능합니다.”

“깎아낸다?”

“그만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면, 다음으로 네르하가 뭘 하겠습니까?”

아르바의 말에 바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을 세우기 위해 그들을 밖으로 돌리겠군요.”

“맞아. 손에 쥔 보검을 장식장에 걸어 두기만 하는 놈은 아무도 없지. 보검을 얻으면 열에 열 모두 그걸 빼서 휘둘러 보고 싶을 테니까.”

네르하의 세력을 깎아 낸다면 그때가 적기다.

루드빅이 한쪽 입술을 뒤틀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라면 방해할 방법이 마땅치 않지만, 아르바 네 녀석은 다르겠지.”

“그러네. 오라버니라면 옆에서 방해만 해도 쉽게 목적을 이룰 수 있으니.”

“형님의 수완이라면 뭐…….”

이 자리의 누구도 아르바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 있어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그래서, 우리에게 원하는 대가는?”

루드빅의 물음에 아르바는 어째서인지 고개를 내저었다.

“딱히, 아무것도.”

“뭐?”

“형님, 어차피 내가 뭘 제시하든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은 없잖아? 안 그래?”

확실히 그렇다.

아르바가 뭘 제시하든 루드빅은 조건을 낮춰서 조율할 셈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오히려 더 수상하다.

‘무슨 꿍꿍이지?’

그런 루드빅의 의혹에도, 아르바는 밝게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굳이 네르하를 견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간에 서로 신뢰를 회복할 계기가 있다면 좋겠지. 그 부분에서 나는 어느 정도 타협할 거리가 있다고 봐.”

“…….”

지금까지 아르바에게 된통 당해 왔던 바멜과 세티안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지금 무슨 수작을.”

“수작이 아니다, 동생아.”

아르바가 바멜을 직시했다.

“나는 정말로 너희를 도와줄 생각이 있으니까. 이 정도로 내 세력을 회복했다면, 난 이제 북방에 큰 미련이 없어.”

동생들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뭐,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 주면 되겠지. 어쨌든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아르바의 말은 진심이었다.

북방에 온 형제들과 신뢰 관계를 쌓고, 그들이 아르바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을 때까지 확실하게 밀어줄 생각이었다.

다만 그 이후, 그 이후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지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 * *

‘쉽군.’

형제들을 설득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애초에 욕심을 부리지만 않으면 충분히 성사되는 일이었으니까.

원래 네르하와 계속 손을 잡으려던 아르바가 고작 전투 한 번 만에 등을 돌린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네르하가 너무 커 버렸다. 이건 뭐 여러 번 언급한 일이니 넘어가고.

두 번째로, 몰락했던 아르바를 밀어주던 ‘스폰서’가 네르하에 대한 견제를 요청한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한데.’

숙소로 돌아온 아르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한 기회를 잡아 주겠다며 때를 기다리라고 해 놓고는, 갑자기 이렇게 다급히 움직이라니.’

아무래도 아스타로스가 살아 돌아간 것이 큰 변수가 된 것 같다.

하지만 뭐가 됐든 스폰서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는 아르바는 일단 행동에 들어간 이상 철저하게 할 생각이었다.

네르하를 견제하고, 다른 형제들은 밀어주고. 그런 식으로 ‘마지막’을 위한 밑 작업에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이 정도 술식은 30초 안에 계산을 끝내야 하는 것 아니냐!”

“삼중속성결합을 못 해? 너 졸업반 맞냐? 리브라의 수준이 터무니없이 떨어졌군!”

“내일 아침까지 이거 전부 싹 해석해서 가져와! 아무리 네놈이 네르하 도련님의 가신이 되었다고 해도 봐줄 생각 없으니까!”

“…….”

아르바는 서리 일족의 영역 한복판에서 벌어진 때 아닌 교육 열풍에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지?’

어디서 공수해 왔는지 모를 수많은 마법 서적과 스크롤들은 그렇다 쳐도.

십여 명의 젊은 청년들이 마법사단 소속의 중년 마법사들에게 어마어마한 구박을 들으며 마법을 강의받고 있다.

‘저것들은 분명 네르하가 리브라에서 데려온 것들일 텐데?’

어째서인지 북방까지 온 ‘공주’를 제외하면 그다지 눈에 띄는 건 없는 녀석들이었다.

“아, 형님. 오셨습니까?”

서리 일족까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구경하는 상황에서, 네르하가 아르바에게 다가왔다.

“네르하,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냐?”

“보면 아시잖습니까? 교육입니다.”

“교, 교육?”

“스승들이 이렇게 많은데, 당연히 교육을 시켜야죠.”

하이네와 살로페에 속한 전투마법사들은 못 해도 나이가 30대 중반 이상인 이들이다.

즉, 모두가 자신의 분야에선 나름 일가를 이룬 5레벨 이상의 강자들이라는 뜻.

“자, 잠깐? 이런 힘을 가졌는데도 한다는 게, 고작 교육이라고?”

스승이 백여 명에 제자가 열.

숫자가 바뀐 게 아니다.

네르하는 아주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이렇게 답했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이대로 진행할 계획입니다. 실전도 실전이지만 이론 역시 소홀히 해선 안 되는 법이죠.”

‘돌겠군.’

아르바는 그 순간 직감했다.

네르하를 견제하는 일이 매우 어려워졌음을.

‘전력을 줄이든 평판을 깎아내든 일단 밖으로 출전을 해야 작업을 칠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안에 박혀서 시간을 보내 버리면 답이 없다.

게다가 네르하에겐 독립된 권한이 주어진 만큼, 본진에서 시행하는 작전에도 굳이 참가할 이유가 없었다.

빙그레 웃은 네르하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아, 아니. 딱히 널 찾아온 건 아니다.”

“그런가요? 또 제게 하실 말씀이 있나 싶어서 오신 줄 알았는데.”

“자의식 과잉이다. 족장과 잠시 상의할 게 있어서 찾아왔을 뿐이야.”

아르바는 손을 휘저으며 궁색한 변명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이걸 어쩐다.’

복잡해진 머릿속 때문에, 아르바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네르하가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 * *

그렇게 네르하가 내실 향상을 위한 교육에 돌입한 이후.

북방 원정대 본진에서는 한창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중하게 가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한차례 놈들에게 농락당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쪽의 피해는 전무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족 놈들의 힘은 점차 강해진다는 걸 다들 알지 않습니까?”

“옳습니다! 전력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니 기세를 몰아 놈들의 영지를 박멸해야 합니다.”

역시나 본진은 두 패로 나뉘어 의견이 갈려 있는 상황이었다.

“…….”

류레이아는 자신의 손에 들린 책 한 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계 백작 아스타로스가 건넨 적진에 대한 분석.

이 책 안에는 단순히 놈들의 병력, 구성, 포진 등만이 아니라 자작급 이상 마족들에 대한 마계 영역의 특징, 그리고 현재 그들의 마력 보유량과 앞으로의 성장 곡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럴싸한 의견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그럴듯하다. 아주 지나치게 그럴듯해.’

이 안에 적힌 일부 정보와 첩보부대가 수집한 정보가 비슷하게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류레이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슬슬 결단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총사령관.”

장내의 분위기가 험악하게 흘러가자 주변에서 류레이아에게 선택을 종용했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작전을 처음부터 다시 짠다. 그리고, 앞으로 3개월 안에 모든 마계 백작을 토벌하고 마왕령을 공략하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