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배신의 전조 (3)>
그 이후로 3개월이 지났다.
“히, 힘들어.”
“살려 줘!”
네르하의 수하들은 문자 그대로 피를 토할 정도로 교육에 시달렸다.
고위 마법사가 무려 백오십여 명이다.
그들이 각성한 고유 계통 일부가 겹친다 하더라도, 큰 틀로만 나누어도 무려 30종류가 넘었다.
하지만 네르하는 수하들에게 굳이 그들의 정수를 전수하게 시키지 않았다.
기초적인 활용법과 대응법만 추려서 속성으로 때려 박는 정도면 충분했다.
물론 이론만을 주입받는다고 전투마법사로서 실력이 느는 건 아니었지만.
이곳에는 실전에 가까운 모의전을 치러 줄 상대 역시 차고 넘칠 정도로 널려 있었다.
“당장 일어나!”
“이런 꼬라지로 마족들 앞에 서겠다고?”
“전보단 좀 나아졌다지만 아직 멀었다!”
“으으! 으으으윽!”
“엄마…….”
이곳은 최전방.
리브라 이상으로 유흥이나 취미생활과는 백만 광년 이상 먼 곳이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오로지 자신의 성장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 천국(?) 같은 환경에서, 네르하의 수하들은 괄목상대할 정도의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 * *
“축하한다, 바스톤.”
“감사, 합니다, 주군…….”
바스톤은 그 덩치에 걸맞지 않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이로써 확실하게 5레벨에 이르렀구나.”
“다 주군의 덕, 이죠.”
대답을 하는 바스톤의 양 뺨은 초췌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될 정도로 움푹 패여 있었다.
약 석 달 동안 이루어진 집중 성장 기간 동안, 네르하와 수하들은 전원 한 단계 이상의 진화를 이루었다.
고작 2레벨에 불과했던 알페온은 4레벨 후반대까지 올라왔고, 대부분의 수하들은 모두 5레벨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애초에 실마연의 상급생들은 전원이 5레벨에 근접한 실력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1학년인 배커와 바스톤이 벌써 5레벨에 이른 건 외부에서도 경악할 만한 성장이었다.
‘그나마 아직 4레벨인 알페온 역시 살아만 있으면 5레벨에 이르러도 이상할 게 없겠지. 애초에 시작점이 뒤처졌던 녀석이었으니.’
하지만 이들 중에서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이가 있으니, 그건 바로 네르하 본인이었다.
“네르하 도련님, 오늘 모의전은 몇 명으로 하시겠습니까?”
“가볍게 다섯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곧 준비시키겠습니다.”
처음엔 반발도 많았고, 또 항명도 많았지만.
이제 휘하 마법사단 중 네르하를 거스르는 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다르미안이 준비시킨 다섯 명의 마법사들이, 한 번에 마력을 집중해 유사 영역을 펼쳤다.
단순히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6레벨에 달하는 실력자들이 마력을 한데 모으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갖추어졌다.
네르하는 대번에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을 느꼈다.
‘중력 계열인가?’
지난 석 달 동안 네르하를 상대해 왔던 마법사들이 진절머리를 칠 정도로 싫어했던 것이 바로 네르하의 기동력이었다.
“이번엔 뜻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어지간한 방법으론 네르하의 발을 묶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그들은, 아예 마력을 합쳐 양으로 짓누른다는 선택을 했다.
까득! 까드드득!
회색빛을 띤 거대한 돔 형태의 영역.
‘여러 속성을 결합해 만든 게 아니라, 중력 계열 마법사 한 명에게 마력을 몰아줘서 힘을 증폭시켰군.’
거의 완성형에 다다르기 시작한 육체임에도, 뼈와 관절이 짓눌리는 느낌이다.
‘제법인데?’
확실히, 당할 때마다 해법을 바로바로 찾아오는 걸 보면, 저들이 라데우스 내부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들이라는 건 분명했다.
가주 직속의 백령대나 최정예 무력부대 다섯을 제외한다면 수많은 전투부대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간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 멀었지.’
이쪽의 기동성을 봉인하기 위해 힘을 합친 건 좋았지만, 문제는 이런 식의 합진은 자신들의 기동성도 봉인된다는 단점이 있다.
‘합진의 중심은, 저놈이군.’
분명 6레벨 후반대에 진입한 실력자.
그 정도는 되어야 같은 레벨 네 명의 마력을 감당할 수 있을 터.
“온다!”
“뭔가 특별한 걸 하려 하지 마! 괜히 변수만 만들어 준다!”
“오로지 하나로 승부를 본다!”
―그래비티 엣지!
네르하는 그 순간 사방팔방에 ‘중력의 창’들이 나타난 걸 알아차렸다.
중력 계열 영역 속에서 관통의 속성을 부여.
상대의 움직임은 봉쇄하면서도 도망갈 여지를 주지 않고 공간 채로 꿰뚫는다.
‘훌륭하다!’
겉으로 보면 그저 시야가 일그러지는 것으로만 보이기에, 오감을 발달시키지 않으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퉁! 퉁! 퉁! 퉁!
최소 수십 개 이상의 창이 날아온다.
이쪽의 사정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듯, 작정하고 목숨을 빼앗으려 드는 일격.
네르하는 그런 상대의 공격을 마치 미꾸라지처럼 돌파해 나갔다.
“무, 무슨 저런 움직임을?!”
“이런 중력 공간 안에서 어떻게 저런?”
중력이란 계통은 마법의 고유 계통 중에서도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
이 계통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다 보면 공간 조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만큼 그 파괴력과 특수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와는 그다지 상성이 좋지 않지.”
속성 통합이라는 고유 계통을 각성한 네르하였지만, 중력 자체를 다루는 술식을 익히진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고유 계통을 이용해 대지 속성의 마나를 끌어오면, 중력 마력에 대한 저항력을 갖추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무엇보다 중력 계열에는 강력한 카운터형 고유 마법이 있었다.
“막아! 대장을 지켜!”
“수십 개로 안 되면 수백 개를 던져!
“공간 자체를 틀어막아!”
네르하의 저돌적인 돌진에 마법사들은 기함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네르하의 발이 진의 중심을 잡고 있는 중년의 마법사에게 도달했다.
퍼억!
“꺽!”
나름 스마트한 인상의 마법사는 그대로 뒷목에 발차기를 얻어맞고 앞으로 쓰러졌다.
“대장!”
“아직 안 끝났어! 중심을 잡아!”
“그래, 아직 안 끝났지. 아직은.”
그들에겐 플랜 B나 C가 준비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미 네 명으로 줄어든 마법사들의 합진은 네르하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렇게 5분 뒤.
털썩!
마지막 남은 마법사가 기절하면서, 오 대 일의 모의전이 네르하의 승리로 끝났다.
“여전히, 자비가 없으시군요.”
“세드릭인가.”
한 달 전부터 네르하를 모셔온 세드릭 하이넨은 어느새 네르하의 기량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리버스 그라비티, 그걸 초소영역으로 펼치실 줄이야. 그 정교한 마나 제어 능력은 7레벨인 저라도 따라잡을 수가 없군요.”
“눈치챘나?”
“하루 이틀 본 게 아니니까요.”
세드릭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난 석 달 동안, 네르하는 단 한 번도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전투마법사단의 마법사들과 모의전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벌어진 모의전에서, 네르하는 단 한 번도 그들에게 패한 적이 없었다.
설사 그 상대가 다르미안이나 세드릭이라 하더라도.
“분명 술식의 구성 수준을 보면 절대 7레벨은 아닌데 말이죠. 실전에 강한 타입이시군요.”
그렇다고 떨어지는 마법의 실력을 다른 잡기로 메웠다면 이들은 절대 네르하를 따르지 않았을 거다.
“7레벨에 대해서도 슬슬 감을 잡아가고 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야.”
“네, 정말로 그럴 것 같아서 좀 무섭습니다.”
세드릭은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압도적인 마나 제어 능력에 더해 고유 계통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응용력. 그리고 그에 따른 다양한 범용성.
그나마 모자란 건 본신의 무력에 비해 떨어지는 술식의 구성 수준이었지만, 이마저도 수하들과 함께 수업에 참여하면서 빠른 속도로 단점을 메워 나가고 있었다.
‘괴물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성장 속도야.’
세드릭의 눈에 보이는 네르하 라데우스는, 천재의 범위를 넘어서 괴물의 영역까지 그 발을 들이민 존재였다.
6레벨의 마법사 다섯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이 정도라면 전투마법사치곤 이질적인 근접 전투를 선호하는 건 그다지 흠이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총사령관에게 또 요청이 왔습니다.”
“원정에 참가하라는 요청 말인가?”
“네, 이만한 전력이 3개월이나 놀고 있는데, 총사령관으로서도 꽤나 답답하시겠죠.”
“아직 전력이 모자라거나 하는 건 아닐 텐데?”
“슬슬 부침이 있다고 합니다. 마계 백작을 셋이나 처리했으니 당연한 일이죠.”
“제법 선전하고 있군.”
류레이아는 아스타로스에게 건네받은 자료를 토대로 마족들을 공략해 나갔다.
그 결과 예상치보다 피해를 훨씬 줄이면서 마계 백작 세 명을 마계로 되돌려 보낼 수 있었다.
‘녀석의 말대로라면, 되돌아간 마계 백작들은 못 해도 수백 년 동안은 중간계를 밟을 수 없게 된다고 했던가?’
중간계에서 피해를 입어 역소환당한 마계의 존재들은, 소환 유형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영구적으로 본신의 힘이 깎여 버린다고 한다.
자작급 이상의 존재라면 그 힘을 다시 보충하기 위해서라면 수백 년도 모자라다고.
“그러고 보니, 마지막 남은 마계 백작의 경우 제법 특이한 자라 하더군요.”
“특이하다?”
“휘하 세력에 마물이 아니라 인간들을 데리고 있다 합니다. 물론 인간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쓰레기들이지만요.”
경박하지만 나름 선을 넘지 않는 세드릭이 이런 식으로 말을 내뱉는 건, 단 하나의 경우뿐이었다.
“판데모니움인가?”
“네, 그중에서 가장 악질적인 암흑 교단의 광신도들입니다.”
“호오?”
네르하의 표정이 흥미롭게 변했다.
판데모니움이라 불리는 집단과는 꽤나 인연이 있었다.
가장 처음에는 리브라의 수여식에서, 두 번째는 그렌 타운에서.
그리고 세 번째로 이런 머나먼 북방에서 다시 만나게 생겼으니, 가히 하늘이 점지해 준(?) 인연이라 할 수 있었다.
“준비해. 오랜만에 그놈들을 다시 볼 수 있겠군.”
“녀석들이 좋아하겠군요.”
그때, 판데모니움이란 말에 가장 귀가 쫑긋한 이가 있었다.
“뭐야, 이번 상대는 그 쓰레기들이냐?”
“아, 배커 넌 예전에 흑마법사 하나를 상대한 적이 있었지.”
당시 배커는 네르하의 강압적인 요청으로 인해 흑마법사 하나와 싸운 적이 있었다.
“그렇지. 그땐 정말 천운으로 이겼다. 다시 붙는다면 내가 죽었을 테지.”
“그럼 지금은?”
네르하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배커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입술을 씰룩였다.
“압도적으로 쳐 죽일 자신이 있지.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마족에게 영혼을 팔아 레벨만 높인 쓰레기들이니.”
“음음, 옳은 말씀입니다, 배커 공자.”
세드릭은 물론 다르미안까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배커의 말에 동의했다.
흑마법사들이 마법계에서 저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마족에게 영혼을 대가로 막대한 양의 마기를 받아들이는 건 물론, 그 제어 역시 상당 부분 마족이 대신해 주니까.
이 세계 용어로 그걸 ‘쩔’이라고 하던가?
하여튼 그런 식으로 비정상적인 성취를 이루다 보니, 흑마법사들은 설사 8레벨에 이른 대마법사라 해도 그 실력과 업적이 상당히 폄하되는 경향이 있었다.
* * *
북방 어딘가에 지어진 거대한 흑색 신전.
협곡 사이에 교묘하게 가려진 이곳은, 거의 백수십 년도 전부터 판데모니움의 한 일파가 기거하고 있는 장소였다.
북방에서도 워낙 험난한 오지에 박혀 있어, 원주민들은 물론 그 카이젤조차 흔적을 찾지 못하고 돌아간 곳.
그곳의 중심에는 일파의 교황을 상징하는 검은 수단을 입은 마족 하나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마족을 향해, 역시 검은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 공손하게 엎드리며 입을 열었다.
“교주시여, 라데우스의 종자들이 움직이고 있다 합니다.”
“…….”
“위대한 분의 명령으로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은 지 벌써 몇 달째. 라데우스의 간악한 종자들은 벌써 세 명의 군주들의 목숨을 앗아갔나이다.”
“알고 있다.”
그다지 입을 열지 않는 자신의 주인은 나지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초에 이렇게 될 일이었지. 우리 모두는 비슈나르 님의 완벽한 부활을 위한 제물이었을 뿐.”
“교, 교주시여?”
“아스타로스는 그것에 반발한 모양이지만, 어차피 순리를 거스를 순 없다. 곧 이곳 중간계는 마왕 비슈나르의 완벽한 강림을 보게 될 테니.”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그는 옥좌의 받침대를 붙잡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도들을 모아라. 너희들의 목숨이 영원히 그분의 일부가 될 날이 머지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