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암흑 교단 (1)>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북방의 혹한 속.
거의 나신이나 다름없는 얇은 천쪼가리만을 걸친 클로이아가 손을 휘둘렀다.
휘이이익!
그 손짓에 호응하며 마치 거대한 태풍이 몰아치듯 눈보라가 춤추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이라면 1분만 밖에 있어도 얼음 동상이 되어 버릴 이 추위 속에서, 클로이아는 자신의 힘을 마치 춤을 추듯 다루며 한 시간 이상 눈보라를 제어해 나갔다.
“후우우…….”
어느새 푸르게 변한 입술에서 서리가 흘러나온다.
평소에는 눈동자와 머리카락만이 푸른색이었지만, 이번에는 눈썹과 입술, 그리고 손끝까지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다.
누가 보면 동상에 걸린 줄 알겠지만, 손끝 발끝까지 닿은 클로이아의 신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고 예리했다.
‘충만해.’
전신에 힘이 넘친다.
천지에 내려앉은 서리 속성의 마나가 자신의 힘과 공명하고 있다.
‘지금이라면 반푼이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어.’
간신히 호각을 유지하는 데 그쳤던 마계 남작 뮬란이라도, 지금이라면 압도적으로 깨부숴 버릴 자신감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짝짝짝!
“훌륭하구나.”
“할머니.”
클로이아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자신의 할머니이자 서리 일족의 족장인 엘로이아가 있었다.
“아무리 서리 일족이 추위와 함께한다 해도, 이런 수준의 냉기 속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건 일족 중에서도 바실리와 너 정도지.”
엘로이아가 자신의 손녀를 바라보았다.
“서리 군주. 그 특이한 고유 계통의 특성상 북방이 아닌 곳에서는 제대로 된 마나를 쌓기 힘들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썩 괜찮아 보이는구나.”
“기연이 있어서요.”
클로이아가 라데우스의 인질로 끌려간 지 10년이 넘었다.
그렇기에 개인적인 성취는 7레벨에 도달했음에도, ‘7레벨 마나 최약체’의 칭호를 얻게 된 건 이런 환경적인 특성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네르하의 도움으로 극음의 영약을 두 개나 먹고, 또 고향 땅인 북방의 한기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현재.
클로이아의 역량은 그야말로 레벨을 초월할 정도라고 볼 수 있었다.
“지금의 너라면 류레이아와 싸워도 충분한 승산을 점칠 수 있을 거다. 이곳 북방의 영지(靈地)에서 최대한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너와는 다르게, 세계수의 힘이 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류레이아의 힘은 상당히 제약되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거죠?”
“마왕에게 또다시 사자가 왔다.”
마왕이란 단어에 클로이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뻔하군요.”
“하지만 치명적이지. 우리가 돌아선다면 충분히 라데우스의 원정대를 괴멸시킬 수 있으니까.”
세력 면에서 라데우스 북방 원정대와 비교한다면 서리 일족의 전력은 1/10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재 전쟁에 협력 중인 전력의 규모만을 따졌을 경우고.
일족의 운명을 걸고 모든 여력을 끌어 쓴다면 그 비율은 무려 1/3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충분히 라데우스에게 비수를 꽂을 수 있는 규모가 되는 것이다.
클로이아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할머니. 아니, 족장님.”
“말하거라.”
“이곳에 돌아온 뒤로 전황을 좀 살펴본 결과, 아무래도 의심을 거둘 수 없는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만.”
클로이아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자신의 조모를 향해 적의를 띄웠다.
“북방 마왕의 강림. 이 일에 대해 할머님이 엮여 있는 게 아닌지요? 협조든 방관이든 어떤 것으로든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상식적으로, ‘만년빙정’의 계승자인 할머님께서 그걸 모를 리가 없으니까요.”
동방의 트리니티 렐릭, 서방의 세계수, 남방의 원초의 불.
그리고 북방의 만년빙정.
신화시대에서부터 내려온 이 초월적인 유물들의 특징은, 그 계승자가 적법한 영지에서 공명할 경우 신의 힘과 비견되는 권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에 있었다.
“여전히, 라데우스와 마족 세력을 저울질하고 계시는군요.”
겉으로 보면 네르하 라데우스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여전히 두 세력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었다.
“모든 건 일족을 위해서지.”
클로이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박쥐처럼 행동하시다간 두 세력 모두에게 버림받을 겁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힘이 없을 때의 일이란다.”
엘로이아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린 이 전쟁의 승자를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지. 그러니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쪽을 선택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그렇다고 보기엔 라데우스 측엔 거래를 제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후후, 그랬다간 카이젤이 와서 우리 일족을 모조리 멸족시켰을 거다.”
북방에선 신이나 다름없는 그녀라도, 라데우스의 가주인 카이젤만큼은 두려웠다.
“그러니 네가 잘 해 줘야지. 내가 마족의 손을 들어 주지 않게 하려면.”
“무엇을요?”
“그 아이와의 관계는 어느 정도나 진행되었느냐?”
화악!
대번에 클로이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아이.’
‘관계.’
이 단어의 뜻을 클로이아가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지, 진심이셨나요, 그 제안?”
“당연히 진심이지. 마법적인 계약 같은 걸 제외하면 혼인만큼 서로 간에 강한 구속력을 지닌 건 없단다.”
“그와 나의 나이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면서도요?!”
“네가 어린 쪽도 아닌데 뭐 그리 성을 내느냐? 결혼 상대가 젊고 팔팔하면 더 좋지 않으냐?”
“아, 아니! 제 취향은 좀 더 어른스럽고 저를 잘 리드해 주는 연상의……!”
열을 내던 클로이아의 목소리가 급속히 사그라들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는 자괴감이 급속도로 올라온 것도 있었고.
‘너 그런 취향이었니?’라고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조모의 시선 역시 감당하기 힘들었다.
“확실히 띠동갑 정도 차이가 나면 힘들긴 하다만.”
“그,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지.”
엘로이아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원래는 너를 아르바와 짝을 지어 주기로 했었단다.”
“뭐, 뭐라고요?!”
“시엘 대부인과 어느 정도 합의까지 갔던 사안이지. 너와 아르바가 같은 시기에 리브라에 들어간 것도 서로를 알아가며 안면을 틔우라는 의도였고.”
“아니!”
클로이아의 눈이 배신감으로 차오르려던 때였다.
“뭐, 우리라고 그렇게까지 사이가 틀어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지. 거기서 일부러 혼인을 밀어붙였다간 안 하느니만 못 하는 상황이 될 것 같아 파토를 내 버렸지만.”
“그, 그건 다행이네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단다.”
엘로이아의 머릿속에 금발을 탐스럽게 내린 한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겉으로 보기엔 마법사로 위장했지만 익숙하기 그지없는 황금의 마나를 다루는 존재.
라데우스의 적이지만, 어째서인지 북방까지 따라와 네르하와 가깝게 붙어 있는 ‘이물질’.
그 존재를 생각하면, 엘로이아가 이렇게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마왕의 사자는 이렇게 말했다. 북방의 원정대를 괴멸시키는 데 협력해 준다면, 경계도시 아르지엔을 기점으로 이북 전체를 서리 일족의 영역으로 인정하고 3천 년 동안 그 자치권을 인정해 주겠다더군.”
“……!”
“솔직히 그 제안이 끌리는 건 사실이지.”
“그건!”
“네르하 그 아이가 라데우스의 가주가 되어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는 약속보다도 더 빠르고 현실성이 있지 않느냐?”
마왕 정도의 존재가 허튼 약속을 남발할 리가 없으니, 저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니 너의 역할이 중요하단다. 적어도 내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정도의 이점은 가지고 올 수 있어야, 내가 그들의 제안을 뿌리칠 수 있을 테니까.”
“…….”
“그리 시간을 많이 줄 수는 없다. 마지막 마계 백작의 원정이 끝난 이후엔, 마왕 측에서 본격적으로 행동에 들어가겠지.”
그전까지는 답을 달라는 우회적인 발언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엘로이아가 신형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눈보라에 가려 조모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클로이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3개월 만에 재회한 류레이아가 네르하에게 말한 말이었다.
“뭐가 말입니까?”
“저놈들 말이야. 나름 자존심 빼면 시체인 애들인데 어느새 말 잘 듣는 어린애가 되었네?”
그 말뜻은, 저들이 이쪽 말을 듣지 않아 고생 좀 할 거라고 예상한 것이 아닌가?
네르하의 그런 시선을 알아들었는지,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흠흠! 아무튼, 빼놓았던 전력이 다시 합류하게 되었으니 한숨 돌렸어.”
“형님 누님들이 그사이 제법 활약을 하신 것 같더군요.”
“아아, 그렇지.”
류레이아의 한쪽 입 끝이 올라갔다.
“지금까지 네 공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말이지.”
지난 시간 처리한 마계 백작이 세 명이다. 당연히 함께 쓸려 나간 귀족급 마족과 일반 마족은 세기가 힘들 정도였다.
참모진에 있던 루드빅마저 전선에 나가 싸웠을 정도이니, 단순 공적으로 따지면 이제 네르하는 압도적으로 꼴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르바가 다른 형제들에게 적극적으로 공을 몰아주더라? 너희, 동맹 맺은 거 아니었나?”
“그렇긴 합니다만.”
북방 전선에서의 공적을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총사령관인 류레이아다.
그런 만큼 사전에 아르바와의 동맹을 통지하긴 했는데.
“애초에 너와 아르바의 공적 배분은 서로 협력한 부분에 있어서만 적용되는 거지. 녀석이 대놓고 이렇게 뒤통수를 때렸는데 어떻게 생각해?”
“딱히, 별다른 감흥은 없습니다만.”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애초에 저와 아르바 형님 사이에 신뢰 관계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아하하, 하긴, 그렇겠네.”
“그리고, 딱히 제가 뒤처졌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엘프 특유의 기다란 귀가 살짝 쫑긋거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가장 거물이 남아 있으니까요.”
네르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저를 애타게 부를 정도로 전력 부족을 겪고 있으신 듯한데, 당연히 다른 형제들의 전력이 너덜너덜하기 때문 아닙니까?”
물론 사망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격전을 통해 마나 고갈과 체력 부족 등이 도드라진 탓에, 원래의 전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 지경까지 간 게 아닐까 싶었다.
“역시 예리해.”
네르하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네르하가 전투 부대 두 개를 가지고 동면에 든 이후, 다른 직계들은 네르하의 공적을 넘어서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자신들의 전력을 혹사시켰다.
그 결과 마계 백작 셋을 처치할 동안 네르하를 확실하게 넘어섰지만, 그 대가로 휘하 부대의 전력은 큰 피해를 입고 쪼그라든 것이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적은 마계 백작 베드리우스가 이끄는 판데모니움의 일파인 암흑 교단뿐이야. 그리고 사실상 남은 적 중에서는 가장 세력이 열약한 놈들이지.”
“글쎄, 열약한지 아닌지는 붙어보면 알겠죠.”
광신도란 말을 들은 순간부터, 네르하는 절대로 적을 경시하지 않았다.
아무리 전력이 약해도 광신도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평가 이상의 의외성을 창조한다.
당장 그 천마를 섬기는 천마신교 놈들만 봐도 그랬으니까.
‘자기 모가지가 칼날에 뚫리는 와중에도 웃으면서 상대의 목을 맞찌르는 놈들이지.’
그런 놈들에게 눈으로 보이는 전력의 차이를 그대로 믿으면 안 되었다.
그때였다.
“총사령관님, 서쪽 전선에서의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지?”
“암흑 교단 놈들이 영역을 뛰쳐나와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류레이아의 표정이 황당하게 변했다.
“놈들의 숫자는? 그리고 거리는?”
“수는 약 500. 보고를 올린 직후를 기준으로 약 30분 후면 교전에 들어갈 거라 합니다!”
상대의 수준이 어느 정도는 모르겠지만, 마물 군대의 보조도 없이 쳐들어오는 500이라면 그리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다.
“미친놈들이 미친 짓을 하는 이유는 딱히 없지만, 왜 굳이 자기 영역을 뛰쳐나와 자살하러 오는지 모르겠군.”
류레이아가 네르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바로 출전해 줘야겠어. 현재 서쪽 전선이라면 지렌 장로가 직접 나가서 관리하는 곳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네, 그러도록 하죠.”
네르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느낌이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