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암흑 교단 (3)>
루시아는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볼 줄 알았다.
자신의 재능이 가문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가락 안에 든다는 걸 알았다.
그런 재능을 가졌음에도 나태를 경계하고 끊임없이 위를 향해 정진했다.
이런 대종사의 소질을 지녔기에, 루시아는 십 대의 나이에도 한 세대 위인 현 라데우스의 상위 직계들과도 경쟁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만약 ‘대공자’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리브라로 도망 온 순간, 가문의 추적자가 아닌 라데우스의 손에 의해 암살당했을 것이다.
리브라에 와서도 루시아는 끊임없이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았다.
본가의 어르신들이 지금의 루시아를 보았다면, 분명 시대의 명작이 될 소재가 망가졌다며 한탄했겠지만.
현명한 루시아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이, 같은 시간 동안 검의 낙원에서 수행했을 자신보다 두 배는 강할 거라고.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추월해 저 멀리 날아가고 있는 ‘네르하’의 존재 덕분이었다.
그녀는 가끔씩 생각했다.
‘만약 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많은 이들이 예상하는 것처럼 되지 않았을까?
융합의 경지에 대한 갈피를 잡기 위해 세월을 축내며 허우적거리다가.
‘결국엔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망가졌겠지.’
하지만 네르하를 만나면서, 루시아의 인생은 바뀌었다.
처음엔 알페온의 귀찮은 추파를 뿌리치기 위해 이용했던 인연이었지만, 지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저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뭘까?’
재능이란 영역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최초의 또래.
대공자야 재능보다는 ‘어느 무언가’에 얽힌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으니 제외.
하지만 루시아가 주목한 건 재능만이 아니었다.
네르하에겐 미숙한 자의 특징인 ‘치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평소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절대 그 나이대의 소년, 청년들이 보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자신보다 연하라는 점을 자꾸 잊게 된다.
‘가주님께서 젊었을 때의 모습이 딱 저랬을까?’
항상 자신보다 위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손을 붙잡고 위쪽을 향해 ‘이끄는’ 자.
‘많이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직도 멀었다.
네르하가 서쪽에 불길한 느낌이 든다며 뛰쳐나간 이후.
뛰쳐나간 네르하의 속도와 맞출 수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없었다.
“주군의 저런 모습을 보자면 지금까지 제가 한 노력은 뭐가 되나 자괴감이 듭니다.”
“바스톤.”
“리브라에 들어오고 평생을 통틀어 이만큼 구른 적도 없었는데 말이죠.”
바스톤의 쓴웃음에 몇몇이 동조했다.
몇 달 전만 해도 곰 같은 덩치를 자랑하던 바스톤은 최근 그 몸집이 꽤나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그에 대비해 근육과 육체의 밀도는 빈틈을 찾기 힘들 정도로 단단해졌다.
바스톤이 과거의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건, 그를 아는 자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뭐, 불평은 여기까지. 우리 중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하시는 만큼, 이 이상의 불만은 항명이겠죠.”
루시아는 그 말에 실소를 내지었다.
확실히 지난 한 달 동안 네르하를 관찰하면서, 루시아는 네르하가 하루 2시간 이상 자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줄곧 백여 명에 달하는 전투마법사들에게 시달려 왔지만, 사실 그들에게 가장 시달린 건 다름 아닌 네르하 본인이었다.
마법사들은 가르치는 건지 윽박지르는 건지 모를 정도로 네르하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네르하는 단 한 번도 싫은 표정을 한 적도 없었고, 그들의 모든 살인적인 커리큘럼을 소화했다.
한 달 동안 기지에 박혀 있던 전투마법사단이 네르하의 충직한 수하처럼 돌변한 것도, 실력과 재능만이 아니라 위에 서는 자로서의 역량을 제대로 보여 줬기 때문이겠지.
“잡담은 그만. 이러다가 주군이 적들 한가운데 고립될 수도 있다.”
뒤따라오던 디센트 맥퀸이 일행을 재촉했다.
지금 상황은 어디까지나 네르하의 속도에 맞추지 못해 뒤처진 상황.
주군의 눙력에 맞추지 못해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수하로서 그만한 치욕도 없었다.
“네, 이번에야말로.”
바스톤과 루시아의 표정이 깊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은 과거 검왕 베하나스의 습격 당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던 처지를 비관했다.
두 번 다시 그런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가?
* * *
“방심하셨군요, 장로님.”
“이, 인정하지. 저렇게 몸을 사리지 않는 마족놈들이 실제로 존재할 줄이야.”
본래 마족들은 중간계에서는 죽음의 개념에서 자유롭다.
본체가 마계에 존재하는 만큼, 중간계에서 치명상을 입어도 영혼이 마계로 돌아가는 역소환으로 끝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족들은 함부로 몸을 굴리진 않는다.
중간계에서 타격을 받아 역소환이 되면, 일정 부분의 힘을 영구적으로 상실한다는 커다란 페널티를 받게 되니 말이다.
“킥킥킥킥!”
“킥킥킥!”
지성이 존재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놈들은 미친놈처럼 웃으며 지렌과 네르하를 둘러쌌다.
네르하는 그런 놈들을 찬찬히 살펴보다 확실하게 결론을 내렸다.
“역시 그렇군.”
“뭐, 뭐가 말이냐?”
지렌의 물음에 네르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것들, 놈들이 아니라 ‘놈’입니다.”
“뭐, 뭣?”
“한 영혼이 여러 육체를 조종하는 군체 마족. 분명 문헌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요.”
“킥킥킥! 정답이야!”
“궁금하네, 어떻게 맞췄지?”
상대는 네르하의 말을 긍정했다. 하나같이 얼굴이 다 다르게 생겼음에도 군체라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있다.
“마기의 색.”
놈들의 입이 대번에 다물어졌다.
“마기는 기본적으로 검은색을 띠지만, 개체마다 아주 미세하게 색의 차이가 있지. 너희 같은 경우는 모두가 갈색의 마기를 품고 있군.”
“우리 모두가 나선 것도 아닌데, 그걸 알아차렸다고?”
놈의 말투가 대번에 진지해졌다.
역시 낄낄거리면서 상대를 대했던 건 어디까지나 가면을 쓴 것이었나?
네르하는 일부러 이죽거리는 미소를 만들었다.
“그냥 보이니까.”
실은 마기를 다루는 숙련도가 높아지다 보니 나타난 현상이었지만,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너희의 수준이 낮은 걸 나보고 어쩌라고?”
쌔액!
네르하는 기습적으로 날아온 단검을 가볍게 피했다.
대답 대신 날붙이가 날아오는 걸 보면 도발이 적절하게 먹혀든 모양이다.
“이름을 대라, 인간.”
“네르하 라데우스.”
“아아, 들어봤어. 그 화냥년의 손에서 살아남은 놈이라고 했던가?”
아스타로스의 이야기는 마족들 사이에선 꽤나 유명해진 모양이었다.
가장 가운데 있던 놈이 마치 가면을 쓰듯 손바닥을 뻗어 얼굴을 덮었다.
“마계 자작, 단탈리안. 암흑 교단의 추기경이다.”
“킥킥킥킥!”
“킥킥킥킥!”
놈들이 다시 광대처럼 쪼개기 시작했다.
‘마기가 실린 단검이라.’
10여 명에 이르는 군체들이 다루는 단검은 확실히 위협적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라데우스의 장로인 지렌이 당할 정도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 조심해라 네르하. 놈들은 마력 방어를 무시하고 움직임을 속박하는 괴이한 힘을 쓴다.”
그야말로 암살에 최적화된 유형.
암흑 교단의 음습함에 더없이 어울린다 할 수 있었다.
쌔액!
열 명의 군체들이 네르하를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분명 지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대응했겠지.’
어느 방향에서 들어오든 접근을 막기 위해 공간 자체를 쓸어 버렸을 것이다.
“엘리멘탈 볼텍스.”
일점 형태로 쏘아지는 레이저가 아닌 스프레이 형태로 갈라지는 광범위 포격.
메모리 스텍으로 저장해 놓았던 첫 번째 마법이 펼쳐졌다.
“킥킥킥킥!”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식으로 정직하게 뻗어가는 공격을 마계 귀족이나 되는 놈이 맞아줄 리가 없다.
그렇기에, 메모리 스텍에 저장된 두 번째 마법을 펼쳤다.
“버스트.”
“킥?”
콰과과과광!
엘리멘탈 볼텍스의 연계형으로 한 번 쏘아진 마법을 일정 시점에 폭발시키는 수법.
첫 일격을 피해 의기양양하던 단탈리안은 갑자기 사각에서 튀어나온 폭발에 휘말리고 말았다.
전방의 시야가 폭발로 인해 생긴 안개에 가려지던 상황.
‘이런 가벼운 인사치레에 당할 리는 없겠고.’
아니나 다를까, 분노에 가득 찬 단탈리안 군체들이 연기를 뚫고 다시금 네르하에게 달려들었다.
‘거리를 내줬다면 방어막을 펼치거나 발을 묶었겠지.’
지렌의 역량이라면 둘 다 시도했겠지만, 아직 네르하의 순수 마법 실력은 그 정도까지 이르진 못했다.
“배리어.”
네르하의 전방에 두툼한 무형의 방어막이 생겨났다.
적들이 그 방어막에 막혀 발이 주춤거리는 사이, 네르하는 마지막 메모리 스택을 소모해 다시 한번 엘리멘탈 볼텍스를 캐스팅했다.
그때.
“킬킬킬킬!”
“똑같아, 똑같아!”
“저 노인보다도 훨씬 쉬워!”
단탈리안의 본체, 혹은 지휘 개체로 보이는 놈이 무언가 손을 흔들었다.
파앙!
그러자 손아귀에 모인 마나가 풍선 터지듯 흩어졌다.
‘산공독?’
네르하의 눈이 작게 일그러졌다.
‘아니, 독 같은 거에 당한 기색은 없었어. 애초에 그런 유형이 아니야.’
뽑아낸 마나만 흩어졌을 뿐, 체내의 마나는 여전히 네르하의 제어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지렌 장로가 당한 게 이거로군.’
거리가 멀 땐 일부러 당하는 척하다가,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마나를 역행시켜 마법사를 당황에 빠뜨린다.
“마나 역행, 이게 네놈의 권능인가?”
마나를 외부로 분출하여 사용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천적.
“늦었어, 늦었어!”
“너도 저 늙은이와 똑같이 만들어 주마!”
수 미터 앞까지 접근한 군체들이 즐거운 비명을 내지른다.
“미안하지만.”
퍽!
퍼퍽!
퍽퍽퍽!
한 번의 몸놀림에 네르하에게 덤벼든 십여 개체의 군체들이 모조리 나가떨어진다.
“……?!”
열 개의 군체 중 두 개체의 목뼈가 꺾였고 세 개체의 심장이 뚫렸다.
나머지는 먼저 죽은 놈들보다 뒤늦게 달려든 탓에 목숨을 건졌지만, 얼굴을 보면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네놈이 마법사의 천적이라면.”
무너져 내린 다섯 마리의 시체들 사이에서.
네르하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굽어졌다.
“난 네놈의 천적이겠군.”
* * *
마기를 쓸 필요도 없다.
복잡한 마법을 쓸 필요도 없다.
기사들의 오러 블레이드조차 저놈의 앞에선 평범한 철검으로 전락할 테지만.
상관없다.
저놈의 수법은 절대로 이쪽을 무력화할 수 없으니까.
“이, 이놈이!”
단탈리안은 다급하게 수인을 맺어 권능을 발현시켰다.
그러자 쓰러졌던 군체들이 마치 모래 입자처럼 변해 단탈리안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그 입자들은 다시 마족의 형상으로 변해 다시금 군체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과연, 본체를 찾아 죽이지 않으면 장기전에서도 우위를 점한다 이건가?”
일반적인 마계 영역 특유의 물량 공세는 없지만, 강자와의 일대일에선 확실히 치명적이다.
‘여기서 죽여야겠군.’
그 생각은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확실하게 죽여 주마!”
이번엔 가면을 쓸 여유도 없는지 그 기분 나쁜 웃음은 내보이지 않았다.
파파파팟!
단탈리안의 군체들이 일제히 마기 단검을 발출했다.
검은 실선이 시야를 가득 메우며 퇴로를 차단하고.
그대로, 네르하의 전신에 구멍을 뚫기 위해 쇄도하려던 찰나.
“말했잖나, 난 네 천적이라고.”
카가가강!
수십 자루의 마기 단검은 네르하의 피부를 뚫지 못했다.
오히려 강철의 벽에 가로막힌 듯 허무하게 튕겨져 나갔다.
“……아?”
단탈리안이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벌어진 현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 잠깐 사이의 딜레이 동안, 그는 네르하가 자신의 본체에게 다가오는 걸 허용하고 말았다.
“혹시 모르니 확실하게 죽여 주지.”
단탈리안의 대사를 그대로 따라한 네르하는, 그대로 삼십육방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종남파의 천하삼십육검을 기초해, 전장에서 다수의 적을 타격하기 위해 창안한 초식.
네르하의 주먹이 군체들의 마핵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꿰뚫었다.
“네놈과 좀 더 진득하니 싸워 보고 싶었는데 아쉽군.”
마핵이 뚫린 단탈리안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노옴!”
“빨리 잡아야 할 거물이 있으니 어쩔 수 없나.”
“어, 어떻게, 모든 군체를 한 번에 공격할 생각을 했지?”
딱 봐도 본체 같은 놈이 있었지만, 네르하는 그것 자체가 위장일 거라 판단했다.
“당연히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지.”
단탈리안은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단 한 명의 군체만 남아 있었어도, 단탈리안은 완벽하게 부활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르하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일격에 모든 군체를 꿰뚫어 버렸다.
“……원통하다.”
털썩!
그 말을 끝으로, 마계 자작 단탈리안의 신형이 고꾸라졌다.
지금껏 군체의 특수성과 마나 역행으로 수많은 인간 강자들을 암살해 왔던 암흑 교단의 추기경, 단탈리안이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