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베드리우스 (1)>
“킬킬킬…….”
“킬킬…….”
단탈리안의 다른 군체들 역시 힘없는 웃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화악!
네르하는 불꽃을 일으켜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끝냈다.
그리고 여전히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지렌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대, 대단하군. 저만한 존재를 대번에 척살하다니.”
7레벨 후반대의 마법사인 지렌조차 군체라고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던 존재였다.
그런 귀족급 마족을 이렇게 쉽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자, 지렌은 지금의 네르하가 정말로 생소하게 보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재능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던 아이였거늘.’
그렇기에 기대를 접었고, 그 후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최근 들어 눈부신 활약을 하긴 했지만, 그걸 직접 보진 않았으니 본인의 힘보다는 수하들의 덕을 봤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빨리 후방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렌의 상처를 살핀 네르하가 살짝 인상을 썼다.
마기가 하필 복부를 타고 제대로 침입한 탓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면 후유증이 크게 날 수도 있었다.
“크으음! 확실히 상처가 생각보다 심각하구나.”
지렌 역시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 최고지휘관이 멋대로 후퇴하면 사기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네르하야.”
“네, 장로님.”
네르하를 바라보는 지렌의 눈빛에, 결의가 나타났다.
“현재 이곳 전선에 투입된 방위군은 내 직속 전투마법사단 2개, 총인원 180에 더해 일반군 5천이다.”
물론 암흑 교단 놈들의 자폭 공격에 휘말려 1/4가량이 전투 불능이 되었다지만, 지금도 충분히 한 전선의 일각을 맡을 대군이라 할 수 있었다.
“네가 한번 맡아 보겠느냐?”
“……!”
“빨리 결정해야 할 거다. 지금 나타난 놈들은 어디까지나 모루야. 이제 곧 망치가 올 거다.”
지렌은 대담하게도 네르하에게 지휘권을 넘기려 하고 있었다.
지렌 정도의 위치라면 당연히 지휘권을 이어받을 부관이 있을 텐데도!
난데없이 던져진 기회였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맡겨 주신다면.”
“좋다.”
지렌은 자신의 품에서 라데우스의 장로 직위를 상징하는 패를 꺼내 네르하에게 건넸다.
“이제부터 네가 서쪽 전선의 사령관이다.”
“삼가 받들겠습니다.”
네르하가 패를 공손히 받아들던 때.
“네르하 도련님!”
전투마법사단의 단장인 세드릭과 다르미안이 가장 먼저 네르하를 따라잡았다.
“때마침 잘 왔군.”
“하다못해 부하들과 함께 움직이시…… 헉! 지렌 장로님?!”
그들은 중상을 입은 지렌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지렌은 두 사람을 향해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주군의 싸움이 끝나고서야 나타나다니, 내가 자네들을 잘못 봤군.”
“아, 아니. 수하들이 집결하기도 전에 달랑 말 한마디 날리고 사라지셨는데 그걸 어떻게…….”
“닥치게. 변명이 추하군.”
세드릭과 다르미안은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
서쪽 전선이 이리 갑자기 습격받을지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우리도 나름 최대한 수습해서 따라온 건데!’
두 사람이 억울해하든 말든, 지휘권을 넘겨받은 네르하가 나지막하게 명령을 내렸다.
“하이네의 인원 중 5명을 추려서 장로님을 본진으로 이송해라.”
“아, 알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따라서 진지 중앙으로 가 상황을 수습한다. 곧 이곳에 마계 백작이 찾아올 거다.”
“마계 백작이라면.”
“베드리우스!”
검은 성자, 베드리우스.
마지막 남은 마계 백작이자, 다른 백작들과는 달리 기존 암흑 교단 교황의 육체를 빼앗아 강림한 인물이었다.
“전투보다는 방어 진지를 다시 구축하는 데 신경 쓰도록.”
“명을 받듭니다!”
두 사람이 지팡이를 들며 우렁차게 외쳤다.
그 모습을 본 지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후퇴하지 않고 잡을 생각인가?”
네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곳 진지를 다시 탈환하려면 많은 힘이 들 겁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잡는 편이 낫습니다.”
“으음, 제대로 된 지휘가 이루어진다면 가능하겠지만…….”
지렌은 네르하가 상황을 수습해 후퇴하는 걸 염두에 두고 지휘권을 넘겼지, 이렇게 맞서 싸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네르하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지렌을 직시했다.
“한번 믿음을 주셨으면 끝까지 절 믿어주십시오. 장로님의 이름으로 이 전투를 승리로 바치겠습니다.”
“허허허.”
아무리 지휘권을 넘겨받았다곤 해도 마계 백작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자기 부하들이 네르하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오는 이상, 끝까지 믿어 볼 수밖에 없었다.
“좋다. 내 너를 끝까지 믿어 보마.”
* * *
지렌이 후방으로 호송된 후.
네르하는 두 사람과 함께 진지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창 마법사들 사이에서 지시를 내리고 있는 중년의 마법사가 보였다.
“그대가 지렌 장로님의 부관 그란드 데니시온인가?”
“그렇습니다. 그쪽은 네르하 도련님이시군요.”
“지렌 장로님께 지휘권을 양도받았다. 이제부턴 내가 지휘하도록 하지.”
장로패를 꺼내 내밀자 부관 그란드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장로님께서 정말로 도련님께 지휘권을 맡겼단 말입니까?”
“내가 감당 못 할 거짓말을 칠 이유가 있나?”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닥치고 내 지휘를 따라라. 거부한다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그 말에 그란드의 얼굴에 대번에 불만이 일어났다.
“당신이 내게 말입니까?”
장로의 부관이란 말은 라데우스 내에서 설사 직계라 할지라도 쉽게 대하지 못할 지위에 있었다.
그런 만큼 그란드의 저런 태도는 나름 이해가 되긴 했다.
물론 네르하는 납득하지 못했지만.
“세드릭, 다르미안.”
“네.”
“명령을 내리십시오.”
네르하가 그란드를 향해 차갑게 일갈했다.
“이놈을 죽여라. 전장에서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부관은 필요 없으니까.”
“아, 아니 무슨?!”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며 마력을 내뿜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란드가 두 사람보다 조금 앞서 있는 마법사라 해도, 둘을 모두 감당할 정도의 실력자는 절대로 아니었다.
“아, 아직 전투 도중입니다! 그런데 다짜고짜 아군을 죽이라니요?!”
네르하의 말은 여전히 차가웠다.
“넌 지렌 장로님의 부관이면서 정작 장로님의 권위를 이어받은 날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지. 또 오히려 전투 도중이기에 지휘계통의 빠른 안정화를 위해 처형하는 것이다.”
“크, 크윽!”
부하들은 지렌의 장로패를 꺼내든 네르하에게 덤벼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깨달은 그란드는 대번에 태도를 바꾸었다.
“따, 따르겠습니다! 네르하 도련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제 실수를 용서해 주십시오!”
쿵!
비굴한 모습이긴 했지만 현실적인 태도이기도 했다.
그란드의 힘은 지렌의 권위에서 나오지만, 정작 그 지렌의 권위를 가장 크게 업은 것이 바로 네르하 본인이었으니까.
“두 번은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란드를 제압한 네르하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일반병을 물리고 전방의 마법사들을 투입해라. 살로페는 전방 지원을, 하이네는 진지 복구에 주력해라.”
“네! 사령관님!”
“하이네 1, 3, 5조는 후방 부상자들을 본진으로 옮겨라. 4조, 7조는 무너진 방어 술식을 복구하도록. 10분이면 충분하겠지?”
네르하의 명령이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살로페 1조에서 5조, 병사들이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도록 전방 방어를 맡아라. 살로페 나머지 조는 기존 마법사단과 위치를 교체. 교체된 마법사들은 전부 후방으로 돌려 휴식을 취하게 해. 얼마 후면 또 전투가 이어질 거다.”
네르하의 지시는 상황에 알맞게 이루어졌고, 마법사들은 군말 없이 일사불란하게 지시에 따랐다.
“포션과 구급약 상자를 저쪽으로 옮겨! 하이네 2조는 동서쪽 폭발로 일어난 크레이터를 메워라. 저걸 내버려 두면 방어선이 복구되어도 빈틈이 생긴다.”
“네!”
“살로페 6조! 마물들이 들어오는 후방을 향해 포격을 날려! 후퇴하는 병사들의 전열이 흐트러지고 있다!”
지휘계통이 확립된 지렌 휘하 라데우스 서쪽 방위군은 마물들의 군세를 밀어내고 방어선을 복구해 나갔다.
그걸 곁에서 지켜보던 그란드는 정말로 지휘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네르하를 보며 경악했다.
‘가장 급한 부분부터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어린놈이 이런 판단을?’
역사적으로 지휘 경력도 없는 낙하산이 군을 이끌다가 대차게 말아먹은 경우는 심상치 않게 존재했다.
그렇기에 그란드는 이제 막 스물 언저리에 불과한 데다, 변변찮은 지휘 경험도 없는 네르하에게 불신을 표한 것이었다.
“굉장하군. 이 정도 속도면 한 시간 안에 진지를 복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네르하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 중인 세드릭과 다르미안 역시 이 사실을 잘 느끼고 있었다.
다르미안은 대지 마법으로 참호를 파내는 와중 이렇게 말했다.
“다른 직계들의 지휘보다도 능숙하다. 이건 재능의 영역이 아니야.”
“그럼?”
“저분은, 전쟁을 아는 분이다.”
세드릭은 다르미안의 말에 침묵했다.
이건 사실상 긍정을 뜻했다.
“어떻게?”
다르미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야 나도 모르지.”
전쟁을 경험해 보지도 않았을 이가, 어떻게 경험으로만 얻을 수 있는 지휘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가?
두 사람은 이 점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 * *
“아무래도 단탈리안이 실패한 것 같습니다.”
“…….”
“적들의 진지가 복구되는 속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우두머리를 암살하는 데 실패한 모양이군요.”
저 멀리서 라데우스의 진지를 바라보던 십여 명의 인영.
그 중심에 있는 마계 백작 베드리우스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지휘관이 바뀌었다.”
“헉! 그러면 단탈리안이 성공했단 말씀이십니까?”
“그건 모른다. 단탈리안의 링크가 끊겼으니 성공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중상 정도는 입힌 것 같군.”
그 말에 추기경 복장을 걸친 마족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다면 바로 공격을 개시하시겠습니까? 우두머리가 없다면 놈들은 베드리우스 님의 신위를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글쎄? 오히려 더 힘들어졌을지도 모르지.”
베드리우스의 부정적인 말에 수하들이 당황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바뀐 지휘관이 오히려 더 능숙하게 무리를 이끌고 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상황이 좋지 않게 변했군.”
베드리우스는 서쪽 방위군을 관찰하며 지렌의 스타일을 이미 파악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교체된 새로운 지휘관은, 오히려 지렌보다도 지휘 면에서는 한 수 위에 있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우리가 할 일은 변함이 없다.”
베드리우스가 손을 들었다.
“나머지 교인들을 모두 출격시켜라. 그리고 너희는 영역을 펼쳐 권속들을 소환해 군세를 모아라. 양면으로 놈들의 진지를 공략한다.”
“베드리우스 님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따로 움직이지.”
어째서인지, 베드리우스의 입가에 자그만 미소가 맺혔다.
“저쪽의 새로운 우두머리를 없애겠다.”
뭐가 됐든 머리부터 쳐내면 전쟁이 유리해지는 건 고금불변의 진리였다.
베드리우스의 시커먼 안광이 라데우스의 진지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