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마왕령 (3)>
자신이 아껴먹던 위스키를 강탈당했음에도, 바멜은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했다.
“마왕이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 이걸 봐라.”
위스키를 잔에 따른 아르바가 허공에 손가락을 내저으며 술식 하나를 구성했다.
“이, 이건!”
그렇게 발현된 술식의 정체는, 특정 장소의 광경을 그대로 찍어 낸 사진들이었다.
“내 수하들이 현 마왕령의 상황을 보고 기록한 것들이다.”
그 사진을 본 세티안이 경악했다.
“하지만 마왕령은 분명!”
“그래, 지금까진 마기로 인한 재밍 때문에 그 내부를 관찰하는 게 불가능했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말씀입니까?”
바멜의 물음에 위스키를 한입 머금은 아르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뭐, 중요한 건 재밍이 풀렸다는 게 아니라 여기 보이는 이것이다.”
아르바가 가리킨 곳에는 무언가 검게 타오르는 듯한 거대한 꽃봉오리 하나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꽃봉오리를 본 바멜과 세티안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꽤, 커 보이는군요.”
“인간 사이즈는 절대 아니야.”
두 사람이 본 꽃봉오리의 크기는 못 해도 직경 10m 이상.
저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절대로 범상치 않을 거란 건 느낄 수가 있었다.
아르바가 느긋한 어조로 꽃봉오리의 정체를 밝혔다.
“마왕이다.”
“네?!”
“마왕 비슈나르. 그가 저 안에서 우화를 준비 중이지.”
“설마, 마신강림 프로젝트?”
“잘 아는군. 역시 라데우스의 직계답구나.”
어째서 아르바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본래라면 이 사실을 따졌어야 했지만, 공적에 눈이 먼 두 사람은 그 사실을 깊게 따지지 않고 현재 상황에서의 이득을 재었다.
“이젠 숨길 필요도 없다는 건가?”
“저 안에 존재하는 게 마왕이고, 만약 제대로 된 육체를 얻게 된다면?”
“끝장이지. 적어도 북방 원정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거다.”
“그 전에, 저걸 처리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공적을 날로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 그들의 행복 회로에 찬물을 끼얹은 존재가 나타났다.
“난 반대야.”
“레티안.”
지금까지 별다른 반응 없이 방관하던 레티안이 입을 열었다.
“우리끼리 단독 행동을 한다면 분명 항명죄가 크게 적용될 거야. 라데우스 가문은 어떤 공을 세워도 규율을 어지럽히는 이는 절대 용서하지 않아.”
“그,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
“거기다 재밍을 풀었다는 게 무슨 의미겠어?”
레티안이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아르바를 노려보았다.
“전력에 자신이 있으니까 들어오라고 도발하는 거야. 어설프게 들이박았다간 공략은커녕 마물들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
그 말은 즉.
“아르바 오라버니가 우리를 방패막으로 삼아 공을 독식하겠다는 계략으로밖에 들리지 않아.”
“예리한 추리구나, 우리 동생아.”
짝! 짝!
“합리적인 의심이지. 그럼 이제 그 의심을 풀어볼까?”
“어떻게 말이죠?”
아르바는 다리를 꼬며 오만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 우리가 단독행동에 들어가자는 건 맞지만, 그건 전군이 마왕령 공략에 들어간 시점에서 시작된다.”
아르바가 술식을 그려 지도 하나를 띄웠다.
“마왕령의 크기는 약 직경 5km 정도. 당연한 말이지만 최소 서너 방향으로 나뉘어 공략에 들어가겠지.”
“그래서요?”
“그렇게 되면 중요한 건 당연히 누가 먼저 마왕에게 도달하느냐가 되지 않겠느냐?”
삑!
아르바가 손가락을 튕기자, 지도에 길고 꾸불꾸불한 적색 선이 새겨졌다.
“이건?”
“마왕령 중심부까지 들어가는 가장 빠르고 가장 안전한 루트지.”
“……!”
“내가 북방 사령관으로 있을 당시 맵핑해 둔 것이다.”
그것을 본 바멜과 세티안의 탐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냉철한 레티안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 루트의 신뢰성은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마왕령 본진에는 수많은 마계 귀족들이 있을 텐데? 마왕을 죽인다 해도 우리 전력을 전부 녹여 버린다면 본말전도예요.”
“그것에 대한 답은 한꺼번에 해 주지.”
아르바는 고개를 돌려 문 바깥쪽을 향해 외쳤다.
“들어오십시오.”
뚜벅, 뚜벅!
막사 안으로 지팡이를 든 한 노파가 들어왔다.
그 노파의 정체를 확인한 직계들은 눈을 부릅뜨며 입을 벌렸다.
“다, 당신은!?”
“어째서 여기에…….”
직계들의 경악을 즐기면서, 노파가 입을 열었다.
“허허허, 이 노파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한 손 거들어도 되겠나?”
서리 일족의 족장, 엘로이아 블루벨벳이 직계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 * *
그렇게 전선 어딘가에서 검은 음모가 피어나려고 하던 그때.
“다들 고생했다.”
본진으로 돌아온 네르하는 수하들을 모두 불러 모아 그들의 선전을 치하했다.
“특히 루시아와 바스톤. 너희들은 일대일로 마계 귀족들을 처리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어. 그중에서도 바스톤, 너는 기대해도 좋다.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운 만큼 페레이라 가문에 큰 혜택이 돌아갈 테니까.”
“…….”
“…….”
“디센트와 다른 녀석들은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자. 마법적인 경지는 너희가 이 둘보다 높을지 몰라도 종합적인 전투력 면에서는 아직 많이 모자라니까.”
“…….”
“…….”
“클로이아도 아쉬울 텐데 고생 많이 했어. 이번엔 크게 활약하지 못했어도 이제 곧 마왕령 공략이 시작되니 만회할 기회는 충분하겠지. 루시아 너는 곧 세드릭 녀석과 실전 대련이 있는 만큼 철저한 준비를…….”
“저기, 주군.”
현재 상황을 보다 못한 바스톤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며 총대를 멨다.
“왜 그러냐, 바스톤?”
“주군께서 저희들을 격려해 주시는 와중에 매우 송구합니다만.”
바스톤의 손가락이 네르하의 뒤를 넘어 어느 구석을 향했다.
“저건, 대체 뭡니까?”
그 순간, 수십 쌍에 달하는 눈동자가 바스톤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
―흐아아암!
기다랗지만 앙증맞은 입이 하품을 내뱉는다.
지금까지 줄곧 저 존재를 모른 체해 왔던 네르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심심하구나, 인간. 그 허례허식은 대체 언제 끝낼 것이냐?
“대, 대체 저건 뭔…….”
바스톤이 황당한 시선으로 하품을 하는 ‘헤츨링’을 바라보았다.
아니, 헤츨링이라고도 부르기 힘들 정도로 매우 작은 ‘블랙 드래곤’이었다.
마치 미니어처를 연상시킬 만큼 자그마한 그 용은, 천천히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와 네르하의 어깨에 착지했다.
―왜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네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벌써 잊었느냐?
“…….”
―말 좀 해 봐라, 인간. 이 이자카르 님께서 네게 묻고 있지 않느냐?
“이, 이자카르?!”
이곳에 있는 대부분은 이자카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네르하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클로이아만이 기함을 토해 냈다.
하지만 놀라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뭐야,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자연스럽게 문을 젖히며 나타난 검은 머리의 소녀.
수하들이 그 소녀를 목격한 순간, 진정한 혼돈이 찾아왔다.
“아, 아, 아!”
“아스타로스!”
붉었던 머리카락이 검게 변했고, 두 뿔은 사라지고 인간처럼 변했지만.
명색이 마법사라는 인종들이 상대의 겉모습이 조금 변했다고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대번에 수하들의 적의가 하늘을 찔렀고.
약 한 달 만에 네르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아스타로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야, 아직도 말하지 않은 건가?”
“일단, 너의 존재는 나와 총사령관만 알고 있었다는 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군.”
그 외의 존재라면 루시아 정도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경우이니 예외로 하고.
“모두, 적의를 거두고 자리에 앉아라.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해 주도록 하지.”
네르하는 이마를 짚으며,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아스타로스의 경우엔 언젠가 밝힐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자카르의 존재는 네르하로서도 전혀 예상 밖의 변수였다.
“그래서, 그 이자카르라는 마족의 영혼이 주군의 아티펙트에서 사역마 같은 형태로 발아했다는 겁니까?”
“완전히 같은 건 아니지만 기본적인 개념은 비슷하다더군.”
그나마 다행인 건 이자카르의 영혼 파편이 네르하에게 완벽하게 종속되었다는 점이다.
“에고 아티펙트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하필이면 마족의 영혼이라니…….”
많은 부하들이 이자카르가 가져다줄 변수를 걱정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비슈나르를 제거할 때까지는 확실하게 협력할 테니까.
“그럼 그 이후는 어쩔 생각인데?”
―음,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다만?
……이걸 믿어도 될까?
네르하가 짜게 식은 눈으로 이자카르를 바라보자, 녀석은 콧김을 내뿜으며 투레질을 했다.
―크응! 네놈은 그 이후가 아니라 지금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화를 시작한 비슈나르의 존재감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이니까.
“…….”
네르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자카르가 이렇게 경고할 정도로, 마왕 비슈나르의 힘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총사령관인 류레이아가 논공행상조차 생략하고 곧바로 마왕령 공략을 선언할 만큼.
“알고 있는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북방 원정에 있어 마지막 결전이 다가왔다.”
수뇌부들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류레이아가 선언했다.
“그리고, 앞으로 약 일주일 안으로 케프렌을 비롯한 북방귀족들에게서 지원군이 도착한다.”
“……!”
대륙 회합에서 결정된 북방에 대한 지원은 이미 한 달도 전에 결정된 만큼, 그들의 도착은 오히려 상당히 빠른 감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전선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아.”
삑!
류레이아는 이전 아르바가 다른 직계들에게 보여 주었던 것과 비슷한 사진들을 수뇌부들에게 게시했다.
“그 썩어빠진 흑마법사들이 과거에 벌였던 헛짓거리가,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큰 골치로 다가왔다.”
마신강림 프로젝트.
라데우스의 이름 아래 있는 자들 중 이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다들 한 번씩은 가문의 역사를 교육받을 때 들었던 단어였으니까.
마신강림과 현재 상황에 대한 대략적인 브리핑을 끝낸 뒤, 류레이아가 말을 이었다.
“참모진들이 계산한 바, 마왕 비슈나르가 완전히 우화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약 5일 정도라 하더군.”
“으음!”
많은 이들이 침음을 흘렸다.
상대의 예상 무력 수치가 파악이 안 되는 시점에서, 일주일 후에 도착할 지원군을 기다린다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다.
그게 설사,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케프렌의 힘이라고 해도.
“그러므로 나는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마왕령을 공략하고자 결정했다.”
화면이 또다시 바뀌었다.
동, 서, 북, 세 갈래로 이루어진 마왕령의 대략적인 공략 루트가 나타났다.
“전군을 네 개의 부대로 나눈다. 그렇게 나눈 부대들은 각각 방면에 포진된 적들의 저항을 돌파해, 마왕령의 중심부를 공략한다.”
그때 누군가가 질문했다.
“네 개의 부대인데 어째서 공략 루트는 세 개인 겁니까?”
류레이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려는 거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공략에 실패해 마왕이 완전히 부활하는 경우이지.”
“설마, 퇴각을 상정한 예비대인 것입니까?”
패배마저 상정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은 걸까?
하지만 류레이아는 이번엔 어째서인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 그럼 왜 굳이 총력전에 전력을 남겨 두시는지요?”
그 물음에, 류레이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선언했다.
“유성 소환으로 마왕령 전체를 쓸어버리기 위한 준비 부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