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46화 (146/237)

146화

<배신 (2)>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이냐며 항의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모습이었다.

“역시, 당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네 생각과 내 생각이 같다고 장담하진 못해. 다만 네 조모 엘로이아 블루벨벳이 이반(離叛)하리란 낌새는 지금까지 몇 번 있었다.”

그녀가 마족과 라데우스 사이를 저울질했다는 증언은 꾸준히 나왔다.

“사실 지금이 마족의 편에 서서 최대한의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시기이긴 하지.”

네르하의 차가운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안 그렇습니까, 바실리 전사장?”

“…….”

클로이아의 삼촌이자 사실상 서리 일족의 최고전력인 바실리 블루벨벳.

그는 네르하의 추궁에도 무표정을 고수했다.

“나는 전사장이다. 전사장은 오직 족장의 명령만을 받들 뿐.”

“비겁한 변명이군요.”

“그게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차기 족장으로 지명받은 제 명령 역시 받들겠군요.”

차갑게 일갈한 클로이아가 기습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서 정교한 냉기가 흘러나와 바실리의 사지를 휘감았다.

‘음?’

쩌적! 쩌저적!

대번에 팔다리가 제압된 바실리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나를 의심하는구나.”

“네, 지금 도련님의 진영에서 가장 치명적인 건 내부의 배신이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클로이아의 눈에 슬픈 빛이 지나갔다.

“지금 할머니의 행동은 옳지 않아요. 일족의 명운을 걸고 너무 확률이 낮은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냐?”

의외로 바실리는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그게 너의 선택이라면 존중하겠다.”

오히려 자신을 옭아맨 서리의 결박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최상위의 동결 봉인. 많이 성장했구나.”

“‘전사장’님의 강인함을 생각하면 죽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일이 끝날 때까진 무대에서 빠져 주셔야겠어요.”

“좋다. 애초에 내 힘으로도 풀 수 없는 수준이군.”

쩌저저적!

팔다리 끝자락에서부터 바실리의 몸이 급격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네르하는 그녀가 내뿜은 냉기에서 심상치 않은 의념을 느꼈다.

‘뭐지? 클로이아의 힘이 이 정도였나?’

클로이아는 수하들과 함께한 3개월간의 수련 동안 독자적으로 행동해 왔다.

‘지난 훈련에 불참한 것도 이유가 있었군.’

벽을 넘었거나, 아니면 애초에 힘이 제약되어 있었거나.

어느 쪽이든 지금의 클로이아는 네르하조차 쉬이 경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얼음이 상반신까지 잠식할 무렵.

목 위만이 남은 바실리가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말해 두마.”

“네.”

“족장님. 아니, 선대 족장님께선 결코 승산 없는 도박을 벌이시지 않는다.”

클로이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건 절대 쉬이 흘려넘길 발언이 아니었다.

“그 말뜻은, 마족의 힘이 그만큼 엄청나다는 뜻인가요?”

“그건 나도 모르지.”

기만이라고 보기엔 바실리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그분이 어떤 목적으로 일을 꾸미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분께 따로 언질받은 게 없다는 건 진실이니까. 하지만 네가 그분과 싸우고자 한다면, 이 사실은 반드시 명심해 두거라.”

“…….”

“그분은 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바실리의 추상같은 시선이 클로이아를 직시했다.

“너는, 그 각오를 꺾을 자신이 있느냐?”

그 시선을 마주한 클로이아는 한참을 침묵했다.

바실리를 둘러싼 얼음이 턱밑까지 올라오고서야, 그녀는 비장한 어조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네. 저 역시, 저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겠어요.”

“좋다.”

만족스럽다는 웃음과 함께, 바실리는 그대로 거대한 얼음 기둥 속에 봉인되었다.

“괜찮아?”

“그리, 괜찮진 않군요.”

클로이아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삼촌은 그 누구보다 곧으신 분. 동맹을 배신하는 일에 동의할 분은 아니세요. 하지만, 반대로 일족을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죠. 조모님처럼.”

설사 바실리 본인이 결백하다 해도, 털끝만 한 불안감이 있다면 변수는 차단해야 한다.

지금은, 모두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일전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까.

“서리 일족은 어떻게 할 거지?”

“그들 역시 전투에 참여시킬 수는 없습니다.”

클로이아는 냉정했다.

“변수를 제거할 거라면 확실하게 해야죠.”

“수하들이 실망하겠군.”

기껏 서리 일족이 합류해 전력이 올라 좋아했는데, 오히려 그들을 잡아넣어야 할 입장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렸다.

“일단은 말로 설득을 해 볼 겁니다. 절 족장으로 여긴다면 따라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제압해야겠지. 가능한 사상자가 없는 방향으로.”

“죄송해요. 도움은커녕 오히려 폐를 끼쳐 버려서.”

“딱히 신경 쓰지 않아.”

네르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파트너의 위기는 함께 넘겨야지.”

“파트너…….”

클로이아는 어째서인지 묘한 감흥을 느끼며 파트너란 단어를 곱씹었다.

“그렇죠, 우린 파트너죠.”

그 말이 상당한 마음의 안정감을 주는지, 그녀는 그 이후로도 파트너란 말을 몇 번이고 되새김질했다.

* * *

“클로이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받아들이겠다. 마나 제어 수갑을 차고 후방으로 가지.”

다행히 서리 일족은 클로이아의 권유에 납득하고 구속을 받아들였다.

“전장에서 멀어진 후방으로 이송되면 수갑은 자연히 풀려날 거예요.”

“뭘, 족장의 명령이니 따라야지.”

클로이아와 친분이 있는 몇몇 이들이 너털웃음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서리 일족은 일족 전체가 수평적인 관계인 만큼, 갑작스러운 새 족장의 취임과 전 족장의 실종 등에서 뭔가를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서리 일족과 인솔자 몇이 이탈한 뒤에도, 마왕령을 향한 진군은 계속되었다.

“진격은 순조롭습니다.”

네르하가 맡은 서쪽 루트에선 몇 차례 마족들이 응전을 시도했지만, 압도적인 화력 앞에 모조리 궤멸당했다.

“생각보다 쉽군요.”

“마족은 그렇다 쳐도, 마물들을 만 단위 정도는 동원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죠.”

반나절을 행군하면서 맞이한 적은, 고작 남작급 마족 두엇과 마물 1~2천 수준이었다.

물론 어지간한 성 몇 개는 초토화시킬 전력이었지만 이쪽은 고위 마법사만 무려 수백이다.

마계 영역을 펼쳐도 그 영역 채로 지워 버릴 능력이 있었다.

“사령관님, 곧 마왕령에 도달합니다.”

임시 참모로 임명된 세드릭이 쓰게 웃었다.

“뭐, 굳이 보고를 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만요.”

“그렇지. 확실히 마왕령은 수준이 다르군.”

네르하는 저 지평선 너머에 펼쳐진 검은 영역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측정 마기 농도, 99.98%. 마왕 클래스가 확실합니다.”

“저 정도 되면 대지마저도 검게 물드는 건가?”

공간 전체가 마치 검은 장막에 둥글게 가려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네르하의 눈엔 확실하게 보였다.

단순히 대기에 마기가 흘러 다니는 것을 넘어, 대지 전체가 마기에 오염되었음을.

“저걸 정화하려면 꽤나 고생 좀 하겠군.”

메테오를 때려 박는다는 발상도 얼추 이해가 되는 규모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시간과 자원을 쏟아붓기보단 운석 한 번 때려 박는 편이 확실하게 정화(물리)되니까.

“작전 지역 근처까지 왔습니다만, 중앙군이 도착한 낌새는 없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중앙군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대기한다.”

저 영역 안에 무슨 함정이 있는지 모르니 섣불리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다.

“그렇군요…….”

세드릭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뭐, 전력이 전력이니만큼 가장 먼저 쳐들어가 공을 독식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원래 계획은 삼면에서 동시에 진입하여 신속하게 우화 중인 마왕의 소체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네르하는 착잡한 심정으로 마왕령을 바라보았다.

‘아스타로스는 결국 실패했나 보군.’

어제부터 느껴지긴 했다.

아스타로스와 맺은 계약의 끈이 상당히 느슨해졌음을.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둘 중 하나다.

그녀가 어떠한 이유로든 이 세계를 떠났거나.

아니면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거나.

어느 쪽이든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음?’

그렇게 진지를 차리고 이십 분 정도 대기하고 있을 때.

네르하는 저 멀리 중앙군이 위치하고 있을 방향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미묘한, 아주 미묘한 위화감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직감의 영역에서 몸이 경고하고 있다.

이건 분명 ‘위기감’이란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중앙군 총사령관의 전언입니다!”

“말해라.”

“작전 변경! 중앙군을 제외한 동군과 서군은 마왕령으로 진입, 마왕의 소체를 토벌하라는 명령입니다!”

“……!”

네르하와 함께 있던 수뇌부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식의 변수는 절대로 달가운 게 아니었다.

“중앙군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그, 그것이!”

전령을 담당하는 마법사는 자기도 믿기 힘들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백작급 마족 하나가 튀어나와 중앙군의 진입로를 막아섰다고 합니다. 총사령관께서 직접 출격하셨으며, 그자를 제거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라는 보고입니다!”

장내는 충격에 빠졌다.

“배, 백작급이 또 있었다고?”

“중앙군의 정예와 총사령관이 직접 나섰는데도 시간이 걸려? 그럼 백작이 아니라 마왕급 아닌가?”

막사 분위기가 어수선해질 때, 네르하가 전령에게 물었다.

“그 마계 백작에 대한 정보가 있나?”

“네, 네! 그자는 어마어마한 근육질의 거한이라고 하며,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이름?”

“네, 그자는 자신을 크루갈이라고 소개했답니다.”

“…….”

천하의 네르하라도, 이번엔 표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 * *

“마족 놈들이 우리를 돕는군.”

서군과는 반대로 동군 측의 분위기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선두에서 진두지휘하던 바멜은 전령의 연락을 듣곤 비릿하게 웃었다.

“이렇게 되면 네르하보다 훨씬 빠르게 마왕령을 돌파하면 되는 일이다.”

바멜의 뒤엔 무려 300명이나 되는 전투마법사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의 무력을 합친다면 마왕령의 빈약한 마족들 따위야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바멜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성급해.”

“레티안, 또 그 소리인가?”

이전 모임부터 지금까지, 레티안은 꾸준하게 바멜의 작전에 브레이크를 걸어 왔다.

“총사령관을 막아선 백작급 마족이 더 없으리란 보장은 없어. 적어도 네르하 측의 반응을 살피면서 진격하는 것이 옳아.”

레티안에게서 네르하의 이름이 언급되자, 바멜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흥, 네르하 따위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아르바 형님이 데려온 ‘전력’이 있지 않나!”

그 전력이 워낙 대단해서, 신중한 레티안조차도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지…….”

“설사 백작급 마족이 하나 더 나타난다 해도 족장이 책임지고 처리해 주겠다 맹세했다. 우린 마왕에게 집중하면 돼.”

바멜은 물론, 세티안과 루드빅까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이유.

아군 최고전력 중 하나인 엘로이아 블루벨벳이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족장이 아니더라도 지렌 장로님과 동급의 실력자인 게레온 장로님도 계신다. 전력으로 따지면 삼군 중 우리가 최강이야.”

바멜의 주장은 확실히 팩트에 기반했다.

레티안은 결국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아꼈다.

“알았어.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을게.”

그렇게, 장로 게레온을 위시로 한 라데우스의 전투마법사들이, 일제히 마왕령의 경계를 넘었다.

* * *

그리고 약 30여 분 뒤.

바멜은 한쪽 팔이 날아간 부분을 움켜쥐며 눈앞의 존재를 노려보았다.

“대, 대체 왜 배신을…….”

그녀는 지금까지 봐왔던 연로한 노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전신에 새파랗게 물든 서리의 잔재를 흘리며.

마치 클로이아를 연상시키는 젊은 모습으로 변해 바멜의 한쪽 팔을 앗아갔다.

“글쎄.”

‘그녀’는 뭔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얼어버린 바멜의 팔을 던져 버렸다.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