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배신 (3)>
엘로이아 블루벨벳의 이상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레티안 라데우스였다.
그녀는 라데우스의 직계 중에서도 유독 신중했다.
처음 아르바가 합류했을 때도 그 저의를 줄곧 의심했고.
그가 가져다준 꿀단지 같은 공적들에 다른 형제자매들이 넘어갈 때에도, 그녀만은 아르바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게 아르바가 마지막 작전 시작을 앞에 두고 이탈했을 때는.
레티안의 감시는 아르바가 들여온 엘로이아에게로 향했다.
‘뭐지?’
처음엔 혹시 모를 허튼짓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시선은 엘로이아의 ‘변화’에 집중되어 갔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마왕령에 깊숙이 들어갈수록.
‘젊어지고, 있다?’
레티안은 확신했다.
엘로이아 블루벨벳의 시간이, 역행하고 있음을.
“흠, 의외로 별다른 적은 없군.”
선두에서 군세를 이끌던 게레온 장로가 작게 중얼거렸다.
“명색이 마왕령이니만큼, 잡졸 마족 몇 정도는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동군이 진입 중인 이 ‘협곡’은 정말로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아르바 형님이 자신 있게 추천한 루트입니다. 마왕령 중앙까지 가장 안전하게 최단거리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죠.”
“확실히 지형의 은밀함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긴 하다만.”
수염을 쓰다듬던 게레온이 이렇게 단정 지었다.
“난 마왕이 이 루트를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네.”
“……!”
“마족들이 전장에 대한 기본적인 지리 조사도 하지 않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지. 분명 수작을 부려놨을 가능성이 높아.”
“설마, 매몰?”
흠칫!
지금 동군이 진입한 루트는 협곡을 관통하는 아주 작은 샛길이다.
수작을 부려 산을 가라앉힌다는 발상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 지금 마법사 전력이 몇인데.”
게레온이 직계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뒤따라오는 군대라면 몰라도, 우리가 매몰 같은 하찮은 수작에 당할 것 같은가? 격한 전투로 마나를 전부 소모했다면 몰라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두요.”
바멜과 세티안이 고개를 숙였다.
장로를 상대로 괜히 자존심 부려봤자 남는 건 없었다.
그때, 뒤쪽에서 레티안의 질문이 들려왔다.
“격한 전투라면, 어느 정도의 적을 맞이했을 경우일까요?”
“으음?”
의외의 질문에 게레온의 고개가 돌아갔다.
“설마 레티안 네가 그런 소모적인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데. 흐음.”
게레온은 내심 귀찮았지만, 명색이 직계의 질문이라 나름 성실하게 답해 주었다.
“단일 개체로는 역시 마계 백작급은 와야겠지? 인간의 기준이라면 영역을 펼친 8레벨의 대마법사나 검제(劍帝)급의 기사라면 발목 정돈 붙잡을 수 있겠지.”
게레온은 솔직히 이것도 회의적으로 보았다.
“우리가 정말로 고전할 정도의 상대라면…… 기사라면 검성급으로 올리거나, 8레벨의 마법사에게 원초신기(原初神器) 정도 쥐여 준다면 가능하겠군.”
“원초의 신기를 가진 대마법사라면, 우리를 몰아붙일 수 있단 말씀이시군요.”
“아마 그렇겠지. 레티안아, 왜 그게 궁금하…….”
흠칫!
뒤를 돌아보려던 게레온은 갑자기 심상치 않은 투기를 느꼈다.
문제는, 그 투기가 다른 누구도 아닌 레티안 본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 무슨?”
“허허허.”
레티안의 근처에서 너털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제야 이변을 느낀 게레온이 손을 들었다.
“전군 정지.”
게레온의 시선이 레티안이 향한곳으로 향했다.
그 시선 끝에서, 끽해야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는가, 게레온 장로?”
“…….”
언제부터였을까?
흔히 하이퍼 리저버네이션이라 불리는 ‘환골탈태’ 현상은 막대한 마나의 폭풍을 동반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걸 느끼지 못했다는 건, 상대가 아주 은밀하게 체내의 마나를 운용했다는 것.
왜 굳이 그걸 숨겨야 했을까?
게레온이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엘로이아 블루벨벳.”
스윽!
푸른 서릿빛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되찾은 엘로이아가 답했다.
“말하게, 게레온 장로.”
“언제부터 만년빙정의 힘을 끌어왔지?”
그녀가 상큼한 미소로 답했다.
“언제부터라니. 당연히 처음부터지 않겠는가?”
“왜지? 이곳엔 별다른 적도 없네. 설사 있다 해도 자네가 나설 일은 어지간해선 없을 터.”
엘로이아를 향한 게레온의 적의가 강해졌다.
“그런데 왜 벌써부터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느냔 말일세.”
스스슥!
어느새 장내의 심각한 분위기를 읽은 라데우스의 마법사들이 원형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도 정예 중의 정예인 만큼, 최소한의 눈치는 있었다.
“후후후.”
그녀는 어느새 수백의 마법사들에게 포위당했다.
그럼에도 동요나 당황은 없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얘기해 주려고 했는데, 이리 눈치가 빠른 아이가 있었을 줄은 몰랐네.”
“그 말은, 내가 생각한 그대로라고 봐도 좋겠나?”
“음. 아마 그 생각 그대로일 걸세.”
팟!
그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엘로이아의 근처에 있던 레티안이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역시 라데우스야. 대응이 빠르군.”
게레온이 다급하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전군, 전투 준비.”
노골적인 적대 선언에도, 엘로이아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게레온이 지팡이를 겨누며 말했다.
“언제부터였나?”
“같은 질문이군.”
“하지만 의미는 다르다는 걸 알 텐데?”
“그렇겠지.”
엘로이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해 주자면, 얼마 되지 않았네. 지난번 마지막 마계 백작이 토벌된 직후에 결심을 했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건지는 몰라도.”
게레온이 이를 악물었다.
“네년의 잘못된 선택으로, 서리 일족은 멸망할 것이다.”
“아니, 멸망하지 않아.”
쩌적! 쩌저저적!
협곡 이곳저곳에서 부자연스러운 얼음기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얼음기둥은 결계, 아니, ‘영역’처럼 라데우스의 마법사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엘로이아의 심상각인영역, ‘천년여왕(千年女王)’의 등장이었다.
“너희가 모두 죽으면 목격자는 없다네.”
마왕령 안쪽인 이곳에선 외부 통신도 전부 먹통이 된다.
즉, 눈앞에 있는 엘로이아를 뚫어내지 못하는 이상, 다른 군에 연락할 방법이 없다는 것.
“그리고 설사 마왕이 승리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뭐, 뭐라고?”
“너희를 포함해, 여기에 몰려 있는 직계들을 모두 제거하면 되니까.”
“……!!”
“그리고, 이 북방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직계가, 다음 라데우스의 가주가 되겠지.”
그들의 사고는 어느새 하나의 인물로 귀결되었다.
동군에 엘로이아를 합류시켜 이쪽 루트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자.
꾸준한 조작을 통해, 한 명을 제외한 다른 직계들 모두를 한곳에 몰아넣도록 조작한 인물.
“아르바! 설마 아르바 그 녀석이!”
“그, 그럴 리가!”
설마하니 라데우스의 직계가 마족과의 전쟁 중에 이런 식으로 경쟁자들을 제거하려 할 줄이야!
게레온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이곳이 빙정의 영역이라 해도, 네년 혼자 이 모두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아까 게레온이 말한 ‘조건’은 어디까지나 전투가 성립되는 조건일 뿐.
수백에 달하는 마법사들의 증폭은 빙정의 출력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
“언제 나 혼자라고 했나?”
“뭐?”
콰과과광!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외곽지역에서 무지막지한 마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엘로이아가 모두의 시선을 끄는 사이에 일어난 기습 공격이었다.
“뭐지, 저것들은?”
게레온은 바깥쪽에서 튀어나온 습격자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계 귀족? 아니, 느낌이 좀 다른데?”
그 숫자는, 대략 열.
그들은 하나같이 늘씬한 검은 갑주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다.
다크 나이트나 데스 나이트로 보기엔, 그들이 펼치는 건 어디까지나 마법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 따지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기세가 심상치 않다!’
놈들의 정체가 뭐든, 하나하나가 마계 자작급에 해당하는 막대한 힘을 풍기고 있다.
‘어디서 저런 전력이? 아니, 그 전에!’
게레온은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는 불같이 분노를 토해 냈다.
“아르바! 엘로이아! 설마 마족과 손을 잡았단 말이냐!”
“그걸 이제야 눈치챘나?”
엘로이아의 조소에 게레온의 분노는 한계치를 넘어섰다.
“이, 이 인간이라 할 수도 없는 놈들이!”
라데우스의 혈족으로 평생을 고상하게 살아온 게레온의 욕설 능력은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게레온,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알려 주지.”
그녀가 마치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마왕 비슈나르는 이번 우화를 대비해 각 루트에 한 명씩, 세 명의 가디언을 배치했다. 한 명은 알다시피 중앙군을 맡은 마계 백작 크루갈. 그리고…….”
“그럼 이쪽 루트의 가디언은 당신이겠군요.”
어느새 세티안의 옆에 붙은 레티안이 말을 잘랐다.
“정답일세.”
그녀는 화는커녕 오히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안은 신중하게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
“그럼 서쪽 루트, 네르하가 간 방향엔 누가 있죠?”
엘로이아는 외곽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검은 갑주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것들의 주인.”
* * *
중앙군에서 진격 명령이 내려진 이후.
네르하는 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마왕령을 내달렸다.
그 진군 속도가 워낙 빨라 주변에서 우려를 표할 정도였다.
“사령관님, 너무 빠릅니다! 진군 속도를 조금 낮춰 주십시오!”
거의 경주 수준으로 속도를 높였기에, 공을 독식하고 싶어 하던 수뇌부들도 기겁할 정도였다.
“아니, 속도를 늦추진 않겠다. 우리만으로 마왕을 공략하려면 최대한 시간을 낭비해선 안 돼.”
“동군을 배제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마 동군은 오지 못할 거다.”
“……!!”
확신에 찬 네르하의 말에 수하들이 눈을 부릅떴다.
“어, 어째서죠?”
“내 예상대로라면, 동군은 지금쯤 누군가에게 막혔을 거다. 중앙군처럼 말이지.”
그리고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 자신들의 진격 역시 곧 막히게 될 것이다.
설마하니 세 개의 진입로 중 굳이 두 개만 막을 리는 없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전군 정지.”
저 앞에, 네르하의 군세를 저지할 ‘대적자’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서 와라. 라데우스의 마법사들아.
드래곤의 비늘로 갑주를 만들었다면 저런 느낌일까?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투구 속에서, 금속끼리 문지르는 듯한 불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사?”
기사라고 보기엔 갑옷을 제외하면 딱히 무장이 없다.
그냥 맨손이라고 봐도 좋았다.
―크흐흐, 뭐, 알고 있겠지만 너희는 이 앞으로 갈 수 없다.
“혼자서 잘도 떠드는군.”
“네놈 하나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네르하의 양옆에서 수뇌부들이 튀어나오며 적의를 피웠다.
그때, 세드릭이 네르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마왕령의 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급수를 측정하긴 어렵지만, 최소 자작급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르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 이상이다.”
“네?”
“내가 저자를 맡을 동안, 주변에 나타날 것들을 처리해라.”
네르하는 그 말을 끝낸 즉시 대담하게도 상대를 향해 다가갔다.
“사, 사령관님!”
“주군!”
뒤에서 수하들이 뭐라고 하든, 네르하는 상대와 거의 2미터 정도까지 거리를 좁혔다.
―너무 겁이 없는 게 아닌가?
투구에 가려져서 보이진 않지만, 어째서인지 상대가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아.”
네르하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왜 그런 모습으로 우리 앞을 막아서고 있는지는 몰라도, 큰 실수를 하셨습니다.”
상대의 시선과 네르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매였다.
“아르바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