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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48화 (148/237)

148화

<배신 (4)>

―…….

한순간 상대의 말문이 막혔다.

너무 빠르게, 그리고 직설적으로 정곡을 찌른 탓일까.

한동안 뻐끔거리던 ‘아르바’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는, 무슨 특별한 마안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냐?

“설마, 그럴 리가요.”

―한데 어떻게 대번에 그걸 알아차렸지?

사실상 본인이 아르바 라데우스라는 걸 자백하는 말이었다.

당연히 뒤쪽에선 난리가 났다.

“아, 아르바, 라고?”

클로이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앞으로 나왔다.

―그래, 클로이아.

딸깍!

투구를 벗자 아르바의 맨 얼굴이 드러났다.

“죽기 직전 정체를 밝히며 놀려 줄려고 했는데, 허무하기 짝이 없군.”

“대체, 그 모습은 대체?”

경악, 놀라움, 그리고 슬픔과 동정.

클로이아의 표정에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훗, 이 모습이 어때서?”

그 수려한 외모는 그대로였지만, 기존의 아르바와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져 있다.

인간의 색이라고는 믿기 힘든 푸른 빛의 피부는 물론.

라데우스 혈족 특유의 은갈색 머리카락이, 완벽하게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네르하는 고작 며칠 만에 이리 변해 버린 그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지막 작전 시작 전에 이탈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그래.”

“그게 이런 헛짓거리를 위함이었습니까?”

“헛짓거리라. 그게 네 눈에는 그렇게 보였구나.”

대번에 뒤에서 아르바를 힐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르바 라데우스! 마법사로서의 긍지를 잃고 흑마법사가 되다니! 당신은 라데우스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존심도 없는가!”

‘흑마법사’라는 말에 아르바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큭큭큭, 흑마법사라? 네놈의 눈에는 내가 고작 흑마법사 따위로 보이나?”

“그, 그건!”

확실히, 저 모습은 흑마법사라기보단 오히려 ‘마족’에 가까웠다.

“벌레 같은 것들.”

아르바의 양손에 순식간에 거대한 힘이 맺히기 시작했다.

“허억!”

뒤에 있던 몇몇이 기함을 하며 몸을 떨었다.

일반적인 7레벨을 아득히 뛰어넘은 위용.

지금껏 전쟁에서 무수히 많은 7레벨을 만나본 만큼, 확실히 저 마력의 양은 인간의 수용량을 뛰어넘었단 걸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였습니까?”

“……눈치챘느냐?”

“상황이 이렇게까지 왔는데,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죠.”

“푸흐흐, 그래, 맞다.”

많은 이들이 대화의 행간을 짚어내지 못했지만, 이윽고 이어진 네르하의 말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역시, 형님이 마왕에게 굴복한 건 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었겠군요.”

“뭐, 뭣!?”

즉, 네르하가 북방에 도착한 시점에서부터, 아르바는 이미 마왕 비슈나르의 수하가 되어 있었다는 소리였다.

“하하하! 맞다!”

아르바가 양팔을 펼치며 환희했다.

“처음부터 이 전장은 마왕의 부활을 위한 거대한 제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양손에 맺혀 있던 마기가 아르바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계영역, 마룡천상계(魔龍天上界)!

이미 마계영역이 펼쳐져 있는 마왕령에, 또 다른 영역이 겹쳐진다.

그 겹쳐진 영역 속에서, 검은 이무기들이 그림자 속을 튀어나오며 하나둘 고개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고위 마법사의 힘을 넘어서는 것들이, 무려 수백 마리가 넘게 튀어나오고 있다.

“하하하하! 어떠냐, 이 힘이! 이 무한한 권능이!”

“완전히 마족이 되셨군요, 형님.”

“마족이 뭐 어떠하냐? 인간일 때는 그 편린도 잡을 수 없었던 영역도, 이젠 아주 쉽게 펼칠 수가 있게 되었다! 크하하하!”

아르바 정도 되는 마법사가 8레벨의 영역과 마계 영역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해 저런 소리를 내뱉는 건 아닐 거다.

즉, 저걸 구현하기 위한 출력 자체는 마기의 힘을 빌렸을지언정, 영역의 본질 자체는 아르바 본인의 심상이 그대로 투영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구오오오!

―쿠와아악!

시야 전체를 사로잡는 구불거리는 이무기들의 움직임.

확실히, 엄청나긴 하다.

거기에 이무기들이 내뿜는 포효에 땅이 흔들릴 지경이다.

“정말, 아쉽군.”

진심으로 딱하다는 네르하의 표정에, 아르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아쉽다는 거냐?”

“당신 같은 인재가, 스스로 자신의 가능성을 짓밟았다는 게.”

“뭐?”

“그 재능으로 수십 년을 갈고닦는다면, 지금 이 광경은 온전한 본인의 힘으로 구현해 낼 수 있었을 텐데.”

“……!”

“그리고 저런 이무기들이 아닌, 진정한 용이 나왔을 테지.”

마법사의 세계에 수많은 7레벨이 존재하지만, 8레벨에 발을 들이미는 건 100명에 한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르바는 그런 7레벨들 사이에서도 8레벨에 올라갈 수 있는 높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용이 아닌 이무기의 출현은, 승천하지 못한 현재 아르바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네놈이, 뭘 안다고 그딴 소리를!”

네르하의 동정 어린 눈빛을 마주한 아르바의 반응은 단 하나.

분노였다.

* * *

인정한다.

지금의 아르바는 진심으로 우리의 진격을 홀로 막아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타인의 힘을 빌려 왔다고는 하나, 무려 8레벨의 특권인 영역을 발현해 냈으니까.

그리고 그 영역에서 발현된 이무기들이, 일제히 네르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캬아아악!

단순히 몸집으로 들이박는 것을 넘어, 입 밖으로 브레스를 토해 내기도 한다.

“사령관님을 지켜라!”

“전투마법사단 하이네, 요격 준비!”

“저 지렁이 같은 드래곤들을 박살 내 버려!”

수하들은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이무기들을 요격하는 한편, 혹시 모를 기습으로부터 대비했다.

“좋은 군대로구나, 네르하.”

“…….”

“내가 이끌었던 과거의 병단이 생각나는군.”

네르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아르바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거냐?”

“네 목숨을 거두겠다. 네가 더 이상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기 전에 해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야.”

“먹칠?”

아르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눈에 광기가 일렁거렸다.

“나는 가주가 될 것이다! 누구보다도 강하고! 누구보다도 위대한!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를 넘어서는 가장 위대한 후계가 될 거란 말이다!”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열등감.

지금까지 여유로운 모습만을 보여 왔던 만큼, 상당히 이질적인 반응이다.

그럼에도 네르하의 반응은 그저 냉소적이었다.

“……그 꼬라지로?”

“의태 정도야 간단하게 할 수 있지. 본가의 그 누구도 내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거다.”

번뜩!

“너희만 모조리 사라진다면 말이지.”

글쎄, 정말로 그 카이젤의 이목마저 속일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만.

“아니, 애초에 이 난리를 쳤는데도 아무런 뒤탈 없이 가문으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 보나?”

“충분히 가능하다. 너희가 마왕령에 들어온 순간부터 말이지.”

‘재밍을 믿는 건가?’

확실히 마왕령 내부에선 부대 간의 통화가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다.

마왕의 현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마왕이 스스로 마왕령 내부의 재밍을 풀었기에 가능했던 것.

자의로 재밍을 풀었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자의로 다시 재밍을 걸 수도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놈은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네르하는 저 자신감이 근거 없는 허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놈은 라데우스의 직계.

그런 놈이 이쪽의 전력을 과소평가한다는 건 오히려 망상에 가까운 추측이다.

“네르하, 너만큼은 내 손으로 확실하게 죽이고 싶었다.”

“어째서죠?”

“너는 변수니까. 내가 예측할 수 없었던 변수.”

뭐, 그럴 만했다. 아르바의 입장에서 네르하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서 뚝 떨어진 변수였으니까.

“루드빅도, 바멜도, 그리고 다른 두 년도 내겐 변수가 될 수 없었다. 갑자기 사람이 달려져서 돌아온 네 녀석을 제외한다면.”

그렌 타운에서 오랜만에 네르하를 다시 보았을 때, 아르바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육체가 상당히 다부져졌고, 마력 또한 엄청나게 늘어났다.

물론 그때는 5레벨에 이르진 못했으니, 이 정도 변화로는 놀랐을지언정 경악까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바를 진심으로 놀라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존재감.’

바닥을 기었던 자존감, 심약했던 판단력 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르바는 그야말로 바스텔이나 마하에게서나 느낄 수 있었던, ‘위에 선 자’ 특유의 존재감을 네르하에게서 보았다.

그리고 몇 달 후 북방에서 네르하를 다시 보았을 때.

아르바는 확신했다.

“네놈을 이 기회에 죽이지 않으면, 언젠가 나를 밟고 올라설 것이라고 느꼈지.”

“딱히 잘못 보진 않으셨군요.”

“그게, 내 손으로 널 확실하게 죽여야 할 이유다.”

쩌―억!

아르바의 근처를 맴돌고 있던 이무기들이, 일제히 네르하를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검은빛의 광탄이 맺히기 시작했다.

‘멋지군.’

생사대적을 눈앞에 두고서도 기술의 위력과 세련됨에 감탄하는 건 네르하의 나쁜 버릇이었다.

콰아아아앙!

수십 줄기의 검은 광선이 일자로 쏘아지고.

“막아라!”

네르하의 뒤에 있던 마법사단이 일제히 방어마법을 영창하며 아르바의 공격을 상쇄하기 시작했다.

위력은 절륜했지만 인사치레의 의도가 명백한 만큼, 네르하는 가볍게 광선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확실히 단기간에 공략하기엔 힘들겠어.’

힘, 속도, 대응력.

모든 부분에서 아르바의 영역은 지금까지 봐온 모든 강자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있었다.

스스스슥!

그때, 지금껏 조용히 있던 이자카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흐흐, 인간의 심상으로 마계의 흑망(黑蟒)을 구현했는가? 비슈나르의 협조가 있어서 가능했겠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기엔 제법 그럴싸하구나.

‘아, 그러고 보니 너도 저것들과 동족(?)이었지.’

그 말 한마디에 이자카르의 꼭지가 대번에 돌아 버렸다.

―캬악! 이 망할 인간놈이! 나를 저런 저급한 하급종들과 같은 취급하지 마라. 지상의 엘더 드래곤들도 내 기준에선 도롱뇽에 불과하거늘!

솔직히, 예전에 보았던 거대한 본체라면 몰라도, 이런 자그만 몸집으로 열을 내 봐야 무섭지도 않다.

‘그래서, 왜 나타난 거냐?’

―흥! 내가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도움?’

―원래라면 그냥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만, 비슈나르의 우화가 예상보다 빨라지고 있다. 그 몽마년이 자신의 힘을 고스란히 비슈나르에게 바쳐 버린 탓에 계산이 틀어졌다.

‘쩝.’

아스타로스의 이야기가 나오자 네르하는 가볍게 혀를 찼다.

―이무기의 심상을 끌어온 순간, 놈의 마기는 일부나마 용족의 속성을 띠게 된다.

지상에도 마계에도 드래곤은 존재한다.

라데우스의 혈족들이 스타 플래티넘이란 고유 속성을 가지듯, 용족 역시 종족 특유의 ‘용혈(Dragon blood)’이라는 고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몸은 마계에서도 이름 높은 용왕이지.

움찔!

아가리를 벌리며 네르하를 향해 돌진하던 이무기들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버렸다.

“……뭐지?”

갑자기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이무기들의 반응에, 아르바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역의 제어 능력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이건 대체?’

아무리 타인의 힘을 빌려와 구현한 반쪽짜리라 해도, 영역 자체가 불안정해질 뿐 구현에 성공한 소환수가 흔들리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무슨 경우인가?

콰직!

아르바의 눈에, 저 멀리 쏘아진 이무기의 거대한 몸체가 어떤 ‘손’에 잡혀 짓이겨지는 게 보인다.

“그건, 뭐냐?”

아르바는 그 ‘손’의 주인, 네르하에게 물었다.

“뭐긴, 네놈을 쉽게 조질 수 있는 ‘힘’이지.”

네르하의 오른손을 감싸고 있던 마령수투가, 어느새 드래곤의 손과도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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