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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49화 (149/237)

149화

네르하는 용수(龍手)로 변한 자신의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자꾸 이런 기물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그래도 약간의 힘만으로 만만치 않아 보였던 이무기를 잡아 죽일 수 있었던 건 의외였다.

부여된 힘 자체가 저 이무기들보다도 상위에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확실히 편하긴 편하단 말이야.’

중원이었다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강기를 꺼내 들었을 테지만, 마법과 이능이 결합되면서 기본보다 훨씬 효율적인 힘의 운용이 가능했다.

천성 무인이었던 네르하의 사고방식이 마법을 접하면서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용살(龍殺)의 업을 지닌 고대족까진 아니더라도, 저놈을 상대하는 건 상위종의 상성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좋아, 그러면 남은 승리 조건은 화력이군.’

아르바가 불러낸 이무기들은 수백에 달하는 전투마법사단을 상대로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놈은 마왕령의 마계영역에서 힘을 끌어오고 있다. 이 안에서 싸우는 이상, 놈이 끌어올 수 있는 힘은 가히 무한이라 할 수 있지.

그나마 다행인 건 놈의 마력이 무한이라 해도, 출력은 무한이 아니라는 것.

그걸 알기에 아르바 역시 인파이팅을 자제하고 원거리에서 견제 위주로 싸우고 있다.

‘그래도, 승부가 나기까지 저 이무기들을 붙잡아 두기만 해도 충분하겠지.’

그사이 손발이 묶인 거나 다름없는 아르바를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저도 껴 주세요.”

그때, 클로이아가 네르하의 옆에 안착했다.

“……괜찮겠어?”

아르바와 클로이아의 과거사를 어느 정도 아는 만큼, 네르하의 말은 제법 조심스러웠다.

“괜찮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건 제가 마무리지어야 할 일이에요.”

네르하와 어깨를 나란히 한 클로이아를 보는 순간, 아르바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클로이아. 지금 뭐 하는 거지?”

“당연히 당신을 적대하는 중입니다만.”

“아니!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내 옆이다!”

아르바는 마치 역린을 허용당한 용처럼 발광했다.

“네 조모인 엘로이아 역시 나와 함께하기로 했다! 너는 그 뜻을 따르지 않을 것이냐?”

흠칫!

“역시, 그분은…….”

“그래! 네 조모는 지금 직계들을 모두 죽이기 위해 동쪽으로 갔다! 빙정의 힘을 이용하는 그녀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네르하는 입맛이 썼다.

예측은 했지만 생각했던 최악의 진실이 정말로 흘러나올 줄이야.

그런데, 클로이아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역시, 그분은 자신을 희생해서 당신을 치워 버릴 생각이셨군요.”

“……뭐?”

아르바는 물론, 네르하의 신형까지 잠깐 멈칫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바의 인상이 급격히 구겨졌다.

“재미없는 농담이군, 클로이아.”

“농담이 아닙니다. 당신이 이 자리에 나온 순간부터 확신했습니다.”

그녀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확신에 차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악덕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서겠죠.”

“…….”

“직계들은 죽지 않았을 겁니다. 비록 타격을 입었을지언정, 배후에 당신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할 테니까요.”

“헛소리!”

아르바가 다급하게 일갈했다.

“나는 족장에게 서리 일족의 빛나는 미래를 쥐여 주겠다 말했다. 그것도 이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전쟁이 마족의 승리로 끝나면, 서리 일족은 족의 아래에서 번영을 누릴 것이다.

“설사 라데우스가 이겼다 해도 마찬가지다. 내 계획대로 된다면 전후 라데우스는 서리 일족은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줄어들겠지. 그만큼 서리 일족은 라데우스의 간섭을 벗어나게 된다!”

당연히 아르바를 제외한 모든 직계가 전사하고, 전말을 아는 전력 역시 모두 죽게 될 테니 그렇게 되겠지.

“하물며 내가 가주가 되는 날엔……!”

“아직도 모르겠어, 아르바?”

아르바를 대하는 클로이아의 말투가 과거 리브라 시절로 돌아갔다.

그녀는 오른손을 자신의 심장께로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번 대 서리 일족의 족장이야.”

“뭐?”

“그분이 정말로 네게 협력하고자 했다면, 지금 시점에서 서리 일족을 이끌고 라데우스의 뒤를 쳤겠지. 이런 식으로 따로 행동하실 게 아니라.”

마치 얼음물 세례를 얻어맞은 듯, 아르바를 감싸던 흥분이 차갑게 식었다.

“서리 일족은 내 명령에 따라 이미 전장을 벗어나 후방으로 돌아갔어. 그리고 ‘전’ 족장 엘로이아 블루벨벳의 독단적 이탈을 라데우스 본가에 보고할 거야.”

“그게 무슨 짓이냐! 기껏 얻은 기회를 날려 버릴 생각이냐?!”

“그건 기회가 아니야.”

클로이아는 천천히 손을 들어 네르하의 한쪽 어깨를 감싸 쥐었다.

“난 네르하 라데우스가, 장남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를 넘어설 재목이라 믿고 있어.”

“너!”

“그리고 넌 그 재목이 되지 못해. 분명 할머님도 그렇게 생각해서 움직이셨겠지.”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라는 말은 뒤로 삼켰다.

한동안 멍하니 클로이아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르바가, 허탈하게 탄식을 내질렀다.

“하.”

그리고, 그에게서 진심으로 상대를 죽이겠다는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기어코 끝까지 날 거부하겠다는 거지?”

단순히 찌를 듯한 살기를 넘어, 질척한 감정이 뒤섞인 기분 나쁜 살기였다.

“훗날 내가 라데우스의 가주가 된다면, 대부인의 자리는 너에게 주려고 했었다.”

그 발언에는 네르하도 조금 놀랐다.

현 라데우스의 권력 구조상, 대부인 시엘 라데우스는 대장로 수넨조차 능가하는 실질적인 서열 2위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물론 클로이아가 그 자리에 앉는다 해도 시엘의 권세를 이어받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징성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너는 끝까지 날 거부했지. 리브라에서부터, 지금까지.”

“당신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단호한 거절에 네르하는 처음으로 아르바가 불쌍해졌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이제 너에 대한 미련을 끊겠다.”

아공간에서 아르바의 스태프가 튀어나왔다.

거무튀튀한 묵색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스태프는, 딱 봐도 막대한 마기가 넘실거리는 마물이 분명했다.

“아르바가 평소 이용하던 게 아니에요. 조심하세요.”

“딱 봐도 그래 보이는군.”

쿠구구궁!

“나와라, 브리트라.”

땅속에서 거대한 지진이 일어남과 함께, 아르바의 바로 발밑에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뱀이 튀어나왔다.

어지간한 성룡들보다도 거대해 보이는 그 뱀은, 아르바를 머리 위로 태우며 나타나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네르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감상을 내뱉었다.

“그때 생각나는군.”

‘그때’라는 건 흑룡의 형상을 뒤집어쓴 흑마법사 주단을 상대할 때였다.

“공략법도 비슷할 것 같은데요?”

“하지만 둘이서는 힘들어.”

네르하의 시선이 본진 쪽으로 향했다.

“저 녀석을 공략하려면 한 명이 더 필요해.”

“한 명?”

“가능하면, 마법사보단 검을 다루는 쪽이 더 낫겠군.”

“나 불렀어요?”

저벅!

네르하의 뒤에는 어느새 자신의 검을 집어든 루시아가 나타나 있었다.

* * *

퍼퍼퍼펑!

사중영창, 쿼드러플 캐스팅으로 7레벨의 마법 4개를 엮어 낸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젠장!”

지팡이를 거둬들인 류레이아의 목소리엔 짙은 낭패감이 서려 있었다.

“지금까지 상대해 온 백작급과는 질이 달라.”

“하하하, 칭찬 고맙군.”

그녀의 눈앞엔 상체를 드러낸 크루갈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이전 네르하가 만났던 것보다도 거대한 위용.

마신강림으로 얻은 어설픈 육체가 아닌, 소환의 의식에 응해 현신한 진정한 크루갈의 본체였다.

‘벌써 1시간째 시간을 허비하고 있어. 이대로라면 안 돼.’

류레이아는 골치가 아파 왔다.

어지간한 공격은 몸으로 때워 버리고, 고위 마법은 요리조리 피해 버린다.

힘으로 누르려면 영역을 펼쳐야만 했는데.

지금 상황에선 영역을 발현한다 해도 뒤쪽에 있는 부하들까지 말려 버릴 가능성이 컸다.

이게 바로 영역의 몇 안 되는 단점이었다.

‘빌어먹을, 네르하 그놈은 저런 걸 어떻게 잡았지?’

수많은 마법을 얻어맞았음에도, 크루갈의 육체는 여전히 굳건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7레벨에 근접한 고위 마법들이 놈의 기본적인 패시브 오러조차 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류레이아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는지, 크루갈의 입에서 음충맞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흐흐, 너무 억울해하진 말라고.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다르니까.”

크루갈의 조롱에도 류레이아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전력을 다한다면 못 이길 상대는 아니야. 다만 지형의 이점을 너무 잘 잡았어.’

이곳이 드넓은 설원이었다면, 류레이아는 망설임 없이 휘하 마법사단을 모조리 투입해 놈을 족쳤을 것이다.

하지만 크루갈은 영리하게도 쉽게 고위 마법을 난사할 수 없는 설산 루트에서 아군을 막아섰다.

‘병력을 물리고 조금 무리해서 영역을 펼칠 수밖에 없나?’

마법사의 영역은 분명 강대한 위력을 지니고 있지만, 기사의 영역처럼 자유롭게 펼쳤다 거두는 게 불가능했다.

한 번 펼치면 막대한 소모를 감수해야 했고, 전투의 여파로 주변 지형이 작살 나는 것 역시도 고려해야만 했다.

‘미리 진군 명령을 내려두긴 했지만, 마왕의 목을 후계 애송이들에게만 맡겨두기엔 불안해.’

특히나 마왕이 저런 특기전력을 몰래 숨겨 뒀다는 점에서 더더욱 불안했다.

그렇게 류레이아가 영역을 펼치려고 마음먹었을 때.

“흠, 대충 시간이 다 된 것 같군.”

갑자기 크루갈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내지었다.

“여기까지 하지.”

“……뭐라고?”

“왜? 더 놀고 싶나?”

아무리 마법사가 기사보다 실리를 더 따진다고 해도, 대결에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자신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이 자식! 지금, 장난하는 거냐?”

“아니! 내가 여기서 맡은 임무는 그저 시간을 조금 끄는 것뿐이야.”

크루갈의 손가락이 산맥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 서쪽에서의 전투가 끝날 때까지만 말이야.”

“서쪽? 설마!”

“크크큭! 맞아, 애초에 내 매치업 상대는 따로 있거든.”

뭐가 그리 즐거운지, 크루갈의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그 건방진 인간이 먼저 매듭지을 일이 있다고 사정하길래, 자비로운 이 몸이 통 크게 양보해 줬지.”

“그 인간? 누굴 말함이지?”

“흐흐흐, 그런 놈이 있다. 지닌 역량에 비해 과분한 꿈을 꾸는 놈이.”

크루갈은 그게 누구인지 알려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들어가라, 마왕령까지 들어온 이상 너희에겐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겠지.”

“…….”

그녀는 그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마왕령 내에서 명령을 내리려면 전령이 직접 날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도처에 깔린 수많은 마물들을 생각하면 자살행위밖에 되지 않는다.

방법은 오직 지정한 목표지점까지 돌파해 합류하는 것뿐.

그 사실을 진즉 파악한 크루갈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류레이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슈나르의 모습을 보는 순간, 너희는 스스로가 불길에 뛰어든 부나방임을 느끼게 될 거다.”

그녀는 크루갈에게 우리를 무시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수백 년을 살아온 엘프로서의 본능이, 저 말이 절대 허세가 아님을 경고하고 있었다.

“혹시 모르지. 그놈이 지금의 나를 뚫어 낼 역량을 쌓았다면, 이 상황을 역전할 수 있을지도.”

그 말을 끝으로, 크루갈은 자리를 박차고 서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류레이아를 향해, 뒤쪽에서 방어진을 치던 수하들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놈을 추격할까요?”

“아니, 놈을 뒤쫓아 봤자 아군의 희생만 늘어날 거다.”

놈의 역량을 생각하면 최소 장로급의 실력자가 추격해야만 발목을 붙잡을 가능성이라도 있다.

“하지만 놈이 지칭하던 존재는 분명 네르하 도련님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상황을 보면 서쪽에도 만만치 않은 적이 배치되어 있었을…….”

“그만.”

류레이아는 손을 들어 수하의 말을 끊었다.

“이미 던져진 주사위야. 각 방면에 나타날 변수는 스스로 극복해야 해. 난 그걸 대비해 충분한 전력을 배분했고.”

“…….”

“우린 이대로 마왕령 중앙까지 들어가 마왕의 목을 친다. 설사, 좌우 양군이 제때에 도착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야.”

그녀는 마왕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더 이상의 변수는 없을 거라 확신했다.

만약 마왕이 이 이상의 전력을 숨겨 뒀다고 한다면, 마신강림이고 뭐고 라데우스의 본군을 확실하게 밀어 버릴 수 있는 전력을 갖춘 셈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가자.”

류레이아의 무거운 한마디가 중앙군의 귓가를 아련하게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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