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몰아붙여라!”
“배신자 아르바 라데우스를 처단하라!”
본진을 지휘하는 부장급 마법사들의 인도하에, 수백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지팡이를 겨누었다.
쿠르르릉!
거대한 폭음과 함께 전장은 대번에 광선과 뇌전, 화염이 몰아치는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전방에서 브레스를 쏘아 대는 수백의 이무기들과 격돌한 결과물이었다.
격돌의 여파로 인근의 산이 깎여 나가며, 눈사태와 낙석이 들이닥쳤다.
그나마 서쪽 루트는 협곡 같은 좁은 지형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아르바 라데우스는 확실히 까다로운 강적이었다.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더니, 바로 꼬리를 만 개가 되어 버린 것이냐?”
“설마, 그럴 리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네르하의 속마음은 새삼 낭패감이 가득했다.
‘틈을 찾을 수가 없군.’
아르바의 전략은 간단했다.
소환한 이무기들을 이용한 다중 원거리 포격.
문제는 그 포격의 숫자는 물론이고 위력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거다.
물론 대부분의 포격을 본진의 마법사들이 상쇄해 주고 있긴 하다.
서로의 포격이 이어지는 화력전에서 안전하게 길을 뚫는 것도 문제였지만, 진짜 문제는 아르바를 치려면 놈이 소환한 브리트라라는 거대한 뱀을 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식이면 큰 기술을 쓸 틈이 없군.’
포격의 빈틈이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겠는데, 촘촘하고 정밀한 아르바의 화망(火網)은 그 작은 틈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끝없이 쏟아지는 막대한 마력의 충돌에 클로이아가 실소를 내지었다.
“아무리 영역이 무한의 힘을 상징한다지만, 놈이 지금까지 쓴 마나만 해도 7레벨 마법사 수십 명분은 될 거예요.”
앞으로 튀어나온 루시아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아르바 라데우스라면 라데우스 가문에서도 테크니션으로 유명한 마법사인데, 지금 모습은 듣던 것과는 다르군요.”
다양한 마법이고 나발이고, 놈은 오로지 화력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다.
“역시 이대로 본진의 역량을 낭비하게 둘 수는 없다.”
이런 식의 화력 대치가 이어지면 유리한 건 아르바였다.
“제게 생각이 있어요.”
클로이아가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저 검은 뱀의 발을 묶는 동안 두 사람이 아르바를 공략해 주세요.”
“가능하겠어?”
“……뭡니까, 그 불신 어린 눈은?”
그녀가 상당히 강해진 건 알겠다만, 최근까지 마력 부족으로 헥헥거리던 클로이아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당장 아르지엔에서 일어난 남작급 마족인 뮬란과의 싸움에서도, 결국엔 마력 부족으로 밀리지 않았던가?
클로이아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투덜거렸다.
“지금의 나라면 가능해요. 마력이 달려서 빌빌거리던 과거의 제가 아닙니다.”
확실히 전사장 바실리를 일격에 제압한 그 역량이라면, 그녀의 자신감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저는 길을 만들면 되겠군요.”
스릉!
자신의 검을 꺼내 든 루시아가 네르하의 옆에 섰다.
“저자는 우리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 할 상대가 아닙니다.”
의외의 등장이긴 했지만, 결국엔 아르바의 역할은 마왕에게 향하는 길을 막는 수문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되도록 빠르게 끝내죠.”
“좋아. 부탁하지.”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아르바에게 접근만 할 수 있다면, 이자카르가 부여한 이 힘을 이용해 놈을 끝장내는 건 쉬울 것이다.
사아아아!
시작은 클로이아의 손에서부터였다.
그녀의 손목을 감싼 팔찌에서 하늘색의 마나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리 군주의 숨결!”
쩌저저적!
클로이아가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전면의 모든 것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지평선 전체가 얼어붙는 듯한 무지막지한 광경이었다.
“……!”
쌓여 있던 눈이 다시 한번 얼어붙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클로이아가 펼친 빙결이 그대로 거대한 뱀의 하반신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캬아아악!
아르바의 소환수, 브리트라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생각보다 압도적인 마력의 양은 네르하의 움직임을 잠시 멈출 정도였다.
“서리 일족은 북방의 영지(靈地)에서만큼은 레벨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던데, 정말로 그렇군요.”
“확실히,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군.”
이 힘이 수여식에서 펼쳐졌다면, 아마 주단은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얼음 동상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클로이아라면, 어쩌면 영역을 펼친 아르바와도 자웅을 겨룰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것을 아르바 역시 느꼈는지, 클로이아를 향한 적의가 급속도로 솟구쳐 올랐다.
“클로이아, 설마 족장으로부터 빙정을 계승받았나?”
“설마. 내가 정말로 빙정을 계승받았다면.”
클로이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너 따위에게, 이리 발이 묶이지도 않았겠지.”
“……그렇군.”
자존심 덩어리인 아르바의 속을 긁은 발언이었지만, 의외로 아르바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만큼 북방에서 만년빙정의 위엄은 절대적이었다.
“빙정의 힘을 빌리지도 않았는데도 이런 위력이라.”
쩌억!
브리트라가 아가리를 쫙 벌렸다.
“역시 이대로 죽이기엔 아까워.”
콰과과과!
브리트라의 입에서 검은 불꽃의 브레스가 쏟아져 나와 클로이아를 직격했다.
“아까워도 어쩔 수 없지. 내 적인 이상.”
이무기들의 광선과 비교하면 불꽃 특유의 불규칙한 일렁임이 존재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브레스의 위력이 광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클로이아가 외쳤다.
“막지 말고 가요!”
“젠장, 알고 있어!”
뱀대가리에서 튀어나온 불꽃의 위력은 가히 8레벨에 근접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네르하와 루시아는 클로이아의 역량을 믿고 그대로 아르바를 향해 돌진했다.
‘거창한 공격을 날린 덕에 틈이 생겼다.’
더군다나 화염과 서리가 충돌함에 따라, 거대한 수증기가 시야를 가리기까지 했다.
기습을 노리는 타이밍이라면 이보다 더한 기회는 없었다.
탓!
수증기가 시야를 가린다고 하지만, 브리트라의 거대한 존재감까지 숨기진 못했다.
네르하와 루시아는 그대로 브리트라의 몸에 올라타 아르바를 향해 내달렸다.
“멍청한 놈들, 내가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고 보나!”
아르바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수십에 달하는 빛무리가 시야를 번뜩였다.
‘이무기들의 브레스!’
섣불리 회피를 시도했다간 기껏 안착한 브리트라의 몸체에서 튕겨 나갈 게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루시아가 네르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게 맡겨 주세요.”
화악!
루시아의 검, 그란디아에 나선의 바람이 휘날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건 바람이 아니었다.
오러 블레이드. 즉, 검강을 나선의 형태로 꼬아 선풍결(旋風結)의 형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멋지군!’
검기나 검사도 아니고, 유형화된 검강을 저런 식으로 형태를 가공할 수 있다는 건 어지간한 초절정의 고수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능의 축복을 받은 자들만이 가능한 기예 중의 기예!
“하아압!”
한 차례 기합을 내지른 루시아가 검을 횡으로 휘두르며 브레스를 받아쳤다.
까각! 까가각!
“크으읍!”
이를 악물며 악으로 깡으로 브레스의 옆구리를 도려낸다.
“이야아아아아악!”
루시아의 뜻 모를 괴성과 함께, 나선으로 깎아 낸 오러의 궤적이 기어코 일직선을 고수하던 브레스에게 다른 길을 만들어 주었다.
즉, 그 무지막지한 일격을 흘려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콰과과광!
그녀가 흘려 낸 브레스가 뒤쪽 설산을 강타하며 무지막지한 눈사태를 초래했다.
다행히 그 눈사태의 범위가 이곳 전장까지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기술의 영역만으로 따진다면, 그 베하네스라는 녀석을 추월했군. 훌륭하다.”
네르하는 루시아가 이루어 낸 위업을 아낌없이 칭찬했다.
“후, 후후, 후욱! 후우욱! 크흐흠!”
때아닌 극찬에 루시아의 입가가 흐물거렸다.
기쁨과 탈력감이 동시에 몰려던 탓에, 루시아의 입가가 상당히 괴상하게 변해 버렸다.
“네가 만들어 준 틈을 놓칠 수는 없지. 다녀오겠다.”
네르하는 루시아를 뒤로하고 그대로 가속을 붙였다.
그리고 다른 이무기들이 두 번째 브레스를 쏘아 내기 전에, 네르하는 기어이 브리트라의 머리 위로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네르하……!”
십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네르하와 아르바가 대치 상황을 이루었다.
선공은 흉신악살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린 아르바가 스태프를 휘두르면서 시작했다.
외부의 견제로 인해 다룰 수 있는 이무기들의 수는 고작 십여 개체 이하.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아르바의 역량은 7레벨을 추월해 있었다.
“네 전술은 이미 여러 번 관찰했다.”
시작은 아스타로스 토벌전 당시, 그리고 그 이후 3달 동안 이루어진 훈련 기간에서도 아르바는 끊임없이 네르하를 염탐했다.
“마법적 소질은 여전히 기껏해야 바멜과 비슷한 수준. 육체의 내구도를 믿고 투사처럼 근접에서 승부를 보곤 했지.”
스으윽!
아르바의 신형이 허공에 떠올랐다.
“원거리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7레벨 이상의 마도전에서 통용될 정도는 절대로 아니야.”
네르하가 사용한 원거리 마법은 기껏해야 ‘엘리멘탈 볼텍스’ 정도.
다만 마물이나 기사라면 몰라도, 아르바 수준의 마법사에게 사용했다간 대번에 술식이 역산되어 분해되어 버릴 거다.
“즉, 거리를 내주지만 않는다면, 네놈은 그저 샌드백에 불과하단 소리다.”
확실히, 아르바는 네르하의 성향과 전투 스타일을 정확히 파악하고 분석해 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건 어디까지나.
네르하가 가진 ‘마법사’로서의 일면일 뿐.
흠칫!
“그건, 무엇이냐?”
아르바는 네르하의 주위에 금빛의 광구들이 맺히는 걸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광구는 이무기들의 광선과는 사뭇 달랐지만, 압축된 힘의 크기 자체는 브레스의 위력을 넘어서 있었다.
아르바의 사고가 한순간 인지부조화를 일으켰다.
“분명, 그건.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네르하가 만들어 낸 광구는 분명 익숙하진 않아도 지식으로는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고한 경지에 이른 극소수의 ‘기사’만이 다룰 수 있는 것.
“강환(强環), 이곳 말로는 오러 서클이라고 부르던가?”
“네, 네놈이 어떻게 그걸?!”
“어떻게긴. 처음부터 다룰 수 있었는데.”
대륙 굴지의 실력자들 집합소라는 케프렌의 원탁에서도, 오러 서클을 발현할 수 있는 건 고작 서넛 정도.
절대로 네르하 따위가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마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
네르하의 육체는 이제 거의 완성형에 이르렀다.
마법과 무공의 융합은 어디까지나 효율과 가능성에 집중한 결과일 뿐.
‘편의’라는 측면에선 평생을 일구어 온 무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익! 그런 속임수에 넘어갈 것 같으냐!”
아르바의 이무기들이 다시금 브레스를 쏘아 냈으나.
네르하가 쏘아 낸 강환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대로 찢겨 나갔다.
“……!”
아마 아르바가 끝까지 네르하를 관찰했다면.
적어도 베드리우스전까지 주의를 기울였다면 어쩌면 상황은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바는 네르하의 전력을 얼추 파악하자마자 다른 후계들 쪽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고.
그것이, 아르바의 패인이 되었다.
* * *
“캬아아악!”
아르바의 소환수, 브리트라의 육중한 몸체가 얼음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수백 미터가 넘는 거대한 몸체에 불의 권능을 자랑하는 브리트라였지만, 결국엔 클로이아의 냉기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거대한 얼음 동상으로 화하고 말았다.
“……오오!”
“저 거대한 뱀을 단독으로!”
그 거대한 뱀이 무력하게 봉인되는 모습에, 후열에 있던 마법사들에게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브리트라의 발목을 잡는 걸 넘어, 아예 압도적으로 찍어누른 것이었다!
클로이아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쪽도 곧 끝나겠군.’
저 하늘에선 네르하와 아르바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딱 봐도 네르하가 아르바를 압도하며 밀어붙이고 있는 게 보였다.
이대로라면 5분도 지나지 않아 결착이 날 것이다.
“하하하, 예상대로군. 너무 예상대로라 재미가 없어.”
오싹!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클로이아의 등골에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