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북방 결전 (1)>
아르바 라데우스.
현 라데우스 가주, 카이젤의 삼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찌감치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리브라에 들어간 첫해에 5레벨에 이르렀고, 4년 뒤 졸업 시즌에는 이미 6레벨에 올라선 상태였다.
그 후 본가에 귀환해 세력을 끌어모으던 도중 7레벨을 돌파. 본가의 장로들에게 극찬을 받으며 많은 지지 세력을 확보했다.
‘빛의 마도사’라는 이명까지 얻으며 승승장구하던 아르바는, 진지하게 라데우스의 차세대 대권을 노렸다.
차남 루드빅의 재능과 경지는 이미 넘어섰다.
7레벨에 이르지도 못한 바멜, 레티안, 세티안 남매는 볼 것도 없었다.
네르하, 네이하?
그런 것들조차 경쟁자로 여겨야 하나?
물론 막내 네이하 라데우스의 재능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지만, 그 아이가 재능을 꽃필 즈음엔 이미 모든 결과가 정해진 이후일 것이었다.
아르바는 오만했고, 그럴 만한 실력과 재능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았고, 가문에서 부여한 임무를 맡는 족족 성공시키며 입지를 높여 갔다.
그런 아르바가 최초로 ‘실패’라는 경험을 겪은 건, 바로 장남,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에게 정면으로 도전했을 때였다.
―아쉽게 되었구나, 동생아.
아르바가 리브라를 졸업하고 바깥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장남 바스텔은 반대로 모든 대외활동을 중단하고 폐관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다만 그때는 지금과 같이 완전히 은둔한 것은 아니었기에, 만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만날 수는 있었다.
7레벨에 이르러 자신의 실력에 확신이 있었던 아르바는 정식으로 바스텔에게 도전했다.
물론 바스텔이 정식으로 소가주 자리에 임명된 건 아니었기에, 지위의 확립보다는 대외적인 선전의 이유가 더 강했다.
‘내’가 장남인 바스텔보다 더 강하다는 걸, 가주인 카이젤에게 어필하고자 하는 선전 말이다.
하지만…….
―영역에 대한 본격적인 깨달음 없이는 날 이길 수 없다.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몸을 좀 단련해 보는 건 어떠냐? 네게 도움이 될 거다.
바스텔은 그런 조롱과 함께 사라졌다.
그것을 모욕이라 느낀 아르바는 더 강하고 다양한 술식을 익혀 도전했지만, 단 한 번도 바스텔에게 생채기조차 입히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약 다섯 번 정도의 도전이 이어졌을 때.
―미안하지만 너와 놀아주는 건 당분간 불가능할 듯하구나.
바스텔은 그 말을 끝으로 완전한 폐관에 들어가 버렸다.
‘놀아? 지금까지 내 도전을 놀이 정도로 여겼다고?’
아르바는 분노했다.
지난 세월 뼈를 깎는 노력이 바스텔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게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비참한 마음도 들었다.
5년의 나이 차.
자신의 재능이라면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앞으로 10년을 노력해도, 20년을 노력해도.
도저히,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바스텔이 완전히 은둔해 버린 이후에도.
아르바는 패배감을 가슴 속에 안고 외부 활동을 이어 나갔다.
바스텔의 은둔 이후 장녀 마하가 새로운 소가주 후보로 떠올랐지만, 그녀는 바스텔의 자리를 넘보기보단 현상을 유지하는 것에 신경을 썼다.
차남 루드빅은 애초에 그 자질이 아르바보다 떨어졌으니, 자연히 아르바의 입지는 나날이 상승.
기어코 카이젤의 북방 원정이 끝난 뒤, 그 뒷수습을 위해 가주 대행이라는 자리를 맡는 지경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아르바의 비상을 주목했고.
본인도 이대로라면 라데우스의 차세대 대권주자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까.
북방 한가운데 나타난 마왕 비슈나르에 의해, 자신이 이끌던 부하들이 찢겨 나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콰직!
아르바의 갑옷 어깻죽지가 그대로 박살 났다.
용의 발톱으로 변한 네르하의 오른팔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아르바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고통을 무시하며 웃었다.
“흐, 흐흐흐…….”
“왜 웃지?”
“너나 나나, 그다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구나.”
아르바가 손을 들어 네르하의 오른팔을 가리켰다.
“그 팔. 그 팔 역시 순수한 네 힘이 아니라 빌려온 힘이지 않으냐? 그것도, 아주 고위 마족에게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
원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와 나를 도매금으로 싸잡진 말아 줬으면 하는군.”
네르하는 불쾌감을 보였다.
“패배해서 굴복한 것까진 뭐라고 하진 않겠는데, 그걸 이런 식으로 끌고 오는 건 선을 많이 넘었지.”
아르바의 도발은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네르하의 반박에 표정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네 말이 맞다. 나는 영혼을 팔고 내가 속한 곳에서 등을 돌렸지.”
순간, 아르바의 눈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그런 만큼, 한 번 일을 벌인 이상,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목표를 이루고 말겠다.”
“그 결과물이 빈 껍데기라고 해도?”
“그렇다 해도!”
이미 과정 따윈 아무런 상관도 없다.
오로지 라데우스란 이름의 정점. 그것만을 노리고 있을 뿐이다.
네르하는 혀를 찼다.
“그 집념만큼은 인정하지.”
광기에 물드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적어도 정한 목적에 대해서만큼은 최상의 효율을 뽑아내는 방법이긴 하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네르하의 눈엔 보였다.
아르바를 괴롭히는 체내의 불완전한 흐름이 말이다.
“마왕에게 굴복한 건 꽤 예전 일이라도 쳐도, 네가 그 모습으로 변한 건 최근이겠지. 어쩌면 하루도 지나지 않았을 수도.”
움찔!
네르하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그 어울리지 않은 갑옷을 입은 이유도 단순히 정체를 숨기려는 목적은 아닐 거야. 급격한 신체의 변화에 대한 부작용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서겠지.”
이 북방 원정군 자체가 쟁쟁한 실력자들의 집합소다.
굳이 네르하까지 가지 않아도 이들 한가운데에서 마기를 숨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넌 정말로 내가 알던 네르하가 맞는지 의심스럽구나.”
외모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자신이 알았던 과거의 네르하와는 전혀 달랐다.
“그래, 네 녀석 때문에 내 모든 계획이 헝클어졌다.”
아르바가 다시금 양팔을 벌렸다.
―마계 영역, 마룡의 대지!
“……!”
“지금부터, 네놈 하나만을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
‘영역이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 마계 영역이 다른 식으로 변질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심상각인영역에 한 발을 걸친 아르바의 영역은, 기존의 마계 영역이 불가능했던 변칙을 창조해 낼 수 있었다.
킬로미터 단위로 넓게 퍼졌던 아르바의 영역이 순식간에 50m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영역의 바깥과 확고하게 달라지면서 세상의 명암이 흑백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안쪽은 흑. 바깥쪽은 백.
그 색의 변화는, 공간 내외부의 차원이 단절되었다는 증거였다.
‘마치, 투기장 같군.’
오로지 승자만이 빠져나올 수 있는 그런 투기장 말이다.
성공적으로 네르하를 고립시킨 아르바가 비릿하게 웃었다.
“너 하나만 죽이면, 나머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
라데우스의 마법사들이 참전하면 죽도 밥도 안 되니, 처음부터 네르하를 꾀어내 이런 식으로 일대일 대결을 유도할 생각이었던 거다.
차원 단절은 단순히 마력량이나 화력만으로 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 멀리 클로이아와 루시아가 당황해하는 것이 보인다.
팟!
지금껏 원거리전을 고수하던 아르바의 움직임이 변했다.
아르바의 주위를 맴돌던 이무기들이 자리를 뛰쳐나왔다.
그리고 네르하의 전신을 둘러싸며 아가리를 벌렸다.
“네놈의 마나도 무한은 아니겠지. 확실하게 물량으로 눌러주마.”
순간 화력으로 압도하느냐, 그러지 못하고 밀려나느냐.
아르바가 생각한 승부의 포인트는 이것에 있었다.
하지만.
서걱!
네르하를 노렸던 이무기들의 머리가, 자신이 눈치채기도 전에 모조리 잘려 나갔다.
“어?”
고위 마법사의 인식 속도를 넘어서는 초속의 참격.
아르바는 그때야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아까 말했잖아?”
그 참격의 근원은 오른팔의 용조를 통해 화려하게 피어난 수강(手强)에 있었다.
네르하가 차갑게 일갈했다.
“굳이 마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이미 전장은 하늘 위.
그리고 차원단절 현상으로 인해 이쪽의 상황은 바깥에선 제대로 관찰할 수도 없었다.
“……!”
“기사와 마법사의 대결에서 스스로 전장을 좁혀 버리다니. 어리석은 놈.”
“기, 기사라고?!”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기사와 마법사의 대결에서, 마법사의 우위는 월등한 대응력과 전장의 활용성.
아르바는 마법사를 상대한다는 가정하엔 뛰어난 전략을 들고 왔지만, 이 전략은 정작 기사를 상대로는 완전히 자가당착에 빠지는 우책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건 아르바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네르하의 존재가 이레귤러였을 뿐.
5레벨을 넘어서는 마법의 시전이야 가능한 일이라고 봤다.
하지만 오러 서클은 케프렌의 초대 가주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이 나이대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시전하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처음 오러 서클을 본 그때, 현실을 부정하지 말고 눈치챘어야 했다.
“너, 너! 네르하가 아니구……!”
콰직!
네르하의 주먹이 아르바의 심장. 즉 마핵이 생성된 부분을 관통했다.
“아니, 난 네르하다.”
부르르 떨리는 아르바의 눈이 네르하의 차가운 눈과 마주했다.
“라데우스의 가장 드높은 자리에 앉을 자다.”
“쿨럭!”
아르바의 입가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혈류와 함께 마력까지 역류하면서 기껏 펼친 마계영역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이, 이대로.”
“……!”
턱!
덜덜 떨리는 손으로 네르하의 팔목을 부여잡은 아르바가 눈을 부라렸다.
“이대로, 끝날 것 같으냐!”
촤르르륵!
아르바의 마력이 폭주한다.
이미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힘이었지만, 아르바는 필사적으로 마력을 제어하며 발악했다.
‘정말 근성 하나는 끝내주는군.’
이 근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쏟았다면, 분명 더욱 치명적인 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아르바의 발악이 위험한 건 사실이었다.
‘이대로 자폭하기라도 했다간 큰일이다.’
정보의 부재와 전략의 미스로 패배했을지언정, 아르바가 지닌 마력 자체의 양은 네르하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무엇보다, 아르바는 지금 이대로 죽어선 안 되었다.
적어도 녀석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때.
“쯧쯧! 이미 승부가 났는데도 추하게 발악하다니.”
“……!”
퍼억!
네르하가 인지하기도 전에.
묵직한 주먹이 시야 바깥에서 날아와 아르바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박살 난 뇌수와 머리뼈가 흩날리면서도, 네르하는 아르바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보다 누군가가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개입했다는 것에 경악했다.
갑자기 튀어나와 아르바를 쳐죽인 거한은, 쓰러져 가는 시체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배신자에게 어울리는 최후로군. 진작 이랬어야 했거늘.”
“……너는.”
놈의 시선이 네르하에게로 향했다.
“간만에 보는구나, 네르하 라데우스. 그때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많이 컸구나.”
“설마, 크루갈인가?”
인상도 다르고, 체격도 다르다.
무엇보다 느껴지는 힘 자체가 다르다.
그럼에도 네르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눈앞에 나타난 존재가, 과거 자신이 한 번 물리쳤던 무투파 마족, 크루갈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