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북방 결전 (2)>
크루갈이 ‘어떻게’ 다시 중간계에 돌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녀석의 등장으로 인해, 네르하의 뇌리를 가득 채운 의문은 단 하나.
“중앙군은, 어떻게 되었지?”
“글쎄.”
말끝을 흐린 녀석은 오히려 익살스럽게 반문했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뿌득!
덩치는 곰 같지만 놈의 태도엔 확실히 여우 같은 면이 있었다.
‘놈이 혼자 중앙군을 전멸시켰을 리는 없다.’
특히 중앙군엔 8레벨의 대마법사인 류레이아가 건재한 만큼 더더욱 그러했다.
“흐흐흐, 이렇게 다시 싸울 기회가 찾아올 줄이야.”
“그때의 복수를 하고 싶나?”
“당연하지!”
쿠구구궁!
크루갈이 고개를 쳐들며 포효하자 대지가 뒤흔들린다.
저것이 단순히 마력이 아닌 순수한 신력(身力)으로 이루어 낸 것임을 알자, 네르하는 경외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무대가 적절치 않군.”
“뭐?”
“이미 패자가 결정된 무대에서 싸워 봤자 흥만 떨어질 뿐이지.”
그럼 왜 여기 온 거냐?
네르하는 그 말을 내뱉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런데 네르하의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빙긋 웃은 크루갈이 몸통만 남은 아르바의 시체를 툭툭 차며 말했다.
“이놈을 제거하러 왔지.”
“제거라고?”
“네놈이 이기든 지든, 이놈의 결말은 결국 이리되는 것 외엔 존재하지 않지.”
토사구팽.
야망을 위해 모든 걸 팔아치운 자의 결말이라고는 너무나도 비참했다.
조용히 몰아치는 네르하의 기세를 접한 크루갈이 어깨를 으쓱했다.
“분노가 여기까지 느껴지는군. 하나 너무 위선자 같은 반응이 아닌가?”
“…….”
저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아르바의 배신으로 북방 원정대가 자칫 실패를 넘어 전멸까지 예상되었던 만큼, 네르하의 반응은 확실히 과한 면이 있었다.
“그래도, 너 따위에게 죽어서는 안 되는 놈이었다.”
네르하는 필사적으로 화를 삼켰다.
여기서 놈에게 분을 토해 봤자 손해를 보는 건 자신.
어떻게든, 지금 상황에선 놈을 도발해 정보를 도출해야만 했다.
“무대라는 건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지. 너와 나의 대결은 가능하면 많은 관중들이 있는 무대에서 치르고 싶거든.”
의외로 녀석은 성실하게 답했다.
“넌 내가 인정한 몇 안 되는 인간이니까. 가능하면 화려하게 죽여 줘야지.”
네르하가 계속해서 물었다.
“아스타로스를 처리한 건 네놈이냐?”
“오오, 그 배신자 년과 결탁한 게 너였구나. 이건 의외인걸?”
“질문에 대답해라.”
“죽지도 못하고, 역소환되지도 못하고 그년의 근처에 묶여 쪽쪽 빨리고 있지. 원래라면 반대가 되었어야 하는데 말이야. 하하하하!”
확실히 배신자인 아스타로스를 이대로 마계에 역소환시킬 수는 없으니, 나름 타당한 처벌 방식이긴 했다.
이후로도 네르하는 몇 가지의 질문을 했고, 또 크루갈은 성실하게 답해 주었다.
물론 그 답이 진실인지는 고민해 봐야 할 문제였지만 말이다.
“마왕령의 중앙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크루갈이 말했다.
“비슈나르의 온전한 강림은 그다지 신경 쓰진 않지만, 그래도 돕겠다고 약속한 이상 확실하게 해야겠지.”
네르하는 순간 불안감을 느꼈다.
서로의 전력 차는 명백하다.
크루갈은 어디까지나 비대칭 전력일 뿐. 희생을 감수하고 정말 제대로 붙는다면 고작 시간벌기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런 자신감이라면, 분명 자신이나 본진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곳에 뭐가 있지?”
“절망.”
빙긋 웃은 크루갈이 네르하를 도발했다.
“돌아갈 건가?”
“목 닦고 기다리고 있어라.”
“크하하하! 그래야 내가 인정한 숙적이지.”
그 말을 끝으로 크루갈은 사라졌다.
* * *
“죄,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저희가 큰 도움이 되지 못해…….”
부대의 수뇌부들이 네르하에게 다가오며 사죄를 표했다.
“아니, 아르바의 전력을 일부 묶어 둔 것만으로도 제 몫을 한 거다.”
“하지만…….”
“아르바를 마크하기로 한 건 내 결정이야. 그 이후에 벌어진 건 어디까지나 내 책임이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그들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못했다.
그 이유 중에는, 마지막에 난입한 크루갈의 존재감에 완전히 압도된 것이 컸다.
침울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네르하는 해야 할 일을 지시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중앙군의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마법사 몇을 뽑아 중앙군 쪽으로 전령을 보내. 중앙군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네, 사령관님!”
“우리는 그대로 마왕령 중앙으로 향한다. 그리고 출발 전에…… 마하타, 잠깐 나 좀 따로 보지.”
“아, 넵!”
마하타는 쭈뼛거리며 네르하를 종종종 따라왔다.
“시체에게서 정보를 뽑아내는 게 가능한가?”
원래라면 어떻게든 목숨을 붙여 놓은 다음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크루갈의 난입으로 이 계획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시, 시체에게서 말인가요?”
“정신계 마법이 꼭 살아 있는 생물을 대상으로 할 필요는 없다고 알고 있다. 아니, 오히려 무생물보다 생물을 대상으로 시전하는 게 더 어렵다고 들었다만.”
“그, 그렇긴 한데요.”
마하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해요. 시체는 이야기가 달라요.”
마하타의 말에 의하면 시체는 막대한 정보를 품고 있지만 ‘죽음’이란 현상으로부터 보호받고 있기에 정보를 얻어 내기 훨씬 어렵다고 한다.
“정신계 중에서도 7레벨 이상의 사이코메트리 능력자가 있어야만 시체에게서 온전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어요.”
네르하는 진심으로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가?”
마법사 중에서도 정신계 능력자는 희귀하다.
그리고 사이코메트리 쪽으로 능력을 발달시킨 능력자는 더더욱 희귀하며, 그 수준을 7레벨 이상으로 잡으면 드넓은 라데우스에서도 고작해야 한두 명 정도에 그칠 것이다.
‘아무래도, 마나 연공법의 구결을 얻는 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군.’
그때, 마하타에게서 한줄기 광명이 비쳤다.
“하, 하지만 제 스승님이라면, 가능할지도…….”
“스승?”
“그, 정신계 마법은 무조건 사제관계로 시작할 수밖에 없거든요.”
‘세뇌’라는 특수성, 그리고 그것의 습득 난이도와 계발 난이도를 고려하면 당연한 말이었다.
“제 스승님은 좀 자유로운 분이시라. 그, 적절한 대가를 제시할 수만 있다면, 뭘 요구하든 들어주실 거예요. 무, 물론 보안 역시.”
마하타는 확실히 눈치가 빨랐다.
네르하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타인이나 외부에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챈 것이었다.
“호오?”
이러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북방의 일이 끝나면 그 스승과 연결해 줄 수 있겠나?”
“네, 네! 스승님은 지금쯤 그란시스 마탑에 계실 테니, 아마 연락하는 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좋아, 부탁하지.”
“그, 그건 이번 전장에서 살아남은 뒤가 되겠지만요. 하, 하하…….”
마하타는 멋쩍게 웃었다.
정신계 마법의 사용자인 마하타는 다른 마법사보다도 훨씬 더 시류 및 흐름에 민감했다.
특히 아르바의 배신과 크루갈의 등장으로 인해 어수선해진 분위기에 누구보다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네르하는 피식 웃으며 마하타의 어깨를 다독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테니 걱정 마라.”
* * *
아르바의 배신이라는 충격적인 전개를 뒤로하고.
네르하의 서군은 그대로 마왕령 중앙으로 향했다.
매복을 조심하며 천천히 진군했지만, 그 이후로는 아무런 습격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약 20분 뒤.
작전 시작 전 보았던 거대한 검은 꽃봉오리를 눈앞에 두고.
서군, 중앙군, 동군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돌파를 끝마치고 합류했다.
‘총사령관은 무사하군.’
약간 지친 기색은 있었지만, 류레이아와 중앙군 수뇌부들은 최대한의 역량을 보존한 채 목적지에 도달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직계들이 몰려 있던 동군이었다.
‘지휘자인 게레온 장로는 어디 가고 왜 루드빅이 군을 이끌고 있지?’
아니, 그 전에.
‘바멜과 레티안, 세티안 남매가 보이질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동군의 전력 자체가 상당히 감소해 있는 느낌이었다.
저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범인은 한 명뿐이다.
함께 동군의 상황을 살펴보던 클로이아가 괴로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할머니…….”
“정신 차려라, 클로이아.”
“아, 알고 있어요.”
클로이아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감정에 흔들려서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때, 루시아가 네르하에게 다가왔다.
“어째서인지 공격할 낌새가 없군요.”
“……그러게.”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곤 하지만 그래도 10분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원래라면 먼저 도착한 중앙군과 동군이 그대로 저 검은 꽃봉오리를 소멸시키기 위해 돌진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뭔가, 변수가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뭐지? 총사령관의 표정이 좋지 않다.’
먼 거리였지만 네르하는 확실히 보았다.
어째서인지 총사령관 류레이아의 표정에 눈에 띄게 굳어져 있다는 걸.
그 표정은 당황이나 당혹 같은 가벼운 감정보다도 무거운, ‘두려움’에 가까웠다.
“하하하하! 어서들 와라, 라데우스의 마법사들아! 마왕 비슈나르의 영역에 온 걸 환영한다!”
마치 쇼를 보기 위해 찾아온 관객들을 맞이하는 사회자와도 같이.
검은 꽃봉오리의 중앙에서, 크루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옆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젊은 모습의 엘로이아 블루벨벳이 함께 나타났다.
‘고작 저 둘로 이 군을 막을 생각인가?’
네르하가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사, 사령관님. 큰일입니다.”
세드릭에 비해 어지간해선 표정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다르미안 엔시스가 창백해진 모습으로 네르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지팡이를 쥔 다르미안의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외부의 마나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고 있습니다!”
“뭐라고?”
“아까부터 요격을 위해 외부의 마나를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도무지 제어가 되지 않습니다. 이, 이래서는!”
그 말뜻을 이해한 네르하 역시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저 멀리서, 크루갈의 확인 사살이 이어졌다.
“하하하! 이미 눈치챈 자들도 많겠지만, 이곳 중심부는 비슈나르의 권능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지. 일부러 꺼놓은 ‘바깥 부분’과는 다르게 말이야!”
‘설마.’
네르하는 직감했다.
과거 아르바가 수백의 마법사들, 그것도 가주가 남긴 최정예들을 데리고도 마왕에게 무기력하게 괴멸당했을 때 뭔가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영역 자체에 외부의 마나 제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권능이 있을 줄이야!
‘마왕의 영역이라 해서 강력한 소환물의 출현에만 신경 썼었는데,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군.’
크루갈이 절망 운운하며 겁을 준 게 정말로 괜한 말이 아니었다!
“즉, 너희는 인간 사냥터에 스스로 발을 들이민 셈이다! 하하, 하하하하!”
“전군 후퇴! 소대 단위로 쪼개져서 마왕령을 벗어난다!”
류레이아의 판단은 빨랐다.
다소의 희생이 있더라도, 전멸을 피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냈다.
사전에 빼둔 전력으로 운석 소환이란 보험을 들어놨으니, 살아남기만 하면 어떻게든 위기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일 터다.
“어이쿠! 도망가게 둘 수는 없지!”
크루갈이 그대로 류레이아에게 달려들었다.
외부의 마나 제어가 불가능하다는 건, 막대한 마나를 소모하는 심상각인영역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뜻.
그건 즉, 류레이아는 평소 역량의 반의 반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크윽!”
흉포한 기운을 흩날리며 달려드는 크루갈을 바라보면서, 류레이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야 해!’
하지만.
콰직!
그녀가 평생을 아껴 왔던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지팡이가, 크루갈의 주먹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박살 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