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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53화 (153/237)

153화

<북방 결전 (3)>

네르하는 전령에게 명령을 전달받고는 생각했다.

‘왜 후퇴하지?’

아직 승산은 있었다.

마법사가 외부의 마나를 다루는 자라고는 하지만, 체내에 품고 있는 마나의 양이 적지는 않다.

5레벨을 기준으로 충분히 대여섯 번 정도는 날릴 수 있고, 그런 마법사의 수는 무려 천여 명에 달한다.

아무리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지만, 함정 하나에 걸렸다고 마지막 승부처에서 이렇게 쉽게 도망가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뭔가 이유가 있어.’

네르하 본인이 놓친 무언가를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사령관님,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명령대로 중앙군과 합류하지.”

후퇴를 결정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린 패잔병은 아니다.

굳이 나눠서 도망가야 할 이유도 없고, 일군으로 뭉쳐서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크루갈이나 엘로이아가 있다 하더라도, 당장 여력이 충분한 군에 전력을 박진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라면 당연히.

“마물이다!”

마계 영역의 기본 기능인 마물 소환을 통해 여력을 깎아 내려 드는 것이 정석이었다.

수십 단위씩 뭉텅이로 소환되는 마물들의 모습에 네르하가 빠르게 소리쳤다.

“대응은 하나의 부대로만! 하이네가 앞으로 나서서 저지한다! 중요한 건 절대 고위 마법을 남발하지 마라. 최대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예, 사령관님!”

“하이네의 마나 소모량이 절반 이하가 되면 교체! 최후방으로 빠진다! 그다음으로 살로페가 나서고 크로노와 멤피스 순으로 차륜전을 펼쳐!”

“네!”

네르하의 지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려던 순간.

부대의 눈앞에 거대한 얼음의 장벽이 나타났다.

콰지지지직!

“……?!”

막 소환되는 마물들이 얼음에 휩쓸려 무참하게 쓸려나갔다.

최소 7레벨 이상이 분명할 이 얼음 계열 마법의 시전자는 다름이 아니었다.

“클로이아?”

빌빌거리던 다른 마법사들이 경악하며 클로이아를 바라보았다.

“외부의 마나를 통제할 수 없는 게 아니었나?”

네르하의 물음에 클로이아가 코웃음을 쳤다.

“흥, 그건 일반적인 마법사들이나 그런 거구요.”

“넌 일반적이지 않다는 거냐?”

“방금 전의 마법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마나를 끌어온 게 아니니까요.”

네르하는 얼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북방에 온 뒤로 클로이아의 신위가 무지막지하게 강해진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지맥을 통해 어딘가에서 힘을 끌어왔군.”

“정답.”

“그 정체는 만년빙정인지 뭔지겠지?”

“잘 아시네요?”

“서리 일족은 일족 자체가 빙정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배웠으니까.”

그리 좋은 어감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야기가 달랐다.

비록 단 한 명뿐이라지만, 빙정의 영향으로 마왕의 권능에서 벗어난 전력이 있다는 건 고무적이었다.

“문제는, 그 혜택을 받는 게 저만이 아니라는 거죠.”

클로이아의 시선이 저 멀리 있는 자신의 조모에게로 향했다.

완전히 회춘한 엘로이아 블루벨벳은 가까이서 비교하면 조손 관계라기보단 자매처럼 보일 정도로 외모가 비슷했다.

“당신이 말했죠? 나는 저분과 싸우게 될 수도 있다고.”

“그렇다고 굳이 일대일을 하라는 소린 아니야.”

“하지만 제가 저분을 붙잡아 둘 수 있다면 상황이 상당히 편해지겠죠.”

이미 클로이아는 마음을 먹은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네르하가 굳이 그녀를 제지할 이유도 없었다.

‘현재 제대로 된 힘을 낼 수 있는 전력은…….’

절대다수의 역량이 반의 반토막이 난 상황에서 외부 마나에 구애받지 않는 전력은 귀하다.

그 말은 즉.

“루시아.”

“네.”

사실상 유일한 기사 전력인 루시아의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네르하가 그녀에게 말했다.

“네 역할이 가장 중요해.”

“무슨 역할이죠?”

“나와 함께, 저놈을 막는 거.”

네르하의 시선이 류레이아와 대치 중인 크루갈에게 향했다.

“상황을 보니 아마 총사령관은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8레벨에 이른 대마법사의 마나 제어마저 막아 버린 마왕의 힘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네르하조차 필사적으로 의념을 움직이고 마나를 제어해 보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루시아가 전투 중인 크루갈의 모습을 살짝 흘겨보았다.

“저게, 이전에 남쪽에서 아녜스와 함께 물리쳤다던 그 마족인가요?”

“맞아.”

“어떻게 이겼어요?”

“……그땐 그나마 할 만했어.”

루시아의 눈으로 봐도 지금 크루갈의 강함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게 느껴질 거다.

“아마도, 목숨을 걸어야겠군요.”

“그렇겠지.”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왜 후퇴하는 거죠? 저자가 아무리 강하다곤 해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루시아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이의를 제기해 왔다.

“아마 내 예상이 맞는다면, 크루갈이나 엘로이아가 문제가 아닐 거다.”

“네?”

“저거.”

네르하의 손가락이 검은 꽃봉오리, 비슈나르의 본체에게로 향했다.

“아마도 저거. 곧 우화할 것 같으니까.”

* * *

분명 본진의 참모진들은 비슈나르의 우화까지 걸리는 시간이 약 5일이라고 했었다.

문제는 이 계산에 대한 근거 중 일부가, 아르바가 가져온 정보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참모진들의 사실상 수좌는 루드빅. 그리고 그 루드빅은 아르바에게서 마족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었지.’

아르바야 본인이 북방에 있을 때 수집한 정보라고 둘러댔겠지만, 지금 본다면 마왕에게 직접 건네받았던 게 확실했다.

‘아르바라면 정보 조작 정도는 쉬웠겠지.’

거기다 당시의 루드빅은 아르바가 가져온 정보들로 상당한 공을 세웠으니, 어느 정도 검증을 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론 신뢰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아르바조차도 마왕에게 속았다거나.’

아르바의 결말이 숙청임을 고려하면 이 가정도 현실성이 있었다.

‘어찌 됐건 죽어서도 상당히 피곤하게 하는군.’

네르하는 두 사람만을 대동하고 빠르게 본진을 향해 내달렸다.

아니, 정확히는 수세에 몰린 류레이아를 향해서였다.

“흐흐흐! 역시 엘프답게 바퀴벌레처럼 피하는 건 잘하는구나!”

호쾌하게 웃고 있었지만, 크루갈의 이마에는 한 줄기의 굵직한 혈관이 돋아나 있었다.

엘프는 숲의 일족이라 불리는 만큼, 산악전과 백병전에서도 상당히 뛰어난 역량을 지닌 전사의 일족이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기량 차이는 어쩔 수 없었는지, 그녀의 한쪽 팔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흥, 마왕의 백업이나 받으면서 싸우는 주제에!”

“세계수에게 혜택을 받은 년이 할 말은 아니군.”

부웅!

크루갈이 주먹을 휘두르자, 그 궤도를 통해 거대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권풍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거대한 마기의 폭풍이었다.

‘망할!’

류레이아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부관들이 그녀를 돕기 위해 합류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나타난 엘로이아 단 한 명에게 가로막혀 상관이 당하는 걸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하지?”

퍽!

류레이아의 숨통은 네르하가 도착하고 나서야 트일 수 있었다.

네르하의 기습을 허용한 크루갈의 신체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부러진 지팡이를 지지대 삼아 류레이아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헉, 헉! 괜찮아, 보여?”

“솔직히 그렇게 보이진 않는군요.”

“왜 왔어? 후퇴하란 명령은 전달했을 텐데?”

“도우러 왔죠. 잘못하면 정말로 전멸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잘 알고 있네.”

허리를 편 그녀는 정면에 있는 꽃봉오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완전히 속았어. 시간에 상관없이 언제든 우화할 수 있도록 준비가 끝나 있었던 거야.”

“얼마나 걸립니까?”

“30분.”

실화인가.

앞으로 30분이면 저 거대한 봉오리가 열리고 마왕이 강림한다고?

“최대한 마왕령을 벗어나야 해. 만약 그게 안 된다면…….”

류레이아의 눈에 은은한 두려움이 담겼다.

“전멸이다.”

* * *

동시간.

북방 도시 아르지엔.

‘힘들군.’

아르지엔의 시장, 넥스 데인은 요 며칠 이어진 철야에 고개를 떨궜다.

지금 아르지엔의 성밖에는 통일되지 않은 복장이 인상적인 2만의 군세가 있었다.

그들은 제국에 소속된 북방의 귀족들이 보낸 군세였으며, 라데우스 가문을 지원하기 위해 편성된 전력이었다.

‘빌어먹을 귀족 놈들. 북방에서 남방 과일을 찾고 앉아 있으니.’

군대도 군대이지만, 문제는 저 군대가 ‘귀족 연합군’이라는 점에 있었다.

당연히 군대 안에 온갖 귀족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시장은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그나마 이 상황에서 편한 점이 하나 있다면, 군을 이끄는 수뇌부들만큼은 나름 말이 통한다는 점이었다.

“필요한 물자는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수고했소. 피곤할 텐데 이만 나가 보시오. 우린 군략 회의에 들어가야 하니.”

2만의 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자, 페가룬의 수호자라는 이명으로 유명한 가비스 엘 케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시장이 나간 뒤, 노년의 기사 가비스는 신형을 돌려 중앙에 마련된 작전판으로 향했다.

“라데우스의 엘프 년은 성급하군. 아무리 우리의 도움이 싫다고는 해도 이리 성급하게 총공격을 실시하다니.”

회의에는 약 열 명의 인원이 참석해 있었다.

라데우스 측에서 받은 지도를 살펴보던 다른 이들이 비웃음을 흘렸다.

“어찌 됐든 약속대로 올라가야 합니다. 뭐가 됐든 우리가 도착했을 땐 결판이 나 있겠지만 말이죠.”

“이거, 괜히 이런 추운 곳까지 와서 고생만 하고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라데우스의 잡것들이라곤 해도, 능력은 어느 정도 있겠죠.”

회의라곤 해도 이미 큰 틀이 잡혀 있던 만큼, 대부분의 기사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투덜거렸다.

그때였다.

“아니, 그리 쉽게 결말이 나진 않을 겁니다.”

회의장 구석에서 여린 목소리 하나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나온 쪽을 향해 돌아갔다.

그 목소리의 주인.

이제 막 앳된 티를 벗은 소년이 시선이 좀 부담스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어쩌면 조금 고생해야 할 수도 있을 거예요.”

“대공자, 뭔가 아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대공자라 불린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피냄새가 섞여 있습니다.”

‘피냄새?’

‘여긴 전장에서 못해도 수십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인데?’

소년보다 몇 배는 더 살아온 노년의 기사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의 소년은 가끔 이런 식으로 뜬구름 잡는 말을 하는 때가 있었다.

“그나저나, 누님이 북방에 있는 건 확실하겠죠?”

그 말을 들은 기사들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루시엘라 공녀가 전쟁에 참여한 건 확실합니다. 라데우스 측에서도 인정했구요.”

“다행이네요. 누님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

기사들은 그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녀를 가문에서 쫓아낸 거나 마찬가지인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자, 자. 어느 정도 보급도 끝났으니 빨리 올라가죠!”

“대공자.”

“오랜만에 누님도 다시 보고 싶고, 라데우스의 마법사들이 어떻게 싸우는지도 보고 싶습니다!”

“하하, 대공자의 호기심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군요.”

기사들에겐 소년의 모습은 마치 떼쓰는 손자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지만, 소년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 마왕이란 존재도, 한번 보고 싶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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