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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54화 (154/237)

154화

<북방 결전 (4)>

“묵직하군.”

네르하의 발차기에 나가떨어졌던 크루갈이 흙을 털어 내며 일어났다.

“하나, 확실히 아직 완성형은 아니야.”

크루갈은 수천 년을 전사로 살아왔다.

그만큼 보는 눈도 정확했다.

‘몇 년 정도만 지나면, 정말 지고한 쾌락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쾌락이란, 정점에 선 무인의 심장을 자신의 손으로 뽑아낼 때의 감각을 말함이었다.

‘정말로 그 오백 년 전의 인간에게 도달할 수 있는 자질이다.’

세계의 근원에 속한 힘을 구현해 자신의 심장을 꿰뚫던 그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비슈나르가 있으니 그럴 일은 없겠고. 여러모로 아깝군.’

비슈나르는 그야말로 세상 모든 것들을 속였다.

적은 물론 아군까지도.

그리고 그 결과, 중간계에서 숨을 죽여 온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첫 번째로 마신의 계시를 받을 영광을 안기 직전까지 왔다.

“자, 어떻게 할 거냐?”

크루갈은 흥미진진하게 적들의 모습을 살폈다.

원래라면 자신이 나서지 않고도 지금쯤이면 북방 전역을 손에 넣고 마신강림이 온전히 이루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비슈나르의 계획을 어느 정도 망쳐 버린 건, 다름 아닌 자신을 한 번 죽였던 자.

이런 절망적인 상황조차도 반전시킬 수 있다면.

분명 그는, ‘영웅’이라 불리는 존재일 것이다.

* * *

“후퇴 명령을 철회해 주십시오.”

“뭐? 너 제정신이야?”

“전 지극히 제정신입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크루갈을 바라보며, 네르하가 말했다.

“요는, 30분 안에 저 둘과 마왕까지 치워 버리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럴 가능성이 보였다면 그렇게 했겠지.”

류레이아가 한숨을 내쉬며 엘로이아를 노려보았다.

“문제는 저년이 버티고 있는 한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야.”

세계수의 수호자인 그녀인 만큼, 이 땅에서 만년빙정의 힘이 얼마나 사기적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빙정의 힘을 수비적으로 돌린다면, 지금 상황에선 절대로 못 뚫어.”

“그 정도입니까?”

“물론 7레벨 마법 수십 발을 들이박으면 일시적으로 뚫을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러려면 모든 역량의 절반 이상을 투입해야만 해.”

외부의 마나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게 이만큼 치명적이다.

특히나 체내의 마나만으로는 구현하는 게 불가능한 고위 마법 같은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그때, 류레이아의 눈앞에 나선 이가 있었다.

“그건 제게 맡겨 주세요.”

“너는, 이번 세대의 족장이로군.”

그녀는 클로이아를 알아봤지만 곧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빙정에 영향을 받는 일족이, 빙정의 주인에게 대항하겠다고?”

“네, 가능합니다. 적어도 발목을 붙잡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어째서 그렇게 자신하지? 뚜렷한 근거가 없다면 네 주장을 들어줄 순 없어.”

클로이아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지금 조모님은, 빙정의 힘을 전부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 근거는?”

“저들이 바로 그 근거입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라데우스의 직계들이 몰려 있는 동군 쪽이었다.

“저들이 어째서?”

“정보를 듣기론, 부상자가 많긴 하지만 사망자는 거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라데우스의 직계들은 전원 살아 있다고 하더군요.”

“…….”

보고를 듣기론 바멜의 한쪽 팔이 잘리고, 레티안, 세티안 남매가 마나 탈진에 걸려 전투불능에 빠졌다고 했다.

지휘관인 게레온 장로 역시 큰 부상을 입었다지만, 일시적인 전력 감소는 있을지언정 사상자 자체는 무척 적었다.

“그렇군.”

류레이아는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만년빙정의 힘이 다른 쪽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뜻이구나.”

“네, 저분이 정말로 전력을 다했다면, 적어도 동군 전력의 삼분의 일은 죽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동군은 전력을 보존해서 여기까지 도달했다.

“그렇다면 빙정의 힘이 흘러간 곳은 다름 아닌…….”

“네, 저 우화 중인 마왕의 알일 겁니다.”

“젠장, 가지가지 하는군!”

류레이아는 왜 계산이 틀렸는지, 그리고 어떻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는지를 알아차렸다.

그녀 역시 참모진의 계산만으로 이번 작전을 결정한 건 아니었다.

아스타로스가 동맹의 대가로 건네준 정보.

그것을 교차 검증하여 확신을 했기에 군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다 같이 거하게 엿을 먹었군. 저년 하나에게.’

어쩌면 북방에 마왕이 강림한 원인 역시 엘로이아에게 있을지도 몰랐다.

“부관.”

“네 총사령관님.”

참모진과는 별개로 그녀를 줄곧 보좌해 온 여성 엘프 하나가 명령을 받았다.

“후퇴 명령은 철회. 여기서 승부를 본다고 전해라.”

“네, 다른 지시사항은 있으십니까?”

“동, 서군이 중앙군을 감싸고 방어에 집중. 중앙군은 각 소대별로 모여 마나를 집약시켜 7레벨 이상의 공격 마법을 캐스팅하라고 전해라.”

아무리 역량이 제한되었어도, 수백의 마법사들이 모인다면 최소 30발 정도는 사출이 가능할 거다.

“엘로이아의 저지를 뚫는다고 해도, 저 봉오리의 방어력은 심상치 않아. 적어도 온 힘을 다해 일격에 꿰뚫어야 한다.”

도주를 위한 최소한의 여력만을 남긴 건곤일척의 승부수.

류레이아는 굳은 표정으로 클로이아에게 말했다.

“클로이아 블루벨벳.”

“네.”

“네 말에, 반드시 책임을 져라.”

이 작전의 핵심은 당연히 클로이아의 분전이었다.

“네가 이번 전투에서 공을 세운다면, 전쟁 이후 네 일족에게 갈 책임에 대해 최대한의 도움을 주겠어.”

이번 일로 인해 서리 일족의 미래는 상당히 암울해졌다.

높은 확률로 멸족을 피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총사령관인 류레이아가 변호를 해 준다면,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이 가능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후우,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군.”

작게 한숨을 쉰 그녀가 부러진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네르하 라데우스. 루시엘라 엘 케프렌.”

느닷없이 본명이 까발려진 루시아의 어깨가 살짝 떨려왔다.

“너희들이 날 좀 도와줘야겠어. 아니, 정확히는 내가 너희를 도와야겠지.”

마계 백작, 크루갈.

“중앙군이 캐스팅을 완료할 시간을 벌어야 해. 저 괴물을 상대로, 가능하겠나?”

네르하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마 저놈은 저와의 복수전을 기대하고 있을 테니, 딱히 문제는 없습니다.”

루시아 역시 자신의 검을 뽑아 든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후후후, 꽤 오래 기다려 준 것 같은데, 이제야 준비가 끝났나?”

까딱, 까닥!

검지를 까딱이며, 크루갈이 말했다.

“그럼 덤벼라, 네르하 라데우스.”

* * *

“왔구나, 클로이아야.”

“할머니.”

클로이아는 묘한 감흥을 느꼈다.

빙정의 계승자이자 8레벨을 개척해 역대 최강의 수호자라고 칭송받았던 엘로이아 블루벨벳.

클로이아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조모와 적으로 만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참으로 냉혹했고, 또 잔인했다.

전장을 살펴보던 엘로이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바실리와 다른 일족들을 데려오지 않았더구나.”

클로이아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그 선택을 후회하진 않아요.”

“잘했다. 차기 족장으로서 올바른 판단이었다. 칭찬해 주마.”

“이게, 정말로 일족을 위해 선택한 일인가요?”

“…….”

“이들을 전멸시킨다고, 우리가 정말 영화를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세요?”

“생각한단다.”

“할머니!”

조모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그녀가 분노를 토했다.

“할머니가 적으로 돌린 건 라데우스만이 아니에요! 이 대륙, 중간계의 모든 존재가 적이 된 거라고요!”

“…….”

“제국이 있고, 케프렌이 있고, 용족이 있어요. 지금도 라데우스 가문 하나 어쩌지 못하고 있죠. 결국 마족들은 다시 중간계에서 쫓겨날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사라질 때, ‘대죄인’ 엘로이아의 출신인 서리 일족 역시 함께 사라질 것이다.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말이다.

“아무리 네르하 도련님을 라데우스의 가주로 올리려고 생각하셨다지만.”

“호오?”

“그게, 할머니 스스로를 희생해서까지 해야 할 일인가요?”

엘로이아는 이번 북방 원정대를 괴멸시킬 생각이다.

그리고 네르하와 서리 일족 일부만을 살려 보내 여지를 남기고, 그들이 더 강력한 전력을 이끌고 북방에 돌아올 때 그들에게 죽을 생각이었던 거다.

적어도, 클로이아가 생각한 엘로이아의 계획은 그랬다.

“후후, 역시 넌 내 손녀다.”

엘로이아가 대견한 어조로 말했다.

“내 계획이 무엇인지, 거의 비슷하게 따라잡았구나.”

“이익!”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서, 그리고 이제 와서 내 생각을 바꿀 순 없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그 순간이었다.

쩌적!

저 뒤편에 있던 거대한 검은 꽃봉오리에서, 무언가 균열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워낙 거대했던 탓에 잘못 들었다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이제 곧이구나.”

“……!”

“앞으로 벌어질 비극을 막고 싶다면, 어디 실력으로 날 뚫어 보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이것뿐이니라.”

“좋아요.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면.”

클로이아의 손짓에 푸른 빛의 서리 군주가 응답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엘로이아의 손에서도 새하얀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사랑해요, 할머니.”

“나도 사랑한단다, 얘야.”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이 일으킨 서리가 충돌했다.

* * *

지금 상황에서 네르하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적을 분쇄하는 것.

―크루갈이라. 골치 아픈 적을 상대하는구나.

어느새 헤츨링의 모습으로 현현한 이자카르가 입을 열었다.

―하나 이기지 못할 적은 아니지.

‘…….’

―네가 정말 모든 걸 걸고 싸운다면.

‘시끄러워.’

이자카르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낄낄거리며 웃었다.

―크루갈은 아가레스를 제외하면 마계 최고의 전사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은 비슈나르의 백업을 받고 있으니, 한없이 원래 실력에 가까운 힘을 낼 수 있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도와주겠다는 소리다. 내 목적이 뭔지 잘 알고 있잖느냐?

아르바와 싸울 당시의 용의 발톱은 제법 유용했지만, 크루갈을 상대로는 그다지?

―흐흐흐, 싸우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네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의 도움을 받고 있는지를.

저 멀리서, 크루갈의 주먹이 날아온다.

―마음껏 날뛰어 봐라.

그 말을 끝으로, 네르하 역시 주먹을 뻗었다.

콰과과과광!

권격과 권격이 부딪치며 두 사람 사이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네르하가 뛰쳐나간 뒤, 뒤따르려던 루시아에게 류레이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철저히 너희의 보조와 방어에만 집중할 거다.”

영역을 현현하지 못하는 이상 그녀로선 당연한 행동이었다.

“한 방이라도 유효타를 허용했다간 그대로 스틱스 강을 건너야 할 수도 있을 테니까.”

확실히 지금 크루갈의 위용을 보면, 어지간한 호신강기나 방어막 정도는 종잇장처럼 찢어 버릴 거다.

류레이아 역시 방어 한 번 잘못했다가 평생을 함께했던 지팡이를 잃어버렸으니까.

그런데, 어째서인지 루시아가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였다.

“으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뭐?”

“저길 보시죠.”

루시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두 사람이 격전을 시작한 장소에는 어느새 격렬한 마기가 들끓고 있었다.

콰앙!

콰아앙!

그리고 시작된 어마어마한 난타전.

일격 일격이 충격파를 토해 낼 정도로 엄청난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어어?”

그 공방을 인간의 육체로 벌이고 있는 네르하의 모습에, 류레이아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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