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북방 결전 (5)>
인간의 뼈와 근육은 연약하다.
소위 ‘금강불괴’라는 단어가 얼마나 허황된 말인지는, 숱한 외공의 고수들이 강기에 썰려 나가면서 역사를 거듭하며 입증한 사실이었다.
하나 ‘신무조’의 사문인 천신문은, 이 금강불괴라는 단어를 긍정했다.
―금강불괴를 달성한다는 건, 한 시대에 천하제일인의 이름을 얻는 것보다도 어렵다.
하북신가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던 신무조를 거두어들였던 사부가, 첫날에 가르쳤던 말이 이것이었다.
―외공을 중시하는 소림의 땡중들조차, 마지막으로 금강불괴에 이른 건 200여 년 전의 인물인 혜천뿐이었지.
사부가 말하길, 금강불괴가 중원에서 전설상을 넘어 허황된 경지로 취급되는 이유는 단순히 달성 난이도에 있다고 하지 않았다.
―금강불괴에 이른 육체는, 악용이 가능하다.
―악용이요?
―외피(外皮)로 무구의 제작이 가능하지. 실제로 십병(十兵) 중 하나에 이름을 올렸기도 하고.
금강불괴의 무인 사후, 그 시신을 도굴하여 악용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례가 바로 수백 년 전 사문의 선조 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는데, 뭐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요는 인간의 육체가 그 정도로 강해질 수 있다는 소리다.
단순히 단단한 걸로는 부족하다.
단단하고 질기고 재생력까지 뛰어난, 그런 최고의 육체.
―그런 육체를 완성하기 위한 비결은, ‘기’와 ‘육체’의 동화에 있다.
사부는 첫날 신무조에게 입문심법을 가르치며 이렇게 말했다.
―단순히 기를 오랜 시간 순환시킨다고 금강불괴에 이를 수는 없다. 그게 가능하면 무당의 말코나 소림의 땡중들은 대부분 금강불괴를 이루었겠지.
―하지만 완벽하게 동화를 이루어선 안 된다. ‘혼’의 승천을 이루지 못한 채 육체만을 자연과 동화시키면? 그게 세간에서 말하는 우화등선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는 개죽음이라고 하지.
천신문의 선조들은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온갖 사고와 시행착오를 겪어 가며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대를 이어 하나둘씩 비법을 정립해 나아갔고.
그 비기를 모두 이은 것이, 바로 당대의 무적권신이라 불리었던 신무조였다.
* * *
고위 마법이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네르하의 주위에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놀랍군. 막는 순간 터져 나갈 줄 알았는데.”
크루갈은 네르하의 육체가 아직도 제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주먹을 살짝 쥐었다 핀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을 상대하는 손맛이 아니야. 오히려 고대종과 싸울 때와 비슷하군.’
용인(龍人) 혹은 수왕(獸王)이라 불리는, 중간계의 이종족 중에서도 정점에 위치한 자들.
네르하에게선 그런 놈들과 비슷한 느낌이 났다.
“흐흐흐, 왜 일개 인간 따위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는 건진 모르겠지만, 즐겁기 그지없군.”
과거를 시시콜콜 따지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강적이 출현했다면, 기쁘게 싸우면 그뿐.
“비슈나르에게 처음으로 고마운 기분이 드는구나!”
크루갈이 네르하를 향해 다시금 달려들었다.
콰앙!
단순히 발을 내딛는 돌진만으로도 충격파가 터져 나온다.
네르하는 그런 크루갈의 돌진에도 마음을 가라앉혔다.
‘힘, 속도, 내구성. 모든 면에서 적이 월등하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저놈은 전성기의 자신보다 강하다.
이대로 10분만 지나면, 자신은 피떡이 되어 인간의 형상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놈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낼 수 있게 된 건, 어디까지나 승부를 위한 최소 조건을 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같이 죽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만, 그래서는 의미가 없지.’
이자카르의 말마따나, 정말 모든 수단을 동원하면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다만, 그 결과가 동귀어진이라 굳이 사용할 생각이 없을 뿐.
‘결국, 지금은 타인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어!’
네르하의 전신을 감싸며 황금빛의 오러와 마력을 머금은 마나가 터져 나온다.
융합기.
금철유성.
콰과과광!
마법과 무공을 조합해 창안한 네르하의 첫 번째 필살기가 그대로 크루갈의 돌진을 상쇄해 냈다.
“하하하! 전에 한 번 봤던 기술이군!”
분명 예전엔 놈의 상반신을 갈아 버렸던 기술이었지만, 본체가 직접 튀어나온 지금은 상쇄가 고작이다.
치열한 힘의 충돌 속에서도 크루갈은 여유롭게 네르하를 도발했다.
“이번엔 그 흑백의 힘을 쓰지 않는 건가? 그거라면 승산이 있을 텐데?”
네르하가 나지막하게 답했다.
“네놈이라면 두 번 당하진 않겠지.”
“옳은 말이군. 하지만, 그걸 쓰지 않고도 네놈은 날 쓰러트릴 승산이 있는가?”
“당연히 있지.”
“호오? 그게 뭐지?”
“‘저 녀석’이지.”
쌔액!
“……!”
크루갈의 사각에서, 황금빛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이 싸움에 누군가가 개입할 줄 몰랐던 크루갈은 정말로 놀라워했다.
‘기껏해야 마법으로 발목이나 붙잡는 정도일 줄 알았거늘?’
절대자들의 싸움은 어째서 대부분 일대일로 귀결되는가?
그건 싸움 당사자들의 명예를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어설프게 협공하거나 개입하려 하다간 여파에 휩쓸려 개죽음을 당한다는 것이 더 컸다.
하지만.
‘너라면, 할 수 있겠지!’
네르하는 그녀를 믿었다.
어지간한 기사라면 엄두도 못 내는 이 싸움에서, 목숨을 걸고 승부에 개입할 수 있는 배짱이 있다는 걸!
“하압!”
주변을 박살 내는 충격파들을 헤치며 접근한 루시아가, 자신의 모든 힘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목표는, 크루갈의 목.
기습적으로 휘두른 쾌검이 크루갈의 목덜미를 향했고,
핏!
안타깝게도, 루시아의 그 일격은 필사적으로 목을 꺾은 크루갈의 대응에 실패로 돌아갔다.
‘제길!’
오러가 훑고 지나간 크루갈의 목덜미에 깊은 상흔이 새겨졌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반사 신경으로 기습을 피한 크루갈의 대응은 빨랐다.
팟!
그의 주먹이 검이 날아온 곳으로 향했다.
감히 승부에 개입한 발칙한 존재를 징벌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거대한 마기의 분출로 드러났다.
카가가각!
“크윽!”
루시아는 검면을 비스듬히 세워 필사적으로 힘을 흘려 냈다.
그리고 그사이, 네르하의 주먹이 크루갈의 가슴을 강타했다.
치이익!
땅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크루갈의 신형이 저 멀리 밀려 나갔다.
순식간에 목숨이 오고 가는 한 차례의 공방이 지나가고, 루시아가 네르하의 옆에 착지했다.
“죄송해요! 일격에 목을 날릴 생각이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상대가 그만큼 괴물이니까.”
루시아의 기습을 받아 낸 크루갈이 자신의 목덜미를 살짝 훑었다.
갈라진 상처에서 마기가 연기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생이 잘 안 되는군.’
단순한 오러가 아니다.
이전 키메라에 강신했던 육체를 꿰뚫은, 그 흑백의 기술과 본질적으로 같은 영역에 있었다.
“이 시대엔 재능 있는 자들이 많군. 그때 그 인간 여자의 혈육인가?”
네르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맞다. 루시아와 아녜스는 자매 사이지.”
“이름은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 아쉽군.”
“뭐?”
“한 번 마음이 꺾였군. 넘치는 재능과 투쟁심으로 가리긴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선 패배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가?”
움찔!
루시아의 어깨가 살짝 떨려 왔다.
“네 마음을 꺾은 자가 누군지 보고 싶지만…… 어차피 너흰 살아 돌아가지 못할 테니.”
크루갈의 말이 정곡을 찌른 탓일까.
루시아의 목소리가 크게 높아졌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훗, 내 말을 부정하고 싶나? 그렇다면 결과로 증명해라.”
평소 감정의 기복을 잘 보이지 않은 루시아인 만큼, 이런 반응은 꽤 의외였다.
“진정해라, 루시아.”
네르하는 조금 거칠게 루시아의 어깨를 짓눌렀다.
“…….”
한 차례 분노를 토해 낸 그녀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승부처에서 감정을 숨기는 건 무인의 기본적인 자세다.”
“죄송, 합니다.”
루시아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시간을 끌 형편이 못 돼. 내가 놈의 틈을 만들 테니 이번엔 확실하게 끝장내.”
후방에서 푸른 마력이 응집되는 걸 보니, 류레이아 역시 확실하게 지원 사격을 해 주려는 모양새다.
“할 수 있겠지?”
“네, 반드시.”
마음을 다잡은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지금의 자신이라면 충분히 놈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질 수 있다.
루시아의 유성검이라면 충분히 놈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터.
그때였다.
“그거 아는가?”
크루갈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이계에서 마계 영역을 사용하지 못하는 우리 무투파 마족들은, 영역에 걸맞은 비장의 수를 가지고 있지.”
우둑! 우두둑!
크루갈의 뼈와 근육이 갑자기 제멋대로 춤추기 시작한다.
그 모습은, 상당히 기괴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잠깐이나마 드러내는 것이다.”
놈의 육체가 급격히 부풀어 오르며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저 모습은 대체?’
꾸득! 꾸드득!
육체가 검어지고, 원래도 길었던 송곳니가 거대하게 튀어나왔다.
마치 저 천축의 신화에 나오는 ‘락샤사’라는 괴물이 생각날 정도로, 흉포한 모습이었다.
“말도 안 돼. 저, 저걸 어떻게…….”
루시아가 살짝 목소리를 떨었다.
대번에 전의를 상실한 것이 느껴진다.
네르하조차 차마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만큼, 크루갈이 드러낸 존재감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으니까.
완전히 거대화한 크루갈이 송곳니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흐흐흐, 비슈나르의 영지 안에서라면 3분 정도는 충분히 버티겠군.
네르하는 직감했다.
저 모습으로 3분이면, 충분히 북방 원정군 전체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는 걸.
그때.
―기어코 크루갈의 진체(眞體)까지 끌어냈나? 잘하고 있구나, 인간.
‘이자카르?’
명백한 위기 상황임에도, 이자카르의 분위기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조금만 더 버텨 보거라. 그러면 크루갈은 알아서 자멸할 테니.
‘그건, 무슨 뜻이지?’
이자카르가 하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말 그대로다. 내가 비슈나르라면 자신의 부활이 임박한 지금, 크루갈에게 저 정도의 힘을 몰아주진 않을 테니까.
‘……!’
―그럼에도 비슈나르는 크루갈이 진체로 현신할 정도의 힘을 몰아주었지.
크루갈은 비슈나르보다 계급은 낮을지언정, 비슈나르의 직속 부하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계약에 따라 불려 온 고용주와 용병의 관계일 뿐.
그렇다는 건, 즉.
크루갈이 진체로 변한다는 것 자체가 비슈나르의 노림수라는 뜻이다.
“좋아, 이해했어.”
―이해 빨라서 좋군.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마.
촤르륵!
네르하와 루시아의 전신이 얇은 갑옷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아르바가 마족으로 변했을 때 입었던 그 갑주와 흡사했다.
―나의 비늘로 짠 갑옷이다. 이 갑옷을 입은 나의 사도들은 ‘이자카르 나이트’라 불리며, 마계에서 공포로 군림했지. 흐흐흐!
“…….”
네르하는 이자카르의 작명 센스에 뭐라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자카르가 부여한 갑옷의 성능 자체는 분명 신기에 준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오오! 이자카르의 힘이구나!
투쾅!
그렇게 튀어 나간 네르하의 주먹이, 거대해진 크루갈의 주먹과 충돌했다.
‘크으으!’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다.
아무리 갑주의 힘을 빌렸어도, 기본적인 스펙의 차이를 넘어서는 건 힘들었다.
―크하하하! 좋군! 좋구나!
크루갈은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발광하며 네르하와 루시아를 몰아쳤다.
두 사람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갑주의 방어력에 더해, 류레이아의 필사적인 보조 덕분이었다.
류레이아는 네르하가 밀리면 끝장이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자신의 모든 마나를 끌어다가 방어마법을 구현하는 데 소모했다.
“쿨럭!”
외부의 마나를 끌어다 쓰지 못했던 탓일까.
고작 1~2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류레이아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오며 마나 역류가 일어났다.
크루갈은 그런 류레이아를 비웃었다.
―세계수의 수호자라 해도 그 힘을 쓸 수 없다면 한낱 엘프에 지나지 않는구나.
순식간에 류레이아가 무력화되고, 크루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네르하를 끝장내기 위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푹!
―음?
그 순간, 크루갈은 촉수 비슷한 무언가가 자신의 등짝을 관통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촉수가 튀어나온 곳은, 바로 뒤편에 있던 거대한 검은 꽃봉오리.
마신강림으로 만들어진, 마왕 비슈나르의 육체가 보관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