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북방 결전 (7)>
클로이아가 네르하에게 물었다.
“왜 왔어요?”
“안 왔으면 했어?”
그녀는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너도 참 답 없다. 마법사란 인종이 분노를 갈음하지 못해서 이렇게 막 나가다니.”
“솔직히, 이 자리에 나타난 당신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지.”
확실히 후퇴하라는 총사령관의 말을 씹고 난입한 네르하 역시 도긴개긴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비슈나르는 네르하를 적대하기는커녕 팔을 벌리며 환영했다.
“어서 와라, 이렇게 얼굴을 맞대는 건 처음이구나.”
“……무슨 면상이길래 불꽃 속에 얼굴을 감추나 했는데, 생각보단 정상이었군.”
“후후, 본모습을 보고 싶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구나. 물론, 네가 마계에 온다면 말이지.”
“사양하지. 평생 그런 곳에 갈 일은 없으니까.”
네르하는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자세를 잡았다.
“싸울 수 있겠어?”
“싸우시게요?”
“도망갈 수 있다면 그러겠지만, 아무래도 저놈이 우릴 놔 줄 생각은 없겠지.”
얼마나 강한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 진체를 드러낸 크루갈조차 강함의 격이 어느 정도인지 예상이 갔는데, 저건 완전히 안개에 낀 듯 오리무중이다.
그건 상대의 격이 까마득하게 윗줄에 있다는 증거.
“후, 후후. 이런 상황임에도 승산을 찾고 있구나.”
그런 네르하의 모습을, 비슈나르는 재밌다는 듯 바라보았다.
“정말로, 탐이 나는구나.”
탐욕이 네르하를 직시했다.
“내 것이 될 생각은 없느냐?”
“그 제안은 거절한 거로 아는데?”
그것도 마지막 제안이라면서 자존심을 부려 놓고 이제 와서 또?
“보물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자존심 정도는 접어 둘 수 있지.”
“다시 말하지만, 거절이다.”
“아쉽구나.”
당장 저 제안을 받아들였다간, 뒤통수에 얼음창이 꽂힐 거다.
다시금 전의를 다진 네르하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내 제안을 거절해 놓고 염치없이 말이냐?”
네르하는 그 말을 무시한 채 질문했다.
“왜 너희는 자기 구역을 벗어나 이 대륙을 넘보지?”
사실 이 물음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시간 끌기의 의도가 짙었다.
대륙 학계에서 과거에 어느 정도 결론이 난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말을 꺼낸 건, 지금도 원정군이 후퇴를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비슈나르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중간계가 왜 중간계이겠느냐?”
“무슨 소리지?”
“당연히, 두 세계의 사이에 낀 완충 지역이기에 중간계라 불리는 게 아니더냐?”
역시, 비슈나르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신계(神界)’.
중원의 천계와 비슷한 신들의 세계를 정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원래 여기서 끝났어야 할 비슈나르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이유가 다르구나.”
“뭐?”
“지금 우리가 일어선 가장 첫 번째 목적은, 복수란다.”
복수?
전혀 뜬금없는 말에 네르하는 물론 클로이아마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500년 전, 우리의 야망을 저지하고, 불공정 계약을 맺어 지금까지 침묵시켰던, 그 인간에 대한 복수 말이다.”
“인간? 누구를 말하는 거지?”
케프렌이나 라데우스의 누군가를 말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비슈나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너희는 그자를 초마인(超魔人)이라 불렀지. 그대처럼, 마족이 아님에도 마기를 다루는 그 변종 인간 말이다.”
* * *
500여 년 전.
모종의 이유로 몇 명의 마왕들이 중간계에 넘어왔다.
그중 하나가 지금은 절대 폐쇄 지역으로 지정된 대륙 서남부의 파가렌 섬을 본거지 삼아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했고.
이에 당시에도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라데우스, 케프렌 및 수많은 가문들이 일어서서 항거를 천명했다.
각 대륙의 종단들 역시 성마대전이 일어났다며 성전을 선포했을 정도로, 당시의 모든 국가와 종족들은 곧 전장의 화마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파가렌 섬에서 건너온 마왕은 대륙 최남부에 상륙해 일대를 점령했고.
당시 그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최고의 검가 케프렌이, 군사를 일으켜 남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1만에 달하는 기사단과 30만에 육박하는 정병.
많은 이들이 이들의 충돌을 시작으로 대륙 전역에 전쟁이 번지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하지만 정말 의외로, 사람들이 예상하는 큰 전투는 당장 일어나지 않았다.
종단이 성전을 선포한 날을 기준으로 35일이 지난 날.
케프렌과 마족들이 구축한 전선 사이에서, 한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는 성별을 구분하기 힘든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엔 가면을 쓰고 있었으니까.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장수종인 엘프들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성별조차 불명으로 기록되었을 터였다.
어쨌든,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그 남자는 전선 한가운데에 나타나 해안가를 휘적휘적 걸었다.
그 남자의 위치가 그야말로 전선의 딱 정중앙이었기에, 마족도 인간들도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기묘한 대치 상황을 처음으로 깬 건 마족이었다.
남쪽 전선을 총괄하던 마왕 벨가자드 휘하에 있던 마계 백작 하나가 그 인간을 죽이기 위해 직접 움직였고.
그리고.
단 일격에, 목숨을 잃었다.
* * *
‘마계 백작을, 단 일격에 없앴다고?’
물론 백작급이라고는 해도 그 힘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백작급이 8레벨 마법사와 동격으로 평가받는다는 걸 고려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위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 그 인간은, 정말로 강했지. 신족이 인간의 탈을 쓰고 내려온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비슈나르가 조소했다.
저 모습을 보면, 과거 비슈나르 역시 그 초마인이라는 놈한테 데인 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초마인과 너희가 맺은 불공정 계약이라는 건 뭐지?”
“…….”
지금까지 여유롭게 대답하던 비슈나르가, 이 질문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닫았다.
저 침묵은 많은 것을 유추하게 했다.
뭐, 대충 맥락을 따지면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마족들은 그 초마인인지 뭔지 하는 놈 하나에게 발려 버렸고, 놈이 제시한 계약에 얽매여 500년간 역사의 뒤편으로 빠져 있었다는 것.
‘조금 더 깊이 판다면, 놈들은 최근에 중간계에 들어온 게 아니라 아예 500여 년간 숨을 죽이고 있었다는 뜻이 되는데.’
그 가정이 사실이라면, 비슈나르가 무려 다섯이나 되는 백작급 마족을 부리고 있다는 것도 설명이 가능하다.
원래라면 백작급 하나를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흑마법사 집단인 판데모니움의 일파 하나가 반백 년 동안 모든 역량을 투입해야만 했으니까.
‘어쩌면, 이 위기를 넘겨도 앞으로의 상황은 예상보다 더 심각해질지도 모르겠군.’
네르하가 그렇게 자조하고 있을 때였다.
“그 질문엔 답해 줄 수 없구나.”
“왜, 자존심이 상하나?”
꿈틀!
“너무 내 속을 긁진 말거라.”
살짝 얼굴 근육이 일그러진 비슈나르의 등 뒤로 수많은 검은 촉수가 튀어나왔다.
“편하게 죽고 싶다면.”
저 촉수는 단순히 검기만 한 게 아니었다.
마치 검은 불꽃에 감싸인 듯 S자를 그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꿀꺽!
상반되는 속성을 다루는 클로이아는 촉수를 감싼 흑염의 잠재성을 대번에 알아채곤 침을 삼켰다.
하지만 네르하가 느낀 위기감 정도는 아니었다.
‘저건, 막고 싶어도 막지 못할 것 같군.’
단순히 방어가 문제가 아니다.
신법이나 보법을 펼쳐도 피하지 못할 거란 직감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네르하가 필사적으로 저 흑염 촉수에 대한 대응책을 생각하고 있을 때.
스르륵!
―직감이 예리하군. 네 생각대로, 섣불리 피하려 했다간 전신에 구멍이 뚫렸을 거다. 아까 전의 크루갈처럼 말이야.
“이자카르…….”
네르하의 허리를 타고 나타난 블랙 헤츨링의 모습에 비슈나르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인과를 무시하는 절대필중의 능력. 간단하지만 강력한 비슈나르만의 무기지.
이자카르의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이 걸렸다.
―원래라면 그것만으로는 마왕을 자처하기엔 모자라지만, 마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내 불꽃을 얻은 뒤로는 이야기가 달라졌지.
“패배자가 넋두리를 하러 왔구나.”
―넋두리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지나칠 정도로 당당한 이자카르의 모습에, 오히려 움츠러든 건 비슈나르였다.
이자카르가 네르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네겐 도망이란 선택지는 없다. 너와 함께 온 인간들은, 절대로 마왕령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뭐?”
―저년은 그걸 알기에 네 시간끌기에 어울려 준 것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왕령을 둘러싼 경계의 끝자락에서 돔 형태로 결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네르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나치게 여유롭다 싶더니, 이런 이유에서였나.’
확실히 마왕이라 할 만한 자의 권능이다.
후퇴 중이던 원정군 역시 그걸 알아차렸는지, 이 먼 곳에서도 그들의 동요가 전해져 왔다.
이자카르가 음충맞게 웃었다.
―크흐흐, 위기로군.
이자카르는 아마 이런 마왕령의 특수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보를 숨겼다는 건, 그걸 알면 이쪽이 정면 대결을 회피할 거라고 예측했기 때문일 테지.
그렇게 되면 운석으로 마족 세력은 전멸시킬 수 있어도, 우두머리인 비슈나르는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그 괘씸함을 단죄하는 건 나중의 일이라곤 해도.’
이런 상황에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나름 승산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네르하가 물었다.
“뭔가 방법이 있나?”
―네놈들이 목숨을 건다면야.
“그건 당연한 일이고.”
―푸흐흐, 좋아. 그럼 한 가지 좋은 정보를 알려 주지.
이자카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에서 미소를 떼지 않았다.
―저년은 큰 실수를 했다. 소멸을 피하고 안전하게 중간계에 육체를 수육하려는 시도는 괜찮았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너무 욕심을 부렸어.
“……?”
―불꽃을 다루는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빙정의 힘을 끌어와 육체의 생명력을 충당한 거다.
원래라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음양의 조화는 생명력의 근원.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면 오히려 강력한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네르하는 이카자르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알아차렸다.
“네 불꽃과 빙정의 한기. 그 힘이 워낙 극단에 있기에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건가?”
―흐흐흐, 역시 이해가 빠르구나. 원래 마왕의 격이라면 충분히 양극단의 힘을 제어할 수 있겠다만.
“설마…….”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지, 비슈나르의 표정이 일변했다.
―저년에게 빙정의 힘을 공급한 자는 만약을 대비해 한 가지 수작을 부려 놨지. 그건 바로…….
화륵!
비슈나르의 손이 다급하게 어딘가로 향한다.
그건 바로, 클로이아가 서 있는 쪽이었다.
―빙정을 통해 부여한 힘을, 다시 빙정으로 회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퍼억!
비슈나르의 촉수들이 발사되려던 찰나, 그 기색을 눈치챈 네르하가 그대로 비슈나르의 팔을 발차기로 걷어 올렸다.
하지만 필중의 권능이라는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발사된 촉수들은 마치 공간을 건너뛰듯 클로이아의 눈앞에 나타났다.
“……읏!”
느닷없는 기습에 클로이아가 미처 대처하지 못하던 그때.
―흐흐흐, 안 되지, 안 돼.
어느새 클로이아의 눈앞에 나타난 이자카르가 촉수들을 일거에 물어뜯어 버렸다!
“이놈, 이자카르! 감히 파편 주제에!”
―퉤! 크흐흐! 지금껏 모아온 힘이라면, 권능의 상쇄 정도는 가능하지.
상황을 파악한 네르하가 입을 열었다.
“한마디로.”
“……!”
“클로이아가 힘을 뺏어올 동안, 내가 놈을 두들기면 된다는 거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