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믿는다, 클로이아.”
네르하의 말이 가소롭게 들렸을까.
비슈나르는 분노는커녕, 오히려 비웃음으로 네르하를 조롱했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내 너를 높게 보고 있긴 하다만, 불가능한 일을 너무 당당하게 가능하다고 말하는구나.”
‘당연하겠지.’
빙정의 힘이 아니더라도, 이미 놈은 백작급 마족 4명의 힘을 빨아들인 상황이다.
거기에 빙정의 힘을 회수해 육체 밸런스를 붕괴시킨다고 해도 기본적인 힘의 차이를 뒤집는 건 요원하다.
무엇보다 비슈나르의 권능은 시공간에 대한 개입.
즉 9레벨의 세 요소인 창조, 소멸, 간섭 중 간섭에 속하는 절대적인 영역.
일단 기본적인 승산을 찾으려면 이 부분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적어도 놈과 같은 위치에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비슈나르가 처음 클로이아를 노렸을 때. 네르하는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섬찟해지는 걸 느꼈다.
만약 이자카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네르하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파트너를 잃었으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놈과 같은 곳에 설 수 있는가?
‘가능성은, 있다.’
그 인과라는 걸, 볼 수 있게 해 주는 눈(眼).
신안(神眼).
전생에 죽기 직전, 단 한 번 닿았던 경지.
‘그걸 한 번 더 재현할 수 있다면.’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네르하는 그사이 세상 만물의 모든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소위 말하는 ‘인과’라는, 평소엔 절대 볼 수 없었던 나선으로 꼬인 자그마한 실들의 흐름 역시도 보았다.
‘그것을 열려면, 폭주와도 같은 흐름으로 대번에 천문(天門)을 뚫어야 한다.’
원래라면 조금 더 안정적이고 정석적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이전 생에서의 경험은, 어디까지나 인생의 끝자락에서 육체가 완전히 파괴된 탓에 벌였던 도박수였을 뿐.
“이자카르, 클로이아를 지켜 줄 수 있나?”
―글쎄, 견제로 날아오는 것 정도야 막을 수 있겠다만, 비슈나르가 본격적으로 달려든다면 답이 없다. 지금의 나는 어디까지나 파편. 네가 모아 둔 마기의 힘으로만 움직일 수 있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해.”
네르하는 천천히 단전의 마나를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전의를 불태우는 네르하를 향해 이자카르가 충고했다.
―명심해라. 시간을 끄는 것으론 부족하다. 무조건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시간을 끌어서 유리해지는 건, 오히려 비슈나르 쪽이다.
‘알아, 우린 이곳에 오기 전에 최악의 자충수를 뒀으니까.’
자신의 마계 영역인 마왕령을 봉쇄한 비슈나르는,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약 며칠 후면 이곳에 떨어질 초유의 재앙.
대이적마법, 미티어 스트라이크.
그것이 이곳 마왕령에 떨어지는 순간, 북방 원정군은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모조리 전멸할 것이다.
“그건, 원초의 혼돈이구나?”
네르하의 손에 둥둥 떠 있는 회색의 구체.
지금까지 네르하를 얕보던 비슈나르의 표정이 변했다.
“그래, 너도 이것만큼은 꽤 꺼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비슈나르가 으르렁거렸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구나. 그거 하나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확실히 저 말대로 승산이 낮은 도박이다.
위력은 확실하지만, 까놓고 말해 단발성 공격 따윈 피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현재 네르하의 역량으로도 이건 두 번은 쓰지 못하는 힘이었으니까.
하지만 네르하는 이 혼돈을 발사할 생각이 없었다.
“뭘 어쩌긴, 이렇게 하려는 거지.”
“뭣?!”
원초의 혼돈이라 불리는 회색의 구체가, 그대로 네르하의 손바닥을 타고 흡수되었다.
‘크으으읏!’
내부에서 융합을 시도했다간 그대로 몸이 터져나갈 게 분명했기에 이런 식의 편법을 썼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너무 고통스럽다!
‘제어, 할 수 있어!’
부우웅!
그때보다 상황은 훨씬 좋다.
팔다리가 날아가고 걸레짝이 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육체는 젊고 쌩쌩했다.
또한 네르하가 믿고 있는 가장 큰 버팀목은 다름 아닌.
‘마나 익스텐더!’
스승 시저 루드벡이 직접 새겨 준 벨카서스 학파의 비전, 마나 익스텐더.
평소라면 출력을 높여 심장을 압박해야 할 마나 익스텐더가, 이번엔 되레 외부의 압력에서 심장을 지켜 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네르하의 모습을 지켜보던 비슈나르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뭐지? 자멸하려는 건가?’
뭔 짓을 하려는 건지 발상 자체는 이해했다.
원초의 혼돈을 체내에 집어넣어 그 힘을 제어하려는 것.
하나 혼돈이 왜 혼돈이겠는가.
일개 생명체 따위가 다룰 수 있을 정도로 혼돈은 만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굳이 건들지 않아도 되겠군.’
저렇게 되면 남은 결론은 두 가지다.
육체의 조각도 남지 않고 완벽하게 이 세상에서 소멸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혼돈에 완전히 잡아먹혀, 힘을 모조리 소진할 때까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짐승이 되거나.
비슈나르가 알기로, 혼돈을 품은 생명체의 말로는 오직 이 둘 뿐이었다.
그런데.
우득! 우드득!
전신의 뼈가 딸깍거리고, 칠공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피부에선 실핏줄이 돋아나고 있음에도.
네르하의 육체는, 자멸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뭔가, 위험하다!’
수만 년 이상을 쌓아 온 본능이 경고했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위험하다고!
파파파팟!
비슈나르가 있던 땅바닥에서 수백 가닥의 촉수가 튀어나왔다.
그 촉수들은 망설임 없이 가만히 있던 네르하를 기습했고.
“네, 네르하!”
클로이아의 외마디 비명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촉수가 네르하가 있던 자리를 꿰뚫었다.
“아, 안 돼!”
반드시 명중한다는 절대적인 권능.
수백 줄기에 달하는 촉수의 면적은 단순히 꿰뚫는 것을 넘어 아예 인간의 형상을 없애 버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때였다.
“이제, 보인다.”
분명, 전신이 꿰뚫려 죽었어야 했을 네르하가, 어느새 비슈나르의 눈앞에 나타나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인과를 다룬다는 게, 이런 의미였군. 표면의 세계에선 보이지 않는 이면의 흐름을 조작하는 건가?”
“네놈, 어떻게, 그걸!”
“그 흐름을 볼 수 없다면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가? 대충 이해했다.”
“사, 살아 있어!”
클로이아는 네르하가 살아 있다는 것에 크게 안도했다.
하지만 곧이어 네르하에게 일어난 변화를 알아차리자, 무겁게 표정을 굳혔다.
‘회색빛?’
라데우스 가문의 상징이었던 은갈색 머리카락이, 마치 잿빛에 가까운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네르하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상대인 마왕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불길함을 내뿜고 있다!
―집중해라, 인간 계집.
그런 네르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이자카르가 냉정하게 충고했다.
―저놈의 승리 여부는, 이제 네년이 쥐고 있으니까.
“……아!”
―빙정의 힘을 최대한 회수해 육체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거다. 그렇게 되면 비슈나르의 힘을 지금의 절반 이하로 떨어뜨리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그렇게 되면 네르하의 승산은 크게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클로이아는 그것만으로 정말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저, 저기.”
―뭐냐?
“힘을 회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최대한 주입하는 건 어떤가요?”
―뭐?
“제 계산이 맞는다면,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육체의 약화를 넘어 붕괴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약화냐, 과잉으로 인한 붕괴냐.
이자카르는 그런 클로이아의 제안을 진지하게 재보았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하다만, 그때까지 저놈이 버틸 수 있을까?
힘을 주입한다는 건, 당연히 상대의 화력이 더더욱 올라간다는 의미다.
전자보다 결판은 좀 더 일찍 나겠지만, 초반부의 리스크를 더 크게 안게 된다.
클로이아는 네르하를 믿었다.
‘저 사람이 먼저 날 믿어 준다고 했어.’
그러니, 자신도 상대를 믿어 줘야 했다.
‘냉정하게 승률을 따지면, 이쪽이 더 높아!’
이미 비슈나르의 육체는 빙정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만개한 검은 꽃 자체가 비슈나르에게 힘을 부여해 주는 매개체이자, 빙정과 연결된 통로의 역할을 맡고 있다.
자신의 조모 엘로이아는, 그 사실을 파악하고 역으로 비슈나르의 육체를 파괴할 수 있는 수단을 그녀에게 쥐여 준 것이었다.
클로이아는 천천히 정신을 집중했다.
만년빙정은 검은 꽃보다도 더 아래. 지하 깊숙한 곳에 그 육중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라, 저건?’
빙정과 동조한 클로이아가 그 힘을 최대한 끌어오려던 찰나.
클로이아의 감각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검은 꽃 최심부에 자그맣게 유폐된.
마계 백작, 아스타로스의 존재였다.
* * *
“아…….”
기절에서 깨어난 루시아는 자신이 퇴각하는 중앙군 사이에 끼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일어나셨습니까, 루시아 양?”
“알페온… 씨?”
“우, 움직이면 안 됩니다! 너무 심하게 다치셨어요!”
알페온은 다급하게 일어서려는 루시아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루시아는 그제야 전신의 신경이 보내는 고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자카르의 가호로 인해 용의 갑주를 착용했다 하지만, 크루갈의 상식을 넘어서는 물리력은 흘려내기엔 한계가 있었다.
루시아는 자신이 실려 온 이후 네르하가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현재 상황이 어떠한지 듣고는 눈을 감았다.
‘나는, 또…….’
정신을 잃기 전, 무언가 시커먼 게 쇄도하던 건 생각이 난다.
아직도 살아 있는 걸 보니 네르하가 몸을 날려 살려 준 게 분명했지만.
‘뭐가 천재야. 가장 중요한 순간에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는데.’
전신을 짓누르는 자괴감은, 육체가 보내는 고통 이상으로 루시아의 정신을 짓밟았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물론 네르하가 곁에 있었다면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고 위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가 원하는 건 그저 조연으로 남는 것이 아니었다.
‘더, 더 강해져야 해. 일반적인 성장의 틀을 넘어서야 해.’
천재라는 수식어를 넘어, 일반적인 상식의 기준을 넘어서는 자들.
세간에선, 그걸 괴물이라고 한다.
‘괴물이 되어야만 해. 그래야만, 따라잡을 수 있어.’
마음 깊은 곳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스멀스멀 흘러나와 루시아의 마음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마음의 어두움이 육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현상.
소위 주화입마라는 증상의 시작 단계였다.
“루, 루시아, 양?”
루시아의 그런 변화를 알아챈 알페온은 당황했다.
뭔가, 뭔가 루시아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때였다.
“여전히, 꺾인 심지를 완벽히 극복하지 못하셨군요.”
“……!”
벌떡!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루시아는 전신을 습격하는 모든 고통을 잊은 채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바늘에 찔리는 듯한 고통이 뒤이어 몰려왔지만, 루시아가 느낀 놀라움은 그 고통을 잊게 만들었다.
“어? 잠깐? 부, 분명 저 앞에 검은 결계가 막고 있을 텐데, 어디서 튀어나온 거?”
느닷없이 나타난 불청객의 등장에 알페온은 물론 주변에 있던 네르하의 가신들이 다급하게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상대가 나타난 위치를 보면, 퇴로를 막고 있는 검은 결계의 바깥에서 들어온 게 분명해 보였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아직 소년티를 제대로 벗지 못한 금발의 미청년.
그런 외모이기에 알페온과 다른 이들의 경계는 더더욱 치솟아 올랐다.
“너, 너는! 네가 어째서 이곳에……!”
루시아의 경악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금발의 미청년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루시아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루시엘라 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