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개선 (1)>
‘아, 아아.’
백금색의 빛이 비슈나르의 시야를 가렸다.
‘난 절대로, 이런 결말을 예측한 게 아니야.’
마왕이라 불리는 자들 정도 되면 어느 정도 미래를 읽을 수 있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특정한 미래를 지정할 정도는 아니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광경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왕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네, 놈은, 대체, 뭐냐!”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비슈나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가 보았던 미래는, 자신의 부하들이 당당하게 대륙의 인간들을 유린하는 모습이었다.
그건 지난 수백 년 동안 몇 번을 들여다보아도 바뀌지 않았던 사실이었기에, 비슈나르는 그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넌 대체 뭐길래! 나의 미래를 바꿔 버린 거야!”
쓸 만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했다.
자신과의 인연이 강하게 연결되었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그건 수족으로서의 인연이라 생각했을 뿐.
이런 식으로 마왕살해자의 업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크크크! 어리석구나!
백금색의 빛에 휩싸여 소멸하던 비슈나르의 귓가에, 누군가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자기가 본 광경을 절대적인 미래라고 믿는 건, 초짜 마왕들이 흔히 하는 착각 중 하나지.
“이자카르!”
―물론 마왕의 권능은 어지간한 일에 대해선 미래를 고정해 주는 건 맞아. 하지만.
백금색의 세계 어딘가에서, 이자카르의 검은 눈이 빛났다.
―더 큰 힘과 인과를 가진 이에게는, 미래시 따윈 가볍게 박살 나고 말지.
그렇기에, 마왕의 좌에 오른 지 오래된 이들은 자신이 본 미래를 쉽게 맹신하지 않는다.
그 말에 비슈나르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웃기지 마라! 그 인간이, 마왕인 나보다 더한 인과를 지녔다고?”
비슈나르에겐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세 윗분들 정도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야!”
마계의 진정한 마왕이자 신이라 불리는 세 명의 공작들.
힘이든 인과든 후작급 마왕의 격을 완전히 짓밟으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자카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인간 중에 가능한 존재가, 딱 하나 있지 않는가?
“뭐?”
―네가 직접 말하지 않았나? 네르하 라데우스가, 그 ‘초마인’이라는 놈과 관련이 있다고.
“……!”
―네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과거의 그 인간과 인과율이 이어진 존재라면, 너의 업을 짓밟는 것 정도는 간단하지 않겠는가?
워낙 당황하였기에 머리가 미처 돌아가지 않았을 뿐,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분명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긴 했다.
“이, 이렇게! 이런 식으로 끝낼 순 없다!”
비슈나르가 어딘가로 손을 뻗었다.
“아스타로스! 너의 육체를 내게 바쳐라!”
아직 저 밑에 가라앉아 있는 아스타로스의 육체는 멀쩡할 거다.
그러나.
“에, 싫은데?”
어느새, 이성과 지성을 되찾은 아스타로스의 모습이, 비슈나르의 눈앞에 나타났다.
“어, 어떻게, 제정신을 차렸지?”
입을 뻐끔거리는 비슈나르.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이죽거리는 아스타로스.
“날 한 번 잡았을 때 끝장을 냈어야지.”
어떻게 그녀가 정신을 차렸는지는 몰라도, 지금 상황은 절대 좋지 않다.
“욕심을 그득하게 부리니까 모든 걸 잃게 되잖아!”
“이! 고작 백작 따위가!”
꽈악!
그 순간 아스타로스의 손이 비슈나르의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놔, 놔라!”
“내가 왜? 마신강림의 육체에서 해방되어 마계로 돌아가면, 네놈이 할 일이야 뻔할 텐데?”
당연히 부하들을 움직여서 배신한 자신의 본체와 영지를 초토화시킬 거다.
“그리고 다시 중간계에 기웃거리기 위해 다른 마왕들에게 손을 뻗을 게 분명하겠지.”
“서, 설마! 네년!”
아스타로스가 무슨 꿍꿍이인지 파악한 비슈나르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중간계에 소환된 마족이 가장 취약해지는 건 바로 역소환 직전. 이건 하급 마족이든 마왕이든 피해 갈 수 없다는 건 너도 알지?”
“자, 잠깐 아스타로스! 네가 이런 짓을 한다 한들 언제까지……!”
“이제, 네놈이 잠들 차례구나!”
번쩍!
새파란 전격과 함께 비슈나르의 의식이 암전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비슈나르의 전신을 둘러싼 봉인진.
이건 현재 아스타로스의 역량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이자카르!’
비슈나르는 자연스레 이 봉인진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아차렸다.
의식 자체를 타 공간에 통째로 봉인하는 술식.
마왕 중에서도 공간계열에 특출난 실력을 자랑했던 마룡의 솜씨가 분명했다.
‘이자카르으으으으!’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헤츨링을 향한 마지막 단말마.
마왕, 비슈나르의 퇴장이었다.
* * *
금철유성과 태극도를 조합한, 현재 네르하가 펼칠 수 있는 최강의 일격.
이 기술에 대한 네르하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부끄러운 기술이야.’
외부와의 감각이 단절된 무의식의 바다.
그곳을 표류하던 네르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제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멀었어. 의념이 제멋대로 폭주하며 날뛰다니.’
물론 이 정도만으로도 천운 소리를 들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두 기술을 섞어 나타난 백금의 힘은 분명 원초의 혼돈을 정제한 힘이었으며, 원래라면 이 세계에 나타나선 안 되는 위험한 힘이었다.
그걸 발현한 후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네르하는 칭찬받아 마땅할 정도였다.
‘마법을 더 연마해야 해. 8레벨 영역급의 제어 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이 기술을 온전히 다룰 수 없어.’
이 8레벨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최저치로 잡은 거다.
네르하의 생각으로는 마법의 끝이라 일컬어지는 9레벨의 경지에는 이르러야 이 이름 없는 기술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것만큼은 혼자 힘으로 다듬기엔 한계가 있긴 한데.’
뛰어난 재능과 오성. 그리고 전생부터 이어진 경험과 성취의 조합은 네르하를 절대 이 나이에 이를 수 없는 절대강자의 자리에 오르게 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 이건 인간의 경계를 벗어난 문제.
네르하조차도 처음 발을 내딛는 전인미답의 영역이었다.
문득, 네르하의 뇌리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카이젤 아우구스트 라데우스.’
라데우스의 가주이자, 대륙 제일의 마법사. ‘네르하’의 생물학적 부친.
그리고.
근 수백 년 동안 유일무이한, 절대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9레벨에 이른 존재.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좀 더 확실하게 다듬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문제는 섣불리 본인의 전력을 가주에게 드러낼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이제 와서 전력을 숨기네 마네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일단은 이자카르를 방패막이로 삼아 볼 생각이다.
‘뭐, 이 부분은 본가에 돌아간 뒤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지금 당장 닥친 문제는 이게 아니다.
‘일어나면 한동안 병동 신세를 지겠군.’
마지막 일격을 내지르면서 전신의 뼈와 내장이 박살 나는 느낌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온전히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겠군. 이 세계의 의학과 치료마법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어야 하나.’
그나마 심장과 단전을 지킨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기혈이 크게 상했다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 두 급소만 지켰다면 어떻게든 재기할 여지가 있었다.
‘그럼, 어디 눈을 떠 볼까…….’
아마 정신을 차리면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내달릴 거다.
각오를 다진 네르하는, 의식을 천천히 무의식에서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구우우우운!”
“도련니이이이임!”
퍽!
다른 종류의 고통이, 네르하를 기습했다.
* * *
“이, 망할…….”
네르하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복부에 제대로 두격(頭擊)을 얻어맞은 네르하는 자신에게 공격을 가한 장본인들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환자에게 무슨 짓을…….”
“아!”
“죄, 죄송합니다, 주군!”
알페온, 바스톤, 그리고 그 외의 몇몇 수하들.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는 그들을 노려보던 네르하는, 이윽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고통이 없다?’
아니, 고통 이전에 오히려 전신에 활기가 넘친다.
그 원인을 찾던 네르하는, 자신의 몸 상태를 가볍게 확인하고는 입을 살짝 벌렸다.
“이럴 수가.”
“무,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주군?”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눈치를 살살 보는 수하들을 밖으로 물린 네르하는, 가부좌를 틀고 본격적으로 몸을 살폈다.
‘기연인가?’
박살 났을 거라 여겼던 전신의 뼈는 이전보다도 더 강인한 골밀도를 자랑하고 있었고.
파열되었을 거라 예상되었던 내장 역시 멀쩡한 상태로 기능하고 있다.
무엇보다.
‘상단전이, 반쯤 열려 있다.’
천문(天門). 백회혈이 완전히 열리면 드러나는 승천의 통로.
그 문이, 절반 정도 열려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이게 무슨 결과로 이어질지는 네르하 본인조차 장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육체적인 능력으로만 따지면,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걸.
진정으로 전성기의 육체와 동격이 되었다는 걸!
‘그때 그 상황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군.’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때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네르하 님.”
“다르미안이군.”
무뚝뚝한 인상을 한 단발의 사내, 다르미안 엔시스가 막사에 나타났다.
“총사령관님의 호출입니다. 아마 몸 상태는 멀쩡할 테니 움직이는 덴 무리가 없으실 거라고.”
“그래?”
‘이 불가사의한 회복에 총사령관이 개입했나 보군.’
네르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쩡히 살아 있나 보군. 그땐 목숨을 내던졌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 그것이…….”
다르미안의 표정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무슨 일이 있나?”
“그건, 총사령관님께 가 보면 아실 겁니다.”
“…….”
네르하는 다르미안의 어두운 말에서 총사령관의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 * *
“어이, 왔어?”
“그 모습은…….”
“왜? 수백 년 산 엘프 처음 봐?”
류레이아는 마치 분재와도 같은 모습으로 네르하를 맞이했다.
분재라는 건 정말로 말 그대로였다.
다리는 식물처럼 대지에 박혀 뿌리가 내려 있었고, 팔다리는 푸른 나뭇가지가 되어 길게 뻗어 있다.
그나마 얼굴이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수백 년 늙어 버린 모습. 과거 젊고 탱탱했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걸,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나?’
중원의 의원들 몇몇이 정신이 죽어 버린 인간을 향해 식물인간이란 표현을 쓰던데, 지금 딱 류레이아의 모습이 그 꼴이었다.
류레이아가 피식 웃었다.
“너무 그렇게 불쌍하다는 표정 짓지 마라. 원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물론, 모든 마력을 세계수에게 바쳐 버린 만큼, 수호자와 삼마자의 자리에선 물러나야 되겠지만.”
“……!”
사실상 은퇴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전장의 제일공로자이자 영웅으로서 사후 처리에 대한 논의와 여러 상의할 게 있긴 한데…… 이 시점에서 널 부른 건 지극히 사적인 이유야.”
류레이아가 뭘 말하고 싶은지 대충 이해했다.
“엘프족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그녀는 예상을 벗어나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더, 라고 하시면?”
“엘프를 넘어, 이 대륙의 이종족 전체를 말하는 거야.”
류레이아의 그늘진 눈에는, 무거운 의무를 오랜 세월 어깨에 져 온 책임감이 엿보였다.
“삼마자 전체를 설득해 네 편에 서게 해 주지. 그 대신, 라데우스 휘하에 있는 모든 이종족들의 수호자가 되어 주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