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개선 (2)>
삼마자 전체?
라데우스의 최고 원로이자 대마법사들의 지지는 절대 가볍지 않다.
“나는 은퇴하겠지만, 그 빈자리에 시저가 들어올 가능성이 높아. 물론 시저라면 네 든든한 아군이 되어 주겠지.”
하지만 남은 둘이 네르하의 편에 서리라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절대 중립을 표방하는 머르딘이나, 속세 권력에 미련이 넘치는 마기온을 설득하긴 힘들 거야. 그걸, 내가 대신 해 줄 수 있어.”
“왜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거죠?”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까. 이종족들의 미래를.”
류레이아는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라는 건 사실 좀 포장한 거고, 인물이 너밖에 없어. 마하 그년은 절대 이종족들에게 자비를 베풀 성격이 아니야. 나머지 역시 마찬가지지. 그나마 아르바가 겉으로나마 가능성이 있긴 했는데, 그 꼬라지가 되어 버렸으니.”
“그러니까, 그걸 왜 제게 맡기냐는 겁니다. 이종족들 중에서도 인재가 없는 건 아닐 텐데요?”
“있긴 하지. 다만, 시간이 좀 걸려서 그래.”
류레이아의 말은 이랬다.
이종족들의 대변인으로서 라데우스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려면 8레벨의 경지엔 확실하게 이르러야 했다.
하지만 현재 각 이종족들의 로드급 중에서 8레벨의 강자는 엘프족의 류레이아뿐.
“엘븐 포레스트에 내 후계가 준비되어 있긴 한데, 녀석이 세계수를 이어받고 내 수준까지 이르려면 못 해도 수십 년은 지나야 해.”
“그 시간을 제가 벌어 달라는 거군요.”
“맞아. 정확해.”
그녀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이 대륙의 인간…… 아니, 마법사들에게 있어 이종족은 마법 재료나 이물질 취급을 받곤 하지. 당장 트롤들만 해도 백여 년 전에는 인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포션의 재료로 사냥당하는 신세였으니까.”
당장 이종족 중 하나인 뱀파이어만 봐도 그렇다.
네르하의 수하로 들어온 세이라의 경우, 숙부인 네슬렉이 그녀를 어떤 눈으로 쳐다보았는지 똑똑히 보았으니까.
“딱히 이권을 따지자는 게 아니야. 그저, 자기들 터전에서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니까.”
기본적인 것만 신경 써 달라는 건가?
사실, 류레이아가 내건 조건은 네르하에게 상당히 유리한 편에 속했다.
삼마자 전체의 지지.
비록 삼마자가 외부인이라는 신분상 라데우스 내부의 의결권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외부와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임시로 군권을 쥘 수도 있었고, 후계자 계승 전쟁에 어느 정도 발을 들이밀 수도 있었다.
‘당장 류레이아 휘하 마법사단 전체가 내 아래로 들어온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다르미안과 세드릭 같은 7레벨의 실력자가 네르하 진영에 합류한다면.
그리고 다른 삼마자들이 키우는 후계자들 역시 네르하에게 합류한다면?
비록 라데우스를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는 ‘장로’들의 지지만큼은 아니더라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 모일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대륙에서 활동하는 8레벨의 대마법사들인 만큼, 그들과 연이 닿아 있는 마탑과 학계의 힘 역시 네르하에게 몰릴 가능성이 높았다.
‘꿀이 뚝뚝 흘러내리는 제안이군.’
“어때? 괜찮지 않아?”
“확실히 괜찮군요.”
“그럼 콜?”
네르하는 그런 그녀의 말투에 피식 웃었다.
겉모습이 급격히 늙었긴 해도 은근히 귀여운 모습을 보이는 건 변하지 않았다.
“아뇨, 거절하겠습니다.”
“아니, 왜!”
“급하게 먹은 빵에 체하기 마련이니까요.”
류레이아는 두통이 이는 듯 눈을 찌푸렸다.
팔이 멀쩡하기만 했더라도 이마를 짚었을 기세였다.
“끄응! 잘 생각해 봐. 네가 압도적인 무력으로 영웅이 되었다 해도, 정치는 다른 문제야. 빵이고 나발이고 앞으로 네겐 정치적 뒷배가 꼭 필요하다고.”
“그 뒷배라면 든든한 조력자가 곧 생길 겁니다.”
“누구? 라데우스의 정치판이 얼마나 막장인데 그걸 뚫을 수 있을 정도면…….”
네르하의 사정을 고려하면 도울 수 있는 거물들은 정말 많지 않다.
라데우스 본가의 장로들 중 네르하의 지지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걸 고려하면, 장로급 인물 중에서 가능성이 있는 건 리브라의 루트비히나 네슬렉 정도.
루트비히는 사실상 판을 떠난 몸이니 남은 건 결국.
“설마, 네슬렉이냐?”
“예리하시군요.”
“멍청한 놈! 네슬렉이 얼마나 독사 같은 놈인데! 뭣 때문에 그런 놈의 힘을 빌리려고 해?!”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피와 난세를 사랑하는지.
“하지만 그렇기에 저를 물심양면 도와주시겠죠.”
“……미쳤어.”
그녀는 절대 꺾지 않겠다는 네르하의 의지를 읽고는 고개를 푹 떨궜다.
네르하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제안을 거절한다고 제가 이종족들을 배척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품을 생각이죠.”
“뭐, 뭐?”
“이종족들의 힘도 지금의 제겐 큰 힘이 되니까요.”
특히나, ‘서리 일족’ 역시 이종족의 영역에 들어가는 이상, 네르하가 이종족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 아니. 그럼 왜 굳이 내 제안을…….”
“그렇게 되면 너무 이목을 끌어 버리니까요.”
여기서 네르하가 류레이아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네르하는 세력 면에서 ‘마하 라데우스’와 비벼 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될까?
가뜩이나 이곳 북방의 일로 이목이 최대치로 끌릴 텐데, 여기서 세력까지 급격히 불어나는 게 눈에 대놓고 보인다면?
“남은 후계 모두가 힘을 합쳐서 절 끌어내리려 할 겁니다.”
“끄응!”
“가뜩이나 아르바 형님의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저들끼리 물고 늘어질 텐데, 괜히 나대다가 집중포화를 당해 줄 이유는 없죠.”
네르하가 알기로, 아르바를 지지해 주던 본가의 장로는 둘.
아르바의 배신 행각으로 그들의 입지는 붕 떠 버리고 세력은 와해될 것이다.
다른 이들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하늘에서 꿀단지가 떨어져 내리는 꼴.
“그럼 어쩌자는 거야? 네가 거절하면 나는 마하 그년한테 갈 수밖에 없다고?”
“물론 그렇게 둘 수는 없죠.”
“이게 나랑 장난하는 것도…….”
“그러니 역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역제안이라고?”
“류레이아 님이 제게 해 주실 수 있는 게 많다는 건 인정합니다만, 상황을 고려하면 조금 더 복잡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네르하는 아주 조용히 귓가에 속삭였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네르하의 계획에, 류레이아의 표정이 시시각각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귓가에서 네르하의 입이 멀어진 순간.
“이런 마귀 같은 새끼.”
류레이아의 입에서 자연스레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럼 동의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네르하는 상큼한 미소로 그 욕설을 받아들였다.
* * *
류레이아와의 대담 이후.
라데우스 북방 원정군은 본가에 승리 소식을 보내는 한편, 대대적인 개선 준비로 바쁘게 움직였다.
아르바와 서리 일족 족장 엘로이아의 배신.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해와 후속 조치는 모두 본가에서 처리하기로 결정되었다.
“괜찮겠어? 서리 일족을 모두 아르지엔으로 보내도.”
“네, 어차피 빙정은 그 힘을 다했으니까요.”
이번 세대 만년빙정의 수호자로 내정된 클로이아는 되레 상쾌한 미소로 네르하의 말에 답했다.
“빙정의 힘이 없는 이상 일족이 이곳에서 살아가기엔 많이 힘들어질 거고,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 거예요.”
비슈나르의 강림체를 박살 내기 위해 클로이아는 빙정의 힘을 모조리 끌어다 쓰는 초강수를 두었다.
“물론 빙정이 그 쓰임새를 다한 건 아니지만, 힘을 재충전하기 위해서는 최소 수백 년은 흘러야 할 거예요.”
그 외에도, 계속 북방에 있으면 라데우스 본가의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거란 계산 역시 깔려 있었다.
“그때의 힘을 다시 보기는 어렵겠군.”
“글쎄요. 그건 어떻게 될지 모르죠.”
클로이아는 옅지만 의뭉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네르하와 수하들은 바쁘게 움직이는 마법사들과 군인들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일공을 세운 네르하와 그 수하들은 이런 일에선 예외 처리가 되었다.
류레이아의 작은 배려였다.
“그러고 보니, 루시아는 어디 있지? 몸은 다 나았다고 들었는데?”
전쟁이 끝난 만큼 세드릭과 다르미안을 비롯한 다른 휘하 마법사들은 전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자리에는 네르하와 리브라에서 데려온 수하들만이 있는 만큼, 누군가의 부재는 당연히 쉽게 파악되었다.
“아 형님, 그게 사실…….”
어째서인지 알페온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저자들이 진지 안으로 들어온 이후, 루시아 양은 막사 안에 칩거하고 있습니다.”
“저자들?”
“네, 저자들.”
알페온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금빛의 플레이트 메일을 차고 돌아다니는 한 무리의 기사들.
즉, 라데우스의 경쟁자 케프렌 가문에서 파견 나온 정예 기사들이었다.
“아아, 대충 알겠군.”
“그, 루시아 양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없으니?”
“형님께 안면인식장애 마법이 걸린 로브를 좀 구해 달라고 요청하시던데, 어떻게 할까요?”
“어, 음…….”
대충 사정은 알겠는데, 그런다고 피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긴 한다.
알페온의 말로는, 이미 루시아는 케프렌의 혈육과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하니까.
네르하가 알페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렌 루 케프렌이라고 했던가? 케프렌의 대공자 말이다.”
“아, 네!”
“느낌이 어땠지?”
네르하의 물음에 알페온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솔직히 그냥 착해 빠진 인상이던데요? 실력이야 분명 있겠지만, 워낙 순해서 장사 같은 걸 시작하면 금방 말아먹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
“아, 물론 뭔가 불가사의한 느낌은 있었어요. 그때 갑자기 나타난 검은 장벽을 칼로 베어 버렸다고 담담하게 말했을 땐 조금 무서웠고요.”
“다른 이들은 어떻지?”
그 당시 마주쳤던 다른 수하들의 감상 역시, 알페온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흠, 악마라고 불릴 만큼의 사악함을 가졌다는데, 감정이나 기운을 숨기는 데 능숙한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이중인격?’
네르하가 팔짱을 낀 채로 생각에 잠길 때였다.
“네르하 도련님.”
바깥에서 본진 소속의 마법사 하나가 네르하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케프렌 쪽에서 네르하 도련님에 대해 만남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나를? 누가 말이지?”
“그게…….”
소식을 가져온 마법사는 어째서인지 살짝 언짢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렌 루 케프렌, 케프렌 가문의 대공자입니다.”
“오호?”
안 그래도 어떻게 해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으려나 고민했는데.
‘이런 식으로 먼저 만나자고 말할 줄은 몰랐네?’
마법사가 네르하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나자고 하는데 거절하는 건 도리에 어긋나지. 그쪽이 원하는 시간대를 잡으라고 해.”
“예, 아, 알겠습니다.”
마법사는 왠지 모르게 아쉽다는 기색으로 신형을 돌렸다.
네르하는 그런 마법사의 모습을 보곤 의아해했다.
“왜 저런 표정으로 돌아가지?”
그 대답은 입구 쪽에서 나왔다.
“지금 시기에 굳이 케프렌의 초청을 받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루시아!”
지금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던 루시아가 살짝 핼쑥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도와주러 왔는데 공도 세우지 못하고 찬밥 신세가 되었으니까요. 라데우스 입장에선 굳이 저것들을 만나 줘야 하나? 라고 생각되겠죠.”
“몸은 괜찮나?”
“그럭저럭이요. 부상은 다 나았어요.”
그럼에도 표정이 좋지 않은 건 정신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것 같은데?”
“…….”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던 루시아는, 살짝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가능하면 당신이 아렌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