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개선 (3)>
그런 말을 내뱉는 루시아의 기색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왜 만나지 말라는 거지?”
“…….”
“내가 그 녀석의 재능에 삼켜질 거라 보는 건가?”
“그건, 절대 그건 아닙니다.”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렌의 ‘악마’나 네르하의 ‘재능’이나 루시아의 눈으로는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으니 비교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실력과 재능의 고하를 넘어, 아렌의 악의는 뭔가 모를 무언가가 있습니다. 괜히 그것에 영향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향이라.”
루시아의 말 자체는 이해한다.
하나 그런 영향은 아직 자신의 인격이나 성장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의 일.
지금의 네르하에게 있어선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었다.
“네가 염려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루시아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 더 말려 봐야 네르하의 뜻을 꺾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네르하가 아렌을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쯤.
“응? 너는?”
“그, 네르하 도련님. 매우 송구합니다만…….”
네르하에게 의견을 물으러 왔던 그 마법사가, 매우 죄송스럽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방문했다.
“무슨 일이지?”
“그, 그것이…….”
마법사는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전했다.
“뭐? 취소?”
마법사의 말을 들은 네르하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 * *
“거절당했다고요?”
“그, 그렇습니다, 대공자.”
전령의 보고를 들은 아렌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거절할 성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아, 네르하 라데우스는 처음엔 대공자의 초대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다만…….”
“다만?”
“원정군 총사령관이 지금 상황에서 두 가문의 후예들이 만나는 건 악영향을 낳을 수 있다 하여 강제로 무산시켰습니다.”
아렌의 옆에 있던 원탁의 일좌, 노년의 기사 가비스가 짧게 혀를 찼다.
“쯧! 그 엘프가 쓸데없는 짓을 했군요.”
다른 기사들 역시 가비스의 말에 동의했다.
“그 네르하라는 녀석의 성향을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말이죠.”
“으음, 아쉽군요.”
아렌의 의도야 어찌 됐든, 케프렌의 기사들은 이번 만남이 ‘영웅’으로 승격한 네르하 라데우스를 파악할 기회로 여겼다.
아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 어쩔 수 없죠. 총사령관 선에서 거절당했다면 우리가 어찌할 방법은 없으니까요.”
“라데우스 같은 겁쟁이들에게 기대한 우리가 바보이지요.”
누군가가 내뱉은 말에 장내에 있던 기사들이 대번에 동조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렌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얼마 후면 미뤄졌던 제 성인식이 다시 시작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라데우스에서도 사절단을 보낼 테죠.”
“대놓고 네르하 라데우스의 이름을 언급한다면 그들로서도 보내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네, 조금 돌아가지만, 그와의 만남은 곧 이루어질 겁니다.”
그의 입가엔 환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인과율이 우리를 이어 주고 있으니까요.”
“…….”
“…….”
한순간 기사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아렌의 입에서 가끔씩 나오는 이 ‘인과율’이란 단어는, 그들로서도 이해하지 못할 영역에 있었다.
사실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에게 있어서, 마법쟁이들이나 쓸 법한 이 인과율이란 말은 그다지 내키는 단어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을 때.
“대공자님.”
“무슨 일이죠, 사리엘 경?”
이번에 아렌 휘하로 배속된 젊고 유능한 금발의 청년 기사, 사리엘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말씀하세요.”
“잠깐, 사리엘.”
무언가를 눈치챈 주변 동료들이 사리엘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사리엘은 그런 그들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작전 마지막 날, 마왕령 인근에 도착했을 때 대공자께서 잠시 자리를 비우셨었던데.”
“…….”
“이봐, 사리엘!”
“어째서 자리를 비우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장내의 분위기가 조용하다 못해 싸늘하게 변했다.
사리엘이 갑자기 대공자를 추궁하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저 그가 대공자와 경쟁하는 2공자의 추천으로 합류한 자라는 것뿐이었다.
아렌이 싱글벙글한 미소로 반문했다.
“왜 그게 궁금하신가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총사령관이 아니라고는 하나, 대공자께서 이 자리의 실질적인 지도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분께서 아무런 언질 없이 자리를 비우신다는 건…….”
얼핏 보면 아렌의 위치와 권위를 존중하는 듯한 발언이었지만.
이게 아렌을 정치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리엘! 대공자께 너무 시건방진 태도로군!”
사리엘과 비슷한 연령대의 기사들이 그를 제지하고자 나섰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
그리고 어째서인지 사리엘을 함께 추궁해야 할 원로 기사들은 조용히 시선을 약간 아래쪽으로 깔고 있었다.
젊은 기사들이 그들의 그런 태도에 의문을 가지던 찰나.
아렌이 사리엘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걸 말해 주는 것 자체는 딱히 어렵지 않습니다만.”
“대공자님?”
“다른 경들의 말마따나 사리엘 경의 태도는 조금 불만이군요.”
“……?”
사리엘은 한순간 아렌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아주 찰나의 순간, 사리엘은 뱃속이 크게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우, 우욱!”
내장이 크게 짓눌리는 감각과 함께, 목구멍 안쪽에서 비릿한 혈향이 콧속을 자극하던 그때.
쾅!
사리엘의 머리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그대로 탁자에 거칠게 처박히고 말았다.
“컥! 쿨럭!”
코가 짓뭉개지고 그 사이로 피가 흘러내린다.
단순한 코피라기엔 탁자 위를 적시는 양이 지나치게 많았지만.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이 사실에 대해 지적하거나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바짝 얼어 부동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뿐.
“죄송합니다, 대공자님.”
사리엘의 머리를 탁자에 처박은 장본인.
원탁의 기사 가비스가 사리엘의 뒤통수를 지그시 누른 자세 그대로, 아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기사 사리엘에 대한 수뇌부 교육이 미진한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사리엘은 젊은 나이에 소드 스피릿(劍鬼)의 경지에 오른 기수.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청합니다.”
“으음, 자비라…….”
아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답했다.
“자비 이전에, 너무 세게 내리치신 거 아닌가요? 그러다 출혈과다로 죽게 생겼는데?”
“…….”
사리엘의 양팔이 축 늘어진 것을 보면, 이미 기절한 듯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 상황에선 기절한 것이 사리엘에겐 다행이었다.
“그 말씀은, 사리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이라 여겨도 괜찮겠습니까?”
“아니 뭐, 자비고 뭐고. 애초에 딱히 사리엘 경이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러세요.”
아렌의 그 말이 있고 나서야, 가비스는 사리엘의 뒤통수를 누르던 팔의 힘을 거두었다.
“사리엘을 의료병에게 데리고 가고, 새 탁자를 가져와라.”
“네, 네! 가비스 경!”
짬이 되지 않아 주변에 서 있던 다른 기사들이 우렁차게 외치며 가비스의 명령을 이행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기사들의 눈빛엔, 누굴 향한 건지 모를 두려움이 맴돌고 있었다.
가비스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여전히, 무지막지한 살기로구나.’
제왕의 경지에 이른 원탁의 기사인 그조차도, 아렌이 내뿜는 살기를 맨정신으로 버티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이제 애송이 티를 막 벗으려는 사리엘이 어찌 버틸 수가 있으랴?
‘검성의 경지에 이른 자는 살기만으로도 숙련된 기사를 짓눌러 죽일 수 있다던데, 지금이 딱 그 꼴이군.’
평소에는 그 나이대에 맞는 소년처럼 굴지만, 가끔씩 보여 주는 이런 살벌한 모습은 몇 번을 봐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2공녀였던 그 아이도, 이런 대공자의 모습을 알고 있으니 가문에서 뛰쳐나간 거겠지.’
가비스는 두려운 눈빛으로 아렌의 옆모습을 흘겼다.
‘이젠 가주조차도 대공자를 막을 수 있으리란 보장을 하기가 어렵구나, 만약 저 살심이 대놓고 폭발한다면…….’
대륙 제일의 검의 명가, 케프렌 가문은 한바탕 피의 폭풍 속을 거닐게 될 것이다.
* * *
약 2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북방 원정군을 지원하기 위해 모였던 케프렌을 비롯한 북부 귀족 연합은 전쟁이 종결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산했다.
애초에 그들은 라데우스의 세력권에 속하지 않은 이들. 계속해서 동행할 이유는 없었다.
“드디어, 저기 베리타스가 보이는군.”
북방 원정군은 아르지엔에서 며칠 시간을 보낸 이후에도, 천천히 귀환길에 올랐다.
주도(主都) 베리타스에서도 나름 원정군을 맞이할 준비 기간이 필요했고, 원정군은 원정군 나름대로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회복할 기간이 필요했다.
특히 총사령관 류레이아의 치료가 시간을 잡아먹은 결정적인 이유였다.
네르하는 오랜만에 보는 도시의 정경에 묘한 감흥을 느꼈다.
‘여전히 화려하군. 아니, 이전보다도 더 화려해졌나?’
대낮인데도 도시 전체에 불이 켜져 있는 게 느껴진다.
베리타스의 거대한 입구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수만에 달하는 인파가 몰려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우와아아아아!”
이 도시에 이만한 인구가 살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인파가 원정군을 환영했다.
2층 이상의 건물에선 사람들이 생화를 뿌려대고 있었고, 도시 곳곳에 음악과 조명 마법이 펼쳐졌다.
말을 탄 채로 선두 그룹에서 일을 살피던 네르하가 작게 실소했다.
‘로열 에어리어까지 이어진 레드 카펫인가? 신경 좀 썼군.’
베리타스의 전체 부지의 20%를 차지하면서도 오직 라데우스 혈족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구역.
그런 구역을 일반 마법사들에게 오픈한 것은, 그만큼 이번 전쟁의 승리가 라데우스에게 중요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물론 그 로열 에어리어에서도 가주전이 위치한 1번 구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은 극히 소수였지만 말이다.
“이쪽으로.”
아니나 다를까.
가주전까지 도달한 이들은 네르하와 직계들을 포함해 스무 명도 되지 않았다.
가주전의 안쪽까지 들어간 일행은 라데우스의 중진들이 양열로 도열한 자리까지 도달해.
가주, 카이젤과 대면하였다.
“고생했다, 모두들.”
마치 황제를 배알하는 듯한 광경이었지만, 아무도 이런 상황에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이곳에서 카이젤은 제국 황제보다도 더욱 드높은 존재였으니까.
‘오랜만에 보는군.’
네르하는 엎드린 채로 가주의 존재감을 느꼈다.
자신조차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힘의 소유자.
리브라에서 한번 겪어 보았던 생물학적 친부와 재회한 순간이었다.
* * *
“다녀왔어, 가주.”
모두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상황에서, 삼마자 류레이아만이 한쪽 무릎만을 바닥에 닿은 채 뻣뻣한 고개로 카이젤의 말을 받았다.
“고생 많이 했다, 류레이아.”
“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가주를 눈앞에 둔 상황임에도 류레이아의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
몇몇 중진들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딱히 뭐라 하는 이는 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연배와 실력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대우였으니까.
“보고서를 받긴 했다만…… 일단, 가볍게 이야기를 들어볼까?”
카이젤의 입가에 살짝 호선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