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의심 (1)>
그야말로 마법계의 중진이라 할 법한 이들이 이 자리에 다 있었다.
각 마탑의 탑주, 유명 교육기관의 학장, 라데우스의 장로들과 전대 원로들까지.
그 전대 원로에 속하는 루트비히와 네슬렉 역시 리브라에서 나와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질식사했을 게 분명할 자리였다.
그런 무거운 자리에서, 마치 재미난 여행담을 자랑하듯 즐거운 표정으로 떠들어대는 류레이아의 모습은, 얼핏 보면 퍽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정말 죽을 뻔했다니까? 그렇게까지 위기감을 느꼈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 300년 전에 세계수가 불탈 뻔한 이후로 처음이었지.”
“그렇군.”
카이젤과 류레이아는 마치 친한 친구처럼 잡담하듯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누구도 이 둘 사이의 대화에 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귀를 열고 듣기만 할 뿐.
그런 라데우스의 중진들의 표정이 변한 것은, 류레이아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부터였다.
“저 네르하 꼬맹이가 아니었다면 정말 죽었을 거야. 마왕령에 대기 중의 마나를 봉인하는 능력이 있다는 건 정말 마지막까지 몰랐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마왕을 죽였지?”
“으음,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정확히 보진 못했어. 아마 같이 싸운 엘로이아의 딸을 제외하면 누구도 모를걸?”
류레이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만, 마지막 순간에 거대한 스타 플래티넘을 보았다는 건 확실하지. 그게 마왕을 마무리한 건 확실해.”
“호오?”
살짝 턱을 쓰다듬는 가주의 모습에, 네르하는 속으로 긴장감을 느꼈다.
마지막 결전 당시, ‘네르하’의 원래 역량을 훌쩍 뛰어넘은 신위에 대한 변명은 뭐가 됐든 한 번은 반드시 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인지 의외로 가주는 네르하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훌륭하군.”
“그렇지?”
“……?”
장내 모든 이들의 시선이 네르하에게 쏠려 있음에도 가주의 입에선 별다른 추궁이나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으, 으음!”
오히려 다른 이들이 그때의 상황을 묻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게 대놓고 느껴질 정도였다.
가주가 류레이아에게 물었다.
“그래서, 몸이 그렇게 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냐?”
“……!”
그 말에, 모든 이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었지만, 류레이아의 급격한 노화는 당면한 현재 상황에서 최우선적인 문제였다.
류레이아가 씁쓸하게 대꾸했다.
“어쩌긴. 은퇴해야지.”
“은퇴하겠다?”
“모든 마력을 잃은 내가 이제 뭘 할 수 있다고?”
“흡!”
8레벨에 달하는 대마법사이자 최고 외부 고문, 삼마자의 자리에 공백이 생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카이젤조차 별다른 대꾸 없이 살짝 신음을 흘릴 정도였으니까.
“흐음…….”
“뭐, 어차피 내가 은퇴해도 별 티는 나지 않을걸? 차세대 수호자로 셀로미엔이 준비되어 있어. 그 아이라면 잘 해낼 거야.”
“엘븐 포레스트의 경비대장이라면 알고 있지.”
물론 그 셀로미안이란 엘프가 그녀의 공백을 완전히 메울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카이젤은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삼마자의 공백이라면, 시저가 메워 주겠지. 그 망할 새끼, 나도 몰래 리브라에 처박혀서 꿀 빨고 있더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장내의 시선이 그대로 루트비히와 네슬렉에게 향했다.
“……명왕 시저 루드벡이 리브라에 있다고?”
시저의 소재는 그야말로 최고 기밀 중의 기밀.
이곳에 자리한 라데우스의 중진들 중에서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크, 크흠! 그런 기밀을 이런 자리에서 쉽게 내뱉는 건 좀 아닌 것 같소만.”
루트비히는 크게 헛기침하며 사태의 수습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고, 루트비히를 향한 해명을 바라는 눈길은 여전히 싸늘하게 빛났다.
‘망할 년!’
류레이아가 왜 저런 말을 내뱉었는지 노회한 루트비히가 모를 리가 있나.
조금이라도 네르하에 대한 관심을 거두기 위한 술책이다.
가주 역시 그걸 인식하고 있고, 루트비히 역시 나름 동의하는 바이지만.
‘거기서 날 끌어들인다고?!’
전대의 원로인 루트비히를 엿 먹일 존재는 이 자리에서도 정말 몇 되지 않는다.
문제는. 눈앞에 있는 저 빌어먹을 엘프가 그 ‘몇’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루트비히에겐 저주와도 같았다.
‘두고 보자!’
루트비히는 원망의 눈길을 류레이아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혀를 살짝 내미는 것으로, 루트비히의 혈압을 50 정도 치솟게 만들었다.
* * *
가주전에서의 대담은 의외로 별다른 말 없이 끝났다.
‘의외군.’
정식 논공행상은 일주일 뒤에 있을 예정이니 그동안 베리타스에서 푹 쉬라는 명령을 받았다.
‘역시, 일부러겠지?’
아르바와 엘로이아의 배신, 네르하의 초월적인 역량, 전쟁 도중에 일어난 온갖 뒷얘기들 등등.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을 텐데, 일부러 일을 축소한 느낌이 매우 강했다.
‘뭐, 언젠가는 다가올 일이니. 대비는 되어 있지만 시간이 남은 만큼 변명 몇 개 정도는 추가해 둘까?’
네르하는 라데우스 본가가 운영하는 호화스러운 마차에 몸을 실었다.
네르하를 따라온 수하들은 대부분 흩어졌다.
알페온 같은 귀족 출신들은 이미 가문에서 마중 나온 이들이 있었고, 실마연의 평민 출신 수하들 역시 말이 평민이지 실제 삶은 중산층 이상이나 다름없어서 각자 제집으로 돌아갔다.
클로이아 역시 일족을 챙겨야 한다며 잠시 멀어졌고.
남은 건…….
“그, 죄송해요.”
“갈 데가 없다는데 뭐 어쩌겠냐?”
네르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시아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주도에 거주지 하나 마련해 주지 않은 건 좀 심하군.”
“……이곳을 거치지 않고 바로 리브라로 갔으니까요.”
뭐, 루시아의 극비신분을 고려하면 이런 식의 행정 오류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진짜 일어나니 좀 당황스럽군.’
루시아는 결국 네르하가 지내던 외곽 저택으로 동행하는 걸로 결정 났다.
물론 네르하가 지내던 곳은 고용인만 수십에 달하는 거대한 저택인 만큼 루시아가 누울 자리가 없는 건 아니다.
문제는.
‘어머니한테 뭐라 변명하지?’
네르하는 가능하면 모친인 로젤리아에게 루시아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라데우스 혈족 중에서도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 정말 극소수.
지금 이 시기에 그녀의 정체가 탄로 나는 순간,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폭풍이 몰아칠 건 뻔할 뻔 자다.
‘어머니라면 겉으로 입은 다물어도, 분명 뒤에서 이것저것 손을 쓸 게 분명하니 문제지.’
뭐, 적당한 하급귀족이나 평민으로 포장하면 되겠지만, 로젤리아의 성향상 분명 격이니 어쩌니 하는 못 할 말을 루시아에게 내뱉을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나마 루시아가 어느 정도의 모욕은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다.
* * *
뭐, 다행히 네르하가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우려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서 문제였지만.
“어서 와요, 네르하!”
로젤리아는 한발 미리 도착해서 고용인들과 함께 네르하를 환영했다.
가주전에선 철저하게 표정을 죽이고 있었던 그녀는,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모습으로 네르하의 귀환을 반겼다.
“어쩜, 이 어미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다른 형제자매들을 모두 제치고 제일의 공적을 세우고 돌아오다니요!”
그것도 북방으로 향한 다른 직계들과는 달리 네르하는 리브라 재학생의 입장이었으니, 로젤리아의 기쁨은 절대 무리가 아니었다.
“그 여자의 썩은 표정은 정말…… 아! 내가 무슨 말을!”
2부인 유리아 라데우스의 모습을 상기하던 그녀가 다급하게 자신의 입을 톡톡 건드렸다.
워낙 통쾌하다 보니 감정 조절이 잘되지 않는 모양이다.
“자자! 만찬이 준비되어 있답니다. 어서 들어가지요.”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
“내가 내 아들을 맞이하는데 무슨 말을!”
행복 수치가 최대치를 뚫어 버린 지금, 루시아의 존재 따윈 그녀의 눈엔 들어오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어머님, 잠깐, 그 전에.”
로젤리아의 뒤쪽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근원을 따라, 네르하의 시선이 뒤편으로 향했다.
“오랜만이야, 오라버니.”
그곳에는, 과거보다 훌쩍 자라 버린 한 소녀가 전투적인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네이하.”
어느덧 숙녀의 티가 나는 은갈색 머리카락의 소녀.
네르하의 친동생이자 가문의 막내, 네이하 라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내 눈으로 반드시 확인해 봐야겠어.”
“네이하! 이 경사스러운 날에 무슨 짓인가요!”
로젤리아가 다급히 나서 야단을 쳤지만, 네이하는 요지부동이었다.
“괜찮습니다, 어머님.”
네르하가 그녀를 제지했다.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니까요.”
“네르하, 네이하는 벌써 5레벨에 이르렀습니다. 약간의 시간을 주면 6레벨의 마법도 사용할 줄 알아요!”
“……걱정이 되는 게 제 쪽인가요?”
이것 참. 마왕까지 잡고 돌아왔는데 아직도 자기 아들을 믿지 못하고 있다니.
네르하는 허탈한 감정을 느끼며 앞으로 나섰다.
‘5레벨이라. 식사 전의 몸풀기로 딱이겠군.’
주변 고용인들을 물린 네르하가 네이하를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덤벼 봐라, 네이하. 한 수 가르쳐 주지.”
그 말에 네이하의 눈이 살짝 빛났다.
“예전에 배커 따위에게 빌빌대던 그 병신 같은 모습은 없어서 좋네.”
“으음…….”
네이하의 말에 네르하는 살짝 신음을 흘렸다.
‘아마 지금 너보다 배커가 더 강할 텐데.’
경지 자체는 비슷할지 몰라도, 실전 경험은 배커 쪽이 압도적이다.
타고난 재능이 압도적이니 리브라에 들어간다면 다시 역전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이라면 뭐.
“뭐야? 그 표정은?”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덤벼라.”
“날 상대로 감히 지팡이도 없이!”
네이하의 전신에 마력이 흩날리면서 펑퍼짐한 로브가 마력의 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이하의 양옆에, 각각 불덩이와 날카로운 얼음의 창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오, 제법?’
상극에 해당하는 속성을 동시에 다루면서 위력을 증폭시키는 건, 보통의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염화동토(炎火凍土)!”
두 속성이 나선을 그리며 일직선으로 네르하를 향해 날아갔다.
“네, 네르하!”
로젤리아가 걱정스럽게 네르하의 이름을 외쳤다.
‘거참.’
과거에 뿌리를 내린 선입견이 이 정도까지 깊을 줄이야.
‘자기 아들내미를 이렇게까지 믿지 못하다니. 이번 기회에 좀 고쳐 줘야겠구만.’
오러는 반칙이나 다름없으니 금지.
그렇다면.
네르하의 심장에 여섯 개의 서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단전을 배제한 순수한 마력이 발현하면서, 네르하의 고유 계통. 속성통합이 본격적으로 발동했다.
“염화동토.”
“……뭐?!”
화악!
네이하가 날린 염빙의 이중속성이 동일한 속성과 충돌하며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어? 어어?”
설마 자신의 술식이 그대로 파훼될지는 생각도 못 했는지, 네이하의 표정이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하지만 네르하는 상대가 동생이라도 자비가 없었다.
“멍 때리지 말고 움직여라, 네이하.”
네르하의 손 위에 여섯 개의 속성이 혼합한다.
그 마력은 이윽고 휘황찬란한 다이아몬드와도 같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벨카서스 비전.
엘리멘탈 볼텍스.
“……어?”
난이도로는 5레벨, 위력으로 따지면 6레벨을 넘어서는 다속성 혼합마법이, 이번엔 네이하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