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후계 경쟁 개막 (2)>
제국의 황성에 버금가는 거대한 연회장.
천여 명의 대인원이 문제없이 어울릴 수 있는 이 회장에는, 각국, 각계의 중역들이 모여 서로 안면을 나누고 있다.
“사람이 참 많군요.”
2층에서 장내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네르하가 짤막하게 감상을 내뱉었다.
“이것도 다 모인 건 아니에요. 이곳에 참석할 수 있는 건, 우리 라데우스 가문에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한 이들뿐이니까요.”
그게 직위든, 재력이든, 개인의 능력이든 말이다.
마치 전장에 참전하는 장수의 모습을 한 로젤리아가, 네르하를 직시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네르하. 행사가 끝나면 옥석을 가리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니까요.”
상을 받는다고 끝이 아니다.
네르하의 목표가 라데우스의 가주 자리이니만큼, 당연히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게 밑을 받쳐 주는 발판들을 마련해야만 했다.
“축하합니다, 한스 경! 드디어 대장으로 진급하시는군요.”
“부끄럽습니다. 변변찮은 공을 인정받았을 뿐입니다.”
곳곳에서 축하의 인사와 감사의 대답이 들려온다.
이번 논공행상의 당사자들은 절대다수가 중년에 이른 전투 마법사들.
전사한 상급자들의 빈자리를 메우거나 정말로 큰 공을 세워 영전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오는 한 무리가 등장했다.
“호오, 저들은?”
그 무리는 일단 겉모습부터가 귀족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젊군요.”
“후후후, 보기 좋네요. 칙칙한 중년보단 역시 젊은 영계들이죠.”
“복장을 보니 구경을 온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검은색 군용 프록 코트를 입은 걸 보면 이번 전쟁의 참여자가 분명했다.
“제법 침착하군요.”
“아아, 선두에 있는 건 리브레히트가의 도련님이군요. 예전에 본 적이 있어요.”
“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 알페온이 누구와 함께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는 없다.
“저들이, 네르하 공자의 수하들인가요?”
“아직 리브라를 졸업하지도 못한 이들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수준이 괜찮은데요?”
이곳에 참석할 정도면 단순히 귀족 지위만으로는 안 된다.
마법사로서의 소양 역시 수준급 이상이어야 하며, 제대로 된 눈썰미 역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그들의 눈에 전원 5레벨을 넘어선 네르하의 수하들은 합격점을 훨씬 웃돌았다.
‘탐나는군.’
‘저 정도면 당장 중용되어도 이상할 게 없을 텐데.’
어느 시대든 미래가 창창한 인재는 높은 평가를 받기 마련.
그들의 평가가 높아질수록, 그들을 발탁한 네르하의 평가 역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저들과는 반대로, 저쪽의 표정은 영 좋지 않군요.”
한 귀족의 말에 근처의 시선이 전부 옮겨 갔다.
연회장 한쪽에서도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귀족들의 입가에 작은 비웃음이 생겨났다.
“아아, 그럴 만도 하죠.”
“바멜 공자와 세티안 공녀가 이번에 아주 체면을 구겼다던데…….”
“2공자 역시 사정이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하긴, 자기들 주인이 밀려 나가게 생겼는데 표정이 좋을 리가 없죠.”
그들의 비웃음은 연회장 내의 떠들썩한 잡담에 밀려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하나.
뒷담이 닿지 않는다고 하여, 저들을 향한 묘한 분위기까지는 지울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한쪽 팔에 붕대를 감은 사내, 바멜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표정 관리해, 바멜.”
“내가 욕을 안 하게 생겼나, 세티안?”
“그래도 표정 관리해. 그나마 남은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고 싶어?”
세티안의 일갈에 바멜은 입을 다물었다.
북방에서 자신들이 세운 공은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그 어떤 공을 세웠더라도 이번 연회장의 주역에 비하면 빛이 바랜다.
사실상, 실패나 다름없는 원정이었다.
“어떻게든 이번 연회에서 세력을 다시 끌어모아야 해.”
아직 핵심 지지층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콩고물만 노리던 잡다한 놈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상당히 떨어져 나갔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모르겠어. 네르하가 이번 기회로 어디까지 성장할지 감이 오질 않으니까.”
모든 것을 걸고 네르하를 쓰러뜨릴 건지, 아니면 반대로 네르하와 손을 잡고 마하와 맞설 것인지.
“레티안은 네르하에게 손을 내밀라고 했는데 말이야.”
그 말에 바멜이 인상을 구겼다.
“말이 그렇지, 사실상 밑으로 들어가라는 의미가 아닌가?”
“…….”
아직 전체적인 세력도로만 보면 네르하는 여전히 최약체에 가깝다.
하지만 바멜과 세티안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번 논공행상이 끝나면, 네르하는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지위가 올라가게 된다는 걸.
‘제길, 네르하 따위에게 이리 밀리는 날이 오다니.’
이제 앞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두 남녀의 눈가에 짙은 고뇌가 내려앉았다.
* * *
“형님!”
“왔냐, 알페온.”
북방에 있을 때만 해도 늘 거지꼴이었던 알페온은 지금 보니 고위 귀족이라는 말이 이해될 정도로 탈바꿈해 있었다.
네르하는 반짝이는 녀석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표정이 좋군.”
알페온이 헤픈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헤헤헤, 가주님께 칭찬 많이 들었거든요. 오랜만…… 아니,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너 정도면 자부심을 가져도 돼.”
전쟁이 끝나고 귀환길에 오르던 도중.
네르하의 수하들 중 마지막으로, 알페온이 5레벨에 올랐다.
당연히 녀석은 기뻐서 미쳐 날뛰었고, 자기 아버지인 공작에게 얼마나 자랑했을지 눈에 뻔히 보였다.
“형님, 말씀드릴 게 있는데.”
알페온이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네르하에게 작게 속삭였다.
“가주님께서, 시간이 날 때 형님과 한번 만나기를 청하셨습니다.”
“호오? 리브레히트 공작님이?”
네르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리브레히트 가문은 라데우스의 협력 가문 중에서도 한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세력가.
라데우스와 케프렌이라는 비정상적인 세력을 제외하면 제국 전체를 통틀어서도 순위권에 들 것이다.
“네르하, 이 기회는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이 말을 엿들었는지 로젤리아가 눈을 빛내며 외쳤다.
“리브레히트 가문의 지지를 얻는다는 건, 본가의 장로 한 명의 지지와 맞먹을 정도예요. 반드시 좋은 인상을 보이세요!”
“뭐,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네르하는 폭주에 가까운 모친의 모습에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의 정치적 움직임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데 말이지.’
전생이나 지금이나 무리의 선두에서 싸우는 것에나 익숙하지, 이렇게 사교의 장을 누비는 일은 영 젬병이었다.
그런 그때.
둥! 둥! 둥!
“가주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주변 샹들리에의 색이 일제히 바뀌는 것과 동시에, 안쪽 홀에서 카이젤과 대부인 시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로젤리아가 황급히 네르하의 팔목을 붙잡아 당겼다.
“가죠, 네르하. 이번 연회의 주역은 당신입니다.”
“네, 어머님.”
뭐가 됐든, 지금은 북방에서 고생한 대가를 받을 시간이다.
* * *
의외로 논공행상 자체는 생각보다 거창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진급자가 워낙 많은 탓이기도 했고, 참여한 인원들을 고려하면 반나절 이상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논공행상을 주최한 가주 카이젤은 이번에 참가한 약 200여 명의 인원들에게 짧게라도 일일이 치하하며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물론 단순히 이름만 불러 주는 공치사에서 그치지 않았고.
“앞으로도 라데우스에 대한 영원한 충성심을 기대하지. 맥퀸 ‘남작’.”
“네! 넵! 가주님!”
네르하의 수하로 들어온 디센트 맥퀸은, 이번 공로로 무려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목숨을 건 전쟁 한 방으로 평민이 대번에 귀족 반열에 오른 것이었다.
디센트만이 아니었다.
네르하를 따라 북방에 따라나선 실마연의 수하들 모두가 남작 작위를 받았다.
비록 영지는 없는 이름뿐인 작위라고는 하나, 그들은 그 어떤 금은보화나 아티펙트를 받은 것보다도 기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르하 라데우스.”
“네, 가주님.”
논공행상의 가장 마지막 차례.
네르하가 카이젤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번 북방 원정에서 마왕 토벌이란 가장 큰 공을 세운 너에게, 남쪽 지방의 도시 ‘필렌’을 하사한다.”
그 말에 귀족들이 대번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허, 필렌이라면!”
“베데이스 마탑이 본거지를 둔 곳 아닙니까?”
도시 하나를 수여한다는 건, 그 도시 안에 자리 잡은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양도한다는 것.
베데이스 마탑이라면 등록 인원이 2천을 넘어가는 나름 중견 규모에 들어가는 마탑이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또한, 너에게 보물전의 아티펙트 3개를 하사한다. 종류와 등급의 제한은 두지 않는다.”
“……!”
이 말에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종류와 등급을 가리지 않는다는 건, 네르하가 세상의 균형을 깨트릴 수도 있는 신화시대의 유물도 거리낌 없이 가져갈 수 있다는 뜻.
그 가치가 얼마나 될지는 여기 있는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 이후로도 몇 가지 네르하에 대한 특혜가 입에 올랐지만, 이 두 가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가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네 활약을 기대하지.”
고개를 숙인 상황에서 가주의 얼굴을 바라보지는 못하지만.
어쩐지, 네르하는 가주가 지금 웃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 * *
그렇게 논공행상이 끝나고 축하연이 열렸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네르하에게 달라붙었고, 네르하는 그야말로 질식사할 것 같은 인파 속에서 정신줄을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때, 그런 네르하에게 다가온 이가 있었다.
“힘들어 보이는군.”
“어머, 네슬렉 장로님!”
“하하, 모두 오랜만이오.”
네슬렉 라데우스.
전 리브라의 부학장이자, 이번에 장로 직위에 오른 그가 네르하를 찾아왔다.
“네슬렉 장로님도 네르하 공자를 만나러 오셨나요?”
한 귀부인이 눈웃음을 치며 이렇게 물었다.
장로 자리를 차지했다고는 하나, 네슬렉은 기존 권력다툼에서 패배한 자.
많은 이들이 네슬렉의 등장을 의혹과 의문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네슬렉이 핵폭탄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제 네르하의 후견인으로서 활동하게 될 텐데, 당연히 인사 정도는 해 둬야 하지 않겠소?”
“후, 후견인?!”
“허허허, 여기 계셨군요, 네르하 공자.”
좌중이 놀라워하는 것도 잠시.
네르하를 향해 두 명의 노인이 다가오자, 좌중의 놀람은 극에 달했다.
“베, 베르돈 장로? 더글라스 장로?!”
베르돈 라데우스. 더글라스 라데우스.
과거 아르바를 지지했던 두 명의 장로가, 친근한 척을 하며 네르하에게 다가왔다.
여기에, 결정타가 하나 더.
“쯧! 많이도 몰려 있군.”
“지, 지렌 장로님?”
북방에서 네르하와 인연을 맺은 지렌 라데우스.
와인잔을 든 그가 뭔가 못마땅한 얼굴로 이쪽 무리에 합류해 버렸다.
즉, 지금 이 자리에 라데우스의 장로가 무려 넷이나 모인 것이다!
‘허, 참.’
네르하는 갑자기 집중된 시선에 곤혹스러웠다.
지금 이 자리가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걸 믿을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활약해 줄 거란 기대는 하고 있긴 했었지만.’
설마하니, 그 짧은 시간 동안 무려 장로를 세 명이나 끌어올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찡긋!
황당해하는 네르하를 향해, 네슬렉이 살짝 윙크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