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후계 경쟁 개막 (3)>
네슬렉이 본격적으로 참전한 이후, 네르하를 둘러싼 주변의 흐름은 상당히 뒤바뀌었다.
“오오, 네르하 공자가 리브라에 숨어든 흑마법사들을 처단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보르겐 백작. 그 일로 가주와 학장님의 눈에 제대로 들었지요.”
네슬렉은 대화의 주제를 네르하에게 맞추는 한편, 주변의 이목을 자신에게 끌어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주변의 이목이 네슬렉에게 집중되었고, 네르하는 주변의 관심에서 벗어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것도 진심으로 말이다.
네슬렉은 그야말로 무리의 중심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동했다.
정치에도 레벨이 있다면 네슬렉의 경지는 9레벨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때, 발코니 인근에서 휴식을 취하던 네르하에게 한 노인이 다가왔다.
“네슬렉이라. 꽤 위험한 자와 손을 잡았구나.”
“지렌 장로님.”
지렌은 천천히 잔을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이야 상당히 유용한 패가 될 테지. 하지만 결국 놈은 독이 든 성배다. 언젠가는 널 잡아먹고 제 야욕을 드러낼 거다.”
“네슬렉 장로님의 설득으로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흥, 내가 뭐가 아쉬워서.”
지렌은 코웃음을 치며 네르하의 옆에 섰다.
“난 그저, 네놈이 바스텔과 마하를 뛰어넘는 재목이라 생각했기에 왔을 뿐이다. 가주를 제외한 다른 이의 설득은 내 의사를 결정할 수 없지.”
하긴, 세력 면에서 이미 일가를 이룬 지렌이 굳이 누군가의 꼬드김에 넘어갈 정도는 아니다.
“4명의 장로라고는 하나, 앞으로가 그리 쉽지는 않을 거다.”
목을 살짝 축인 지렌이 말을 이어 나갔다.
“베르돈과 더글라스는 아르바가 가주 대리이던 때 북방에서 수하들을 많이 잃었지. 지금까지 리브라라는 변방에만 박혀 있던 네슬렉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지금은 휘하에 세력이 별로 없다는 말씀이군요.”
“맞아. 시간이 지나면 복구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저들에게 필요한 건 그 시간이니까.”
라데우스에서 장로라는 지위가 강력한 이유가 이것이다.
가문 내에서 무력 부대를 직접 창설, 관리할 수 있는 권리.
후계들조차 일정 규모 이상의 수하들을 두는 것이 제한되지만, 장로들에겐 그런 제한이 없었다.
“지지하는 장로들의 수는 마하와 같지만, 실질적인 전력은 마하의 절반도 채 안 될 거다. 무력 외의 부분에서는 비교할 가치도 없지.”
물론 그것만으로도 라데우스라는 가문에서 새로운 한 축을 만들 정도는 된다.
‘하지만 패권을 다투는 건 어림도 없지.’
분위기가 가라앉은 네르하를 향해 지렌이 말했다.
“여전히 바스텔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장로가 3명. 그리고 중립인 1명. 그들을 어떻게 끌어오느냐에 따라 후계 경쟁이 결정 날 거다.”
특히 그중에 대장로 수넨 라데우스가 포함된 걸 고려하면 남은 4명은 반드시 회유해야만 했다.
“뭐, 네슬렉이 있는 이상 알아서 잘하겠지. 당장 네가 해야 할 일은 정치질이 아니니까.”
“네, 무엇보다 라데우스를 대표하는 강자로 성장하는 것. 그게 지금 제가 할 일이니까요.”
“흐흐, 잘 아는구나.”
지렌이 뭐라고 말을 이으려고 할 때였다.
“뭘 그렇게 재밌게 담소를 나누고 계신가요?”
“……!”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네르하와 지렌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여인의 정체를 알아챈 지렌이 쓴웃음을 내지었다.
“성질 급한 녀석이 왔구나.”
“지금껏 제 제안은 그토록 무시하시더니, 이런 곳에 계실 줄은 몰랐어요.”
뚜벅! 뚜벅!
난데없는 여인의 등장에, 주변에서 떠들던 귀족들이 대거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이 만남은 이번 축하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만남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르하는 한 발짝 앞으로 나가 여인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마하 누님.”
* * *
마하 라데우스.
대부인 시엘 소생으로 라데우스의 장녀이자 현시점 가장 유력한 가주 후보.
그리고 칩거한 바스텔과 어린 네이하를 제외하면, 별다른 결격 사유가 없음에도 북방에 가지 않은 유일한 직계이기도 했다.
“그래, 이렇게 마주 보는 건 거의 10년 만인 것 같구나.”
마하는 심드렁한 기색으로 네르하를 내려다보았다.
속이야 어쨌든 선해 보이는 인상의 시엘과는 다르게, 마하는 날카로운 눈매가 도드라진 미인이었다.
아무래도 가주인 카이젤을 더 닮은 듯했다.
“북방에서의 일은 귀에 딱지가 나도록 들었지. 정말 큰 공을 세웠더구나.”
“과찬이십니다.”
“뺄 것 없다. 내가 북방에 가도 너 정도의 공적을 세우는 건 불가능하니까.”
“겸양이 과하시군요.”
“흥.”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네르하는 마하를 관찰하며 속으로 제법 놀라고 있었다.
‘장로급과 비교해도 절대 꿇리지 않는다.’
느껴지는 의념의 수준을 보면, 7레벨 후반대는 분명해 보인다.
고작 30대의 나이에 50~60대의 장로들과 맞먹는 성취를 이룬 점에서, 마하가 얼마나 괴물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런 천재도 장남보다는 급이 딸린다라.’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는 얼마나 괴물일까.
문득 그를 만나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 생각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일단은 갑자기 찾아온 마하의 의도를 파악해야 했다.
“누님께선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
“앞으로 가장 큰 경쟁자가 될 녀석을 살펴보러 왔다.”
설마 직구로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네르하의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솔직히 말하면, 바스텔의 칩거가 길어지는 상황에서 하루빨리 후계자 경쟁을 마무리하고 싶었지.”
“그렇습니까?”
“그런데 네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튀어나온 거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당연히 네르하의 이런 급부상을 예언할 수 있었던 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장녀로서 동생의 질문엔 어지간해선 답해 줄 수 있지.”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말에 네르하는 지체 없이 입을 열었다.
“누님은 어째서 북방에 가지 않으셨습니까?”
“난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
“다른 놈들이 어떤 공적을 세우고 돌아와도, 날 넘을 수 없었을 테니까. 차라리 그 시간 동안 다른 걸 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지.”
엄청나게 오만한 발언.
하지만 실상을 까 보면 나름 이치에 맞는 말이기도 했다.
“후후.”
불현듯 마하가 실소를 내지었다.
“물론,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면, 나도 북방에 갔을 테지만 말이야.”
“…….”
“설마하니 직계 중에서 마왕 단독 토벌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나는 물론 가문의 모두가, 마왕은 류레이아가 잡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마하의 예상은 지극히 정석적이었고, 또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예측이기도 했다.
“저들끼리 공을 다투다가 아르바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끝날 줄 알았지. 한번 몰락한 아르바가 부활해 봤자 나한텐 안 될 테고. 다만, 녀석이 그런 식으로 몰락할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말이야.”
마하의 웃음엔 일말의 씁쓸함이 감돌아 있었다.
아무리 나눌 수 없는 권력을 가지고 다투는 사이라 해도, 뭐가 됐든 한 배에서 나온 남매 사이가 아니던가?
“어쨌든 대답은 끝이다. 더 묻고 싶은 게 있나?”
“흐음…….”
네르하는 대답 대신 약간 뜸을 들이며 마하와 눈을 마주했다.
이렇게 온갖 유력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경쟁자 선언을 한다는 건, 그만큼 대놓고 자신을 견제하겠다는 뜻.
라데우스의 율법상 형제자매간의 직접적인 살육은 금지되어 있으니.
“누님께선.”
네르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주변인을 암살할 생각이십니까?”
“……!”
무례하고, 또 도의에 어긋나는 질문.
물론 권력다툼에서 팔다리를 자르는 시도 정도야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질문은 주변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꽤나, 당돌하구나.”
“대답해 주십시오.”
“대답하면 어떻게 하려고?”
“대답에 따라 앞으로 누님에 대한 대응 수위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죽일 것인가, 탈락시키는 것 정도로 그칠 것인가.
담담한 네르하의 눈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 하하하! 정말 재밌구나, 너.”
마하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진심으로 날 죽이고자 하는 각오가 보이는군. 너, 정말 내가 알던 네르하가 맞나?”
“…….”
“어머니가 널 대비해야 한다고 찾아오신 이유를, 어느 정도는 알겠구나.”
시엘이 설마 그 만남 이후로 마하를 찾아갔던 건가?
“뭐, 답을 해 주자면,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내가 아르바도 아니고, 그리 치졸하게 굴 정도로 몰리지도 않았으니까.”
그 말은, 만약 몰린다면 치졸하게 군다는 소리인가?
“다만, 경쟁자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 말씀은?”
“사소하게 네 앞길을 방해하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앞길이라.
마하의 입에서 나오는 ‘사소함’이 어느 정도의 사소함인지는 까 봐야 안다.
마하가 말했다.
“내가 알기로, 이번 헤르메스에 네가 이론을 써서 지원했다고 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게 맞을까?”
“맞습니다. 얼마 후면 제가 제출한 이론을 직접 강연해야 하죠.”
그 말을 들은 마하의 표정에 장난기가 어렸다.
“만약 그 이론이 수상에 실패한다면, 네 체면은 어떻게 될까.”
“심사위원을 매수라도 하시게요?”
“설마.”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 마하였지만, 연이은 네르하의 단어 선택이 상당히 강했기에 눈에 약간의 분노가 차올랐다.
“이번 경연에 내 후원을 받은 젊은 마법사들이 대거 참가하지. 그리고 그 수준은 과거 헤르메스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단다.”
‘호오? 그 말은 즉?’
“네가 그들을 뚫고, 수상할 수 있을까?”
마하가 저렇게 자신하는 수준이라면, 실제 실력은 몰라도 적어도 이론 면에선 7레벨에 근접한 자들이 아니면 성립되지 않는다.
네르하는 마하를 향해 씩 웃어 주었다.
“재밌군요.”
“…….”
“그럼 어디, 내기 한번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기라고?”
네르하가 이렇게까지 자신만만하게 나오자, 마하의 머릿속이 살짝 복잡해졌다.
“뭐, 이런 사소한 걸로 후계 경쟁에까지 영향을 미치기엔 서로 좀 그러니.”
“흐응?”
“가볍게 물질적인 대가를 주고받는 건 어떨까요?”
“물질적인 대가라.”
그 말을 곱씹은 마하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생겨났다.
“그렇다면, 내가 이겼을 경우 네가 보물전에서 받기로 한 3가지 중 하나의 소유권을 양도받지.”
“……양심이 없군요.”
네르하의 표정이 대번에 떫어졌다.
마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나 네가 이겼을 경우엔.”
“경우엔?”
“내가 소유하고 있는 그란시스 마탑의 소유권을 통째로 네게 넘겨주지.”
“……하.”
네르하는 조금은 허탈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란시스 마탑.
총 회원 수 7만에 달하는, 대륙에서도 최상위권에 위치한 초일류 마탑.
그런 마탑이 다른 누구도 아닌 마하의 휘하에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 순간, 네르하는 마하의 절대적인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대대로 마법계의 빅 이벤트로 내려오고 있는 이 ‘헤르메스’.
그 헤르메스의 주최지가, 다름 아닌 이 그란시스 마탑이었기 때문이다.
“콜.”
그럼에도.
네르하는 콜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