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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76화 (176/237)

176화

<마법 도시 루리엔 (1)>

그렇게 네르하 일행이 출발하고 며칠 뒤.

북방 최극단으로 향하는 입구에 해당하는 도시, 아르지엔은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분주했다.

“이제야 겨우 거주지 인원 분배가 끝났다.”

푸른 단발이 인상적인 근육질의 전사가 누군가에게 다가왔다.

그와 같은 푸른 머리의 여인이 이름이 빼곡하게 적힌 목록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나마 생각보다는 일찍 끝난 편이죠. 시장이 협조적이어서 다행이었어요.”

“그럼 이제 곧 라데우스 본가에서 감시인이 오겠군.”

여인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전사, 바실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클로이아. 앞으로 우리는 라데우스의 감시하에 살아가겠지.”

바실리의 말에 클로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어쩌면, 정말 긴 세월을 그들의 압제 아래 탄압받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도, 너는 정말로 확신하는가? 어쩌면, 오늘이 일족 멸망의 갈림길일지도 모른다.”

“숙부님. 아니, 전사장님.”

클로이아는 그제야 목록에서 눈을 떼 바실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던져진 주사위입니다.”

“…….”

“그리고 저는, 그 던진 주사위에서 6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군…….”

“정말 일이 잘 풀리게 되면, 수십 년도 필요 없어요. 앞으로 5년 안에, 모든 결판이 날 겁니다.”

처음 만났을 땐 감히 후보에도 끼지 못할 것처럼 보였던 그 비실비실한 녀석이, 지금은 계승 서열 1위나 다름없는 마하와 눈을 맞대고 있다.

“그러니, 그 시간 동안만 어떻게든 버텨 주세요.”

“미안하다. 확실히,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는데도 나답지 않게 꼴사납게 이러고 있군.”

“반대로 말하면, 숙부님께서도 그럴 정도이니 다른 일족들의 불안감은 더 거대하겠죠.”

바실리는 이제 어엿한 지도자로 성장한 자신의 조카를 향해 감개무량한 눈빛을 보였다.

“일족의 통제는 내게 맡겨라. 괜히 라데우스 놈들에게 흠을 잡힐 일은 없게 하겠다.”

클로이아는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숙부님이라면 믿을 수 있죠. 한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음.”

강하게 고개를 끄덕인 바실리가, 어째서인지 묘하게 눈치를 보는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클로이아야.”

“네, 숙부님.”

품에서 물통을 꺼내 들이켜던 클로이아가 대답했다.

“하나 물어볼 게 있다만.”

“꿀꺽! 말씀하시죠.”

“조금 민감한 주제라서 말이다.”

“우리 사이에 민감할 게 뭐가 있겠어요? 부담 없이 물어보세요.”

“음, 그렇다면야.”

마음을 정한 바실리가 물통을 들이켜던 클로이아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 녀석과 결혼은 언제 할 거냐?”

푸악!

“컥! 켁켁! 쿨럭쿨럭! 캭!”

“괘, 괜찮으냐?”

“자, 자, 잠깐!”

엎드린 채로 한동안 막힌 기도를 두들기던 클로이아는,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바실리를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소릴 하시는 겁니까?!”

“무슨 뜻이냐니? 일족의 미래를 맡기는 일인데 혼인 정도의 구속력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바실리는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선대 족장님께선 진지하게 혼인 동맹을 추진하신 거로 알고 있다만?”

“아, 아니. 그건!”

솔직히 말하면, 거의 반쯤 장난으로 권했을 뿐이었다.

다만 그 이후엔 정말 진지하게 클로이아를 몰아붙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네 혼사는 지금 일족의 상황에선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 알고 있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마. 그에게 마음이 없는 거냐?”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리지만, 하는 행동을 보면 오히려 연상과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 녀석.

그리고 자신과 일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내던졌던 녀석.

“어, 없는 건, 아닌데요.”

“그러냐?”

바실리는 그런 클로이아의 반응에 흐뭇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음이 있다면 이런 곳에 있지 말고 그의 곁에 있거라. 슬슬 주변을 경계해야 할 때이지 않느냐?”

“주변, 이라면?”

“당연히 결혼 적령기에 이른 다른 여인들이지. 나이, 실력, 외모, 장래…… 어느 면에서 떨어지는 게 없는 일등 신랑감이지 않느냐?”

“아, 그건…….”

클로이아는 말끝을 흐렸다. 원래 그 부분은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건 네르하나 주변에 무관심하다기보다는.

“물론 그 녀석이 과거에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는 나도 얼추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허물이야, 이젠 아무런 상관도 없지 않느냐?”

“……!”

라데우스의 낙오자.

분명 네르하에게 붙은 별명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북방 원정 이후, ’낙오자‘라는 이명은 ‘영웅’이라는 단어로 세탁되어 화려하게 비상했다.

“그만한 자라면, 온갖 주변에서 달라붙어도 이상할 게 없지. 정말로 괜찮겠나?”

확실히, 생각해 보면 그랬다.

1년 전의 네르하와 지금의 네르하의 위상은 천지 차이.

수많은 매파가 붙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클로이아에겐 아직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직은 괜찮을 거예요. 지금 리브라에 재직하고 있는 녀석들 중에선 그다지 매력적인 녀석들은 없고…… 아.”

그 순간.

딱 한 명.

클로이아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가 있었다.

‘루시아!!’

리브라에 재직하는 수십의 여성 생도 중에서, 단연 발군으로 빛나는 자.

지금까지 별다른 감정은 없었지만, 그쪽으로 생각이 향하는 순간 클로이아의 뇌리에서 루시아에 대한 위험도가 급격하게 치솟기 시작했다.

‘괘, 괜찮겠지?’

다만 아직 서로 간에 연애 감정은 없는 것 같다. 개인의 사정이 꽤나 깊은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갑자기 함께 여행이라도 떠나는 게 아닌 이상, 아직까지는 큰 걱정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클로이아가, 이후 리브라에 귀환해 상황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대륙 동부.

마법 도시 루리엔.

성벽 바깥에서 봐도 뾰족한 첨탑이 수없이 보이는 인상적인 도시.

지루한 여행 끝에, 네르하 일행은 루리엔에 도착했다.

“끄아아아아! 드디어 도착했구나아아아아!”

열흘 동안 마차 안에서 흐느적거리던 레이첼이 기지개를 켜며 소리를 내질렀다.

“너희들도 고생했다! 드디어 고생 끝, 행복 시작이야!”

“…….”

“루리엔이라면 과거 용병 시절에 자주 들르던 곳이지. 베리타스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발전된 도시라서 지내기엔 편할 거다.”

뒤이어 마차에서 내린 네르하가 레이첼을 향해 혀를 찼다.

“교수님, 저흰 놀러 온 게 아닙니다만.”

지나치게 좋아하는 레이첼에게 핀잔을 줘 봐도, 그녀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어차피 너네들이 인솔이 필요한 녀석들은 아니잖아? 사소한 건 따지지 말자고.”

“교수님은 놀러 오셨군요.”

레이첼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네르하와 루시아를 번갈아 보았다.

“훗, 솔직히 말해. 너희들도 놀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잖아? 지난 며칠 동안 대놓고 눈에 들어왔는데 말이지.”

움찔!

정곡이 찔린 네르하를 향해, 레이첼이 어깨를 팡팡 두들겼다.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자고. 루리엔은 대륙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마법 도시야. 그런 만큼 마법을 응용한 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지. 특히나…….”

레이첼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붉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다만 그 표정이 워낙 꼴불견이라 색기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냉장 마법으로 살얼음이 낀 루리엔의 맥주는, 이 인근에선 유명한 특산품이지. 맛이 진짜 기가 막히다고.”

……꿀꺽!

그 순간, 네르하와 루시아의 목울대가 살짝 꿀렁거렸다.

시원한 술!

교육기관인 리브라에선 절대 금지 품목 중 하나인 만큼, 평소엔 입술을 축이긴커녕 구경조차도 힘든 녀석이었다.

“마법이 발달한 만큼, 유통 구조가 잘 되어 있어서 음식 문화도 발달해 있지. 솔직히 리브라의 식사가 아무리 맛있어도 사재 음식에 비할 바는 아니잖아?”

레이첼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구성원 대부분이 귀족인지라, 리브라의 식사는 분명 평균 이상은 맞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랬던가? 짬밥은 아무리 맛있어도 짬밥이라고.

다량으로 나오는 뷔페식이 아무리 질이 좋아 봐야 그 한계는 명확한 법이었다.

“그, 그럼.”

“처, 첫날인데 조금 긴장감을 풀어도, 나쁘진 않겠죠?”

씨익!

그런 그들을 향해, 레이첼은 알게 모르게 음흉하게 웃었다.

“자자, 내가 이곳 식당은 아주 잘 알지. 그러니 오늘은 루시아의 말대로 긴장 풀고 즐겨 보자고!”

한때 용병으로 지냈을 만큼 자유로운 영혼인 레이첼 루비아이.

그런 그녀에게 고산지대에 위치한 리브라의 환경은 꽤나 스트레스였다.

물론 교수 생활 다년 차인 그녀가 갑자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빌어먹을 북방!’

고위 마법사라는 점을 이용해 틈날 때마다 베리타스에 왔다 갔다 했었지만.

하필이면, 라데우스의 북방 원정 문제가 겹치면서 리브라가 완전히 폐쇄되어 버린 것이다.

‘전쟁 전만 해도 꽤 널널했는데 말이지.’

그런고로 현재의 레이첼은 꽤나 굶주려(?) 있었다.

“자, 자! 빨리 들어가자고!”

레이첼이 적극적으로 이끌자 두 사람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따라갔다.

* * *

“네르하 도련님이 루리엔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바깥을 돌며 세력을 단속하고 있던 마하는 수하가 가져온 보고를 듣곤 고개를 돌렸다.

“네르하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해. 특히 마탑의 누구와 만나는지는 반드시 체크하고.”

“명심하겠습니다.”

마하의 명을 받은 수하들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주변이 다시 고요해지자 마하는 창밖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마하의 머릿속을 차지한 건, 네르하도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바스텔.’

이 후계 경쟁에서 자신의 유일한 경쟁자라 불릴 만한 자.

사실상 외부와의 소통을 완전히 단절한 바스텔이었지만, 마하는 아주 가끔씩이나마 그와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바스텔이 만나 주는 것에 가까웠지만.

‘못 본 사이에 더욱더 괴물이 되었어.’

7레벨 후반부에 이르러 후계 중 제일이 되었다고 자부한 마하였지만, 그 생각은 바스텔을 보는 순간 뇌리에서 완전히 날아가고 말았다.

‘녀석은 가주 자리엔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몰라. 최대한 빨리 네르하를 밀어내고 후계 자리를 확정시킨다.’

마하를 아는 이가 지금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면 상당히 놀랐을 것이다.

지금 마하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초조해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또 다른 수하가 마하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이번에 나타난 상대는 마하의 오른팔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거물이었다.

“주군.”

“뭐지?”

“그란시스 마탑에 대한 처우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그란시스 마탑…….”

어째서인지 마하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수하는 마하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장로들을 모조리 물갈이할까요?”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놈들의 박쥐 같은 행위가 괘씸하긴 하지만, 여전히 내게 유리한 건 변함이 없으니.”

일견 관대해 보이는 처분이었지만.

한순간, 마하의 입가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지금은, 말이지.”

“……알겠습니다.”

저 말은 즉, 작업을 쳐도 이번 헤르메스가 끝난 다음에 치라는 뜻.

마하는 자신을 배신한 이들에겐 절대로 자비롭지 않았다.

“그보단, 이번에 초빙된 심사위원들의 목록을 빠르게 파악해서 만남을 주선해.”

“그것이, 이미 시도를 해 보았습니다만.”

“……?”

어째서인지 말끝을 흐리는 수하의 모습에, 마하가 고개를 돌려 수하를 노려보았다.

“해 보았는데? 그래서 뭐?”

“주군의 이름을 달아 초청했음에도, 그들 전원……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뭐라고?”

마하의 눈에 분노가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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