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마법 도시 루리엔 (2)>
“거부했다고?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그, 그렇습니다.”
“네르하 쪽에서 먼저 손을 썼을 가능성은?”
“네르하 공자에게 붙은 장로들은 전부 휘하 세력 재건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그들 전부를 회유할 여력이 있다는 건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판단됩니다.”
“흐음.”
“무, 무엇보다.”
“말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루리엔시에 한해 이상하리만큼 주변의 정보가 통제되어 가고 있고, 저희의 영향력이 눈에 띄게 먹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부분은?”
“큰 문제는 없습니다.”
마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루리엔시에 한해 정보가 통제되고 있다면 기본적인 답은 간단했다.
그 주변 세력이 통째로 네르하에게 넘어갔다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마하를 이렇게까지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이는 정말로 몇 없었다.
대장로 수넨, 자신의 친모 시엘, 조금 무리를 한다는 가정하에 2부인 유리아 정도.
그리고 굳이 한 명 더 추가하자면.
‘……잠깐, 설마?’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가정이 떠오르자, 마하의 냉정한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지금 마하는 어마어마한 외통수를 맞게 되는 셈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걸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설마, 아닐 거야.’
마하는 거의 십여 년 만에 필사적으로 자기합리화를 시도했다.
* * *
“아, 배부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기를 내려놓은 루시아가 행복하게 헤실거렸다.
“그러게.”
네르하 역시 만족스럽단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참 전에 식사를 마친 레이첼이 무슨 괴물 보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니들 배엔 무슨 거지가 들어가 있냐?”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당장 네르하와 루시아의 눈앞엔 최소 접시가 10여 개 이상씩 쌓여 있었으니까.
그것도 종업원들이 분주하게 치웠는데도 쌓인 양이었다.
그제야 나름 정신이 돌아온 루시아가 뺨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돌렸다.
“공짜 밥을 사양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너흰 좀 사양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겠다.”
한숨을 내쉰 레이첼이 계산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배인, 계산 부탁해.”
“오랜만에 방문해 주셨군요, 레이첼 님. 직불 카드, 확실하게 받았습니다.”
지배인은 레이첼이 내민 황금 카드를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이곳 마법 도시 루리엔은 대륙에서도 몇 안 되는 카드가 현물 대신 통용되는 곳.
카드를 쓸 수 있다는 건 이 도시에서 어느 정도 ‘신용’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저, 레이첼 님?”
“응? 왜?”
“잔액이, 부족하다고 나옵니다만.”
“…….”
“…….”
한순간, 지배인과 레이첼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얼굴색이 창백하게 변한 레이첼이,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아무리 여기가 리스토란테라고 해도, 식사값이 모자랄 일은 없을 텐데?”
“그걸 저에게 말씀하셔도…….”
곤란하다는 듯 말하는 지배인의 눈빛은, 시시각각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아…… 아아!’
그리고 그 순간, 레이첼은 왜 승인 거절이 떠 버렸는지를 알아차리곤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마, 마법 기재들! 그것들을 지르느라 돈이 부족했구나!’
리브라를 나서기 며칠 전. 유통망이 어느 정도 풀려 마법 기재들이 시장에 나오자 레이첼은 플렉스를 외치며 희희낙락하게 카드를 긁어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
‘어, 어쩌지?’
레이첼이 어쩔 바를 모르고 어버버거리고, 지배인의 표정이 시시각각 썩어들어 갈 무렵.
“이 카드로도 됩니까?”
보다 못한 네르하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이 카드는 어머니 로젤리아가 건네준 것으로, 이 카드가 통하는 곳에선 어지간해선 곤란한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한 물건이기도 했다.
“헉! 그, 그것은!”
네르하의 카드는 레이첼의 카드와 대비되는 백금색의 카드였다.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본 지배인이 갑자기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소리쳤다.
“라데우스의 고귀한 혈족을 뵈어 영광입니다!”
“아.”
네르하의 표정이 구겨졌다.
* * *
라데우스의 혈족을 뵈어 가문의 영광이니, 기념일로 지정하겠다느니 하는 지배인을 진정시키는 데 한 세월이 걸리고.
결국 밥값은 네르하가 계산하게 되었다.
“이야, 고맙다. 거기서 정말 개쪽당할 뻔했네!”
레이첼은 머쓱한 표정으로 네르하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네르하는 한숨을 쉬며 레이첼에게 물었다.
“아니, 교수 수입이 적지는 않을 텐데, 그렇게 돈이 없습니까?”
그 물음에, 레이첼은 웃음기를 지우며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디로 가든 교사의 수입은 쥐꼬리란다, 도련님.”
“…….”
“뭐, 유명 마탑이나 마법 대학에서 일타강사가 된다면 또 모르지. 그게 아니라면 그 근방에서 사설 과외라도 하든가. 솔직히 아무리 리브라의 교수라도 수입에는 한계가 있어.”
워낙 진지한 표정으로 저렇게 말하니 딱히 대답할 거리가 없다.
“그러니까 네가 날 좀 잘 챙겨 달라고. 가신을 챙기는 건 주군의 의무이잖냐?”
빈곤함이 묻어나는 구구절절한 타령에 네르하는 물론 루시아의 입마저 다물어졌다.
“후우, 세이라에게 말해서 연구비 명목으로 지원 좀 하라고 하겠습니다.”
“아싸!”
레이첼은 두 팔을 벌리며 크게 기뻐했다.
그 모습이 워낙 안쓰러워서 네르하와 루시아는 딱히 뭐라고 하지도 못했다.
* * *
루리엔에 들어온 첫날이니만큼, 네르하와 루시아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도시의 정경을 즐기는 데 온 신경을 썼다.
“정신 상태는 좀 어때?”
뉘앙스에 따라 상당히 무례한 질문이었지만, 루시아는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나쁘진 않아요. 애초에 이렇게 생각 없이 쉬어 본 적은 오랜만이라서…….”
“그래, 휴식은 중요한 거야. 적어도, 이번 여행에서 넌 철저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만을 생각해. 헤르메스는 어디까지나 기분 전환으로 생각하고.”
“후후, 알겠어요.”
루시아는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한동안 산책이 이어졌다.
‘정말, 처음이네.’
마법 도시의 화려한 정경을 구경하며, 루시아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쉬어 본 적이 있던가?’
네르하에겐 오랜만이라고 대답했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니 이런 휴식은 아예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그녀의 눈가가 아련해졌다.
‘가문에선 아무래도 편히 쉰다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형제자매라고 있는 것들은 어릴 적부터 죄다 권력에 미쳐 있었다.
그들은 악의와 분노로 루시아를 대했고, 루시아 역시 그런 악의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쉬지 않고 움직여야만 했다.
그나마 예외라고 부를 수 있던 게, 막내뻘이던 아네시스와 아렌, 두 사람뿐이었는데.
그것도 아렌이 갑자기 부상해 당시의 ‘대공자’를 죽이면서 그녀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치닫게 되었다.
‘아직도 그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있구나.’
대공자의 심장을 꿰뚫고, 망연자실해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던 아렌의 악귀 같은 웃음.
그 눈빛은, 루시아에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새겨졌다.
그때였다.
“루시아.”
“아, 네!”
가문에 대한 생각에 깊이 잠겨 있던 루시아의 의식이, 네르하의 한 마디에 다시 깨어났다.
네르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느끼지 못하고 있나?”
“무슨 말을…… 아!”
한 곳에 정신이 팔려 있던 루시아는 약간의 딜레이 후에 네르하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츠츠츠츠!
팔뚝에 돋아난 닭살을 느끼며 루시아가 이를 악물었다.
‘살기!’
그것도 불규칙하게 주변을 뒤흔드는 살기가 아니라, 자신들만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매우 수준 높은 살기다.
“좁은 골목길로 유도한다. 따라와.”
“네.”
네르하가 그 즉시 자리를 박차며 달려 나갔다.
루시아 역시 보조를 맞추며 네르하의 뒤를 따랐고, 두 사람은 번화가에서 벗어나 슬럼가의 경계까지 쉬지 않고 내달렸다.
“이쯤이면 될 거 같군.”
인기척이 드문 장소까지 도달한 네르하가 품속에서 흑백의 장갑 두 개를 꺼내 착용하기 시작했다.
“나와라. 레스토랑에서부터 우리를 지켜본 놈 같은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흠, 내 시선을 알아챘는가? 생각보다 감각이 날카롭군.”
“어?”
누군가의 대답을 듣는 순간, 루시아의 동공이 지진처럼 흔들렸다.
과거 수없이 들어봐서 익숙하지만, 지금 이곳에선 절대로 들려올 리가 없는 목소리.
부정하고 싶어도, 이 목소리의 주인은 헷갈릴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루시아, 알고 있는 자인가?”
“당장 모습을 드러내십시오!”
평정심이 깨진 루시아가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라실론!”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된다, 루시엘라.”
저벅!
그 말과 동시에, 골목 구석에서 총사(銃士)들이 입을 법한 널찍한 모자를 눌러쓴 중년인이 튀어나왔다.
그 중년인의 기도를 보는 순간, 네르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엄청난 강자다.’
허리춤에 느슨하게 매인 얇은 장검.
이 시대의 기사들이 흔히 착용하는 금속제 갑옷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겉으로 보면 그냥 낭인 같은 만만함을 느낄 수 있지만, 네르하는 알 수 있었다.
‘엄청나게 정제된 의념이다.’
이전 리브라에서 겨루었던, 검왕 베하나스라는 자보다도 훨씬 윗줄인 실력자.
상대의 정체가 누구인지 궁금하던 찰나, 루시아가 검 손잡이를 움켜쥔 채 상대에게 외쳤다.
“라실론,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죠? 그것도 홀로!”
“아는 사이냐?”
그녀가 네르하의 대답에 미처 응답하기도 전에, 상대에게서 반응이 날아왔다.
“스승을 너무 막 부르는군. 루시엘라.”
오, 스승?
상대의 정체가 생각보다도 훨씬 거물일 가능성이 커졌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경계치를 최대로 올린 루시아가 네르하를 향해 속삭였다.
“저자의 이름은 라실론. 케프렌 기사단의 검술 총사범인 자입니다.”
“진짜냐?”
정말 의외인 상대의 정체에, 네르하는 눈을 깜빡였다.
교육기관인 검의 낙원도 아닌, ‘기사단’의 검술 총사범.
그 위상은, 적어도 라데우스로 따져도 장로의 직위를 넘어서는 것이 분명할 터다.
라실론이라 불린 중년의 검사가 빙긋 웃었다.
“적에게 아군의 정보를 알려 줘도 되는 거냐?”
“어차피, 라데우스의 직계에게 이 정도는 정보 측에도 들지 않아요.”
스릉!
기어코 검을 빼든 루시아가 그에게 칼끝을 겨누며 물었다.
“다시 묻죠, 라실론. 당신이 왜 이곳에 있는 거죠?”
“지금의 네겐 대답해 줄 수 없다.”
“뭐라고요?”
“내가 볼일이 있는 건 네 옆에 있는 녀석이야.”
“……!”
자신의 존재를 알면서도 볼일이 없다고 개무시하는 모습.
그런 상대의 태도에 루시아의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
네르하가 막 폭발하려는 루시아를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래, 케프렌의 높으신 분께서 내게 무슨 볼일이지?”
“……어린놈이 말이 짧구나.”
뭐, 겉으로 봐도 나이 차이는 최소 30년 이상 날 테니, 저런 반응은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마왕을 잡은 강자라면 그런 태도를 보일 만하지.”
스릉!
가볍게 웃은 라실론이 허리춤에서 장검을 빼내 자세를 잡았다.
“내가 널 찾은 이유는 하나다. 마왕을 잡은 자의 실력이 어떤지, 한번 구경하고 싶구나.”
그 말과 함께, 날카로운 검사의 ‘영역’이 네르하의 감각을 찌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