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라실론>
‘저자도 여간 미친 게 아니군.’
라데우스의 영역에서 라데우스의 직계에게 케프렌의 기사가 칼을 들이민 상황.
상대의 지위를 고려하면,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럴 만한 실력이 있어.’
저자의 실력이라면, 바멜 같은 수준이라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암살할 수 있다.
네르하는 라실론의 영역을 느끼며 생각했다.
‘영역의 전개가 부드럽군.’
검사의 영역은 마법사의 영역과는 다르다.
일단 범위부터가 한참이나 좁아터졌다.
거기에 영역 안에서는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투사하는 마법사와는 다르게, 검사에겐 오러를 무한으로 다룬다거나 하는 공능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검사의 영역은 자유롭다.
한 번 펼치면 긴 쿨타임을 거치는 마법사의 영역과는 다르게, 24시간, 한 달, 일 년 내내 집중력이 허락하는 한 자유자재로 영역을 펼치고 거둘 수 있다.
“읏!”
라실론의 영역에 닿은 루시아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단순히 화력이 달릴 뿐, 기사의 영역은 마법사와 비슷하게 자신의 영역 내부에선 마나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진다.
같은 영역으로 상쇄하지 못한다면, 설사 오러를 다룬다고 해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아직 영역의 기초를 잡은 수준인 루시아로선, 벌써부터 제어를 벗어나는 마나의 움직임에 당황했을 것이다.
‘확실히 저자는 마법사로 따지면 삼마자와 동격이로군.’
격하의 존재에겐 절대적인 우위를 점유하는 경지.
저게 바로 귀왕제성신(鬼王帝聖神)으로 이루어진 지고한 다섯 단계 중, ‘검제(劍帝)’에 이른 검사의 위력이었다.
‘전생의 나와 만났어도 좋은 호적수가 되었겠어.’
충분히 신(新) 십대고수의 한 자리 정도는 따낼 수 있는 자였다.
“흥미롭군. 아직도 자세를 유지하고 있나? 그것도 두 사람 모두?”
라실론의 예상대로라면, 두 사람은 이미 자세가 무너져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다.
네르하가 비릿한 미소로 말했다.
“우릴 너무 무시하는군.”
“호오? ‘우리’라?”
“확실히 ‘영역’의 압박은 대단하긴 하지만, 그걸 버틸 수 있는 자에겐 오히려 교전비가 떨어지는 기술이지.”
“호오오?!”
“나 같으면 차라리 영역을 종이 한 장으로 둘러 전신의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쪽을 택하겠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거짓말같이 영역의 압력이 사라졌다.
놀랍다는 표정으로 라실론이 말했다.
“너, 기사의 영역에 대해 아주 잘 아는구나.”
“댁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르지.”
“크하핫! 입은 참 얄밉게 잘 놀리는군.”
한차례 너털웃음을 터트린 라실론이 표정을 싹 바꾸었다.
“마법사 나부랭이 따위가 기사의 영역에 대해 박식하다는 점은 높게 쳐주지.”
“고마워해야 하나?”
“하지만, 넌 네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거다. 내가 영역을 좁혀야 할 만큼, 그럴 실력이 있는지를.”
영역을 넓게 펼치기만 해도 오러를 발현하는 어지간한 귀급 기사들은 대번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도 영역을 좁혀야 한다는 건, 상대가 자신과 거의 동급의 실력자일 경우에나 일어나는 일.
“네가 내 검을 받아 내지 못한다면 시답잖은 도발로 내 명예에 먹칠을 한 것으로 간주하고, 너의 목을 베겠다.”
네르하는 일부러 도발을 해 보았다.
“전쟁을 원하나?”
“원한다면 얼마든지. 기사의 명예는 무엇보다 무겁지. 그걸 짓밟은 게 마법사 나부랭이라면, 더더욱 명예를 세워야만 하는 법.”
확실히, 저자는 자신의 경지에 긍지를 가진 외골수에 천상 무인이었다.
“그 도전을 받아 줄 생각도 없진 않다만.”
“허?”
“그 전에, 나와 싸우고 싶다면 일단은 내 부하부터 넘어서고 와라.”
“부하?”
라실론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 순간, 네르하의 옆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누, 누가 부하입니까?!”
네르하는 고막이 터질 것만 같은 루시아의 외침에 귀를 막았다.
그리고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부하 맞잖아? 너도 인정했으면서?”
“아, 아무리 그래도 지, 지금 누구 앞에서! 여기서 내 인생을 조지려고 하십니까?!”
오오.
네르하는 감탄했다.
지금껏 나름 욕설과는 담을 쌓았었던 루시아가 제법 강도 높은 욕설을 내뱉은 것이었다.
라실론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위대한 케프렌의 공녀가, 라데우스 혈족의 부하?”
“아, 아닙니다! 부하라기보단, 이 사람은 내 스승에 가깝습니다!”
“스, 스승이라고?!”
루시아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다만 문제는, 그 부정과 함께 내뱉은 말이 자폭인 것 같아서 그렇지.
까드드득!
“부하를 넘어, 감히 마법사를 스승으로 삼아?”
라실론에게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분노와 살기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루시아는 담담했다.
“그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티엔에게 안 좋은 물이 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타락할 줄이야…….”
번쩍!
“그 죗값, 목숨으로 받아 가마.”
검광이 번뜩이는 소리 다음에,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야말로 범인은 인지조차 못 할 초고속의 쾌검.
1년 전의 네르하였다면, 저 일격에 목이 날아갔을 게 분명한 어마어마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공격에도, 네르하는 나서지 않았다.
‘막을 수 있겠지?’
그런 눈짓에 대답하듯, 루시아의 검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물론이죠.’
루시아의 검에 유성(流星)이 깃든 순간.
콰앙!
퍼억!
이윽고 들려온 소리는, 무언가가 잘려 나가는 소리가 아닌 금속이 마주치는 거친 폭발음.
그 폭발음과 함께, 루시아의 신형이 그대로 날아가 담벽에 처박혔다.
“캬악!”
벽이 무너지면서 그 잔해에 꼴사납게 묻혀 버린 루시아였지만.
그녀는 상대의 진심이 담긴 일격을 마주하고도, 목숨을 부지했다.
“이, 이럴 수가…….”
이 중에 가장 충격을 받은 건, 누구도 아닌 공격자인 라실론 본인.
“이걸, 막아?”
그는 진심으로 루시아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손을 썼다.
오러 블레이드처럼 화려한 불꽃이 피어 나오진 않았지만, 오히려 오러 따위보다 더욱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바로 오러가 아닌 ‘영역’을 두른 라실론의 필살기였다!
‘어, 언제 이 아이가 이렇게까지?’
솔직히 방금 전 일격은, 원탁의 기사 중에서도 절반 이상은 충분히 목을 자를 수 있다고 자신할 정도였다.
그런 일격을 막았다는 건, 루시아의 경지가 정말로 초인의 영역에 이르렀다는 것.
잔해에 파묻힌 루시아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으으윽! 역시, 예상은 했지만, 마족 따위의 일격보다도 훨씬 묵직하군요.”
“……칼에 두른 그건 뭐냐? 순수한 오러가 아니군.”
라실론은 대번에 자신의 일격을 막아 낸 루시아의 ‘유성검’이, 순수한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루시아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스승이 그렇게 무시했던, 티엔 외숙부님이 추구한 가능성입니다.”
“…….”
“나는 이 가능성을, 라데우스…… 아니, 옆에 있는 이 사람에게서 배웠습니다.”
루시아는 당당하게 라실론을 향해 물었다.
“그럼에도, 당신은 케프렌의 긍지가 시궁창에 처박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의외로, 라실론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정도의 비전을 배웠다면,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루시엘라…… 그리고 네르하 라데우스에 대한 무례는 철회하지.”
꾸벅!
라실론은 우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무려 케프렌에서 서열 5위 안으로 추정되는 거물이, 경쟁 가문의 후예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다!
네르하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여기서 계속한다고 말한다면, 네르하는 직접 상대를 손봐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흥이 깨졌다. 여기서 더 해봐야 나만 추해지겠군.”
검을 도로 수납한 라실론은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진 얼굴로 네르하의 앞에 섰다.
“여기서 더 해봤자, 일방적인 손해를 보는 건 나일 테니까.”
“후후, 잘 아시는군요.”
“솔직한 마음으론 당장이라도 네 녀석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싶군. 루시엘라에게 저런 고위 마법을 전수해 줄 수 있는 자라면, 분명 마왕을 잡았다는 건 거짓이 아닐 테지.”
어째서인지 케프렌에 전해진 네르하의 이미지는 젊은 천재 마법사인 것 같다.
라실론이 루시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 많이 늘었구나, 루시엘라.”
“…….”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한때 삼촌뻘로 가까이 지냈던 자가 진심으로 살수를 꺼냈다는 점에서,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라실론 역시 그걸 인지했는지 씁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다만 그 표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나는 ‘선발대’로서 이 도시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왔다.”
선발대.
루시아라면 몰라도, 네르하가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이거 감사하게도, 제 초대에 응해 주셨군요.”
“당연하지만 네놈이 날린 그 건방진 초대장 때문만은 아니다.”
라실론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이번 유흥에 그분을 실망시킨다면, 그에 따른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될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대번에 영업용 미소와 함께 존대로 변한 네르하였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번 수를 나눠 보고 싶군.”
그 말을 끝으로 라실론은 등을 돌려 사라졌다.
* * *
“선발대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그리고 대가를 치르다니요?”
당연한 말이지만, 라실론이란 강자의 등장은 루시아로서도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글쎄다.”
“이익! 당신, 지금 제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겁니까?! 치사하게!”
루시아는 볼을 부풀리며 네르하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네르하로서도 그냥 알려 줄 수는 없는 것이, 이번 ‘초대’는 아무리 루시아라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함이 요구되었다.
이 일을 아는 건 주모자인 네르하를 제외하면 오직 실행자인 세이라뿐일 정도였으니까.
“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다. 깜짝 서프라이즈 정도로 생각하라고.”
“아무리 그래도!”
“자, 자. 어서 숙소로 돌아가자고.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너도 헤르메스 준비는 해야 할 거 아니냐?”
마치 말 안 듣는 여동생을 타이르듯, 네르하가 루시아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무리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했다고 해도, 예선을 뚫으려면 기본적인 준비 정도는 해야지?”
“그렇긴, 한데.”
루시아는 말끝을 흐렸다.
이런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는 네르하의 태도가, 루시아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뭔 일을 꾸미고 있는 건가요?”
“재미있는 일이지. 나름 가문의 권력 싸움에 관련된 일이라 자세히는 말해 주지 못해.”
네르하가 권력 싸움이란 단어까지 들고나서야 루시아의 반항이 수그러들었다.
“좋아요, 일단은 넘어가죠.”
“넘어가 주는 대가로 한동안 밥값은 내가 내지.”
“……당연한 것을.”
말은 그렇게 해도, 루시아의 표정이 대번에 풀어진 게 보인다.
그녀 역시 이곳의 식사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 이후로 네르하와 루시아는 숙소에서 헤르메스를 준비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지나고, 헤르메스가 열리는 날.
콰앙!
“네르하, 이 개자식아아아아!”
수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마하 라데우스가 네르하의 숙소로 쳐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