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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79화 (179/237)

179화

<흔적 (1)>

라실론과의 충돌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직도 웃고 있냐?”

네르하는 여전히 싱글벙글하는 루시아를 떨떠름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땐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봤으면서?”

“그땐 그때니까요.”

루시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홱홱 내저었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때 만났던 ‘라실론’ 본인 때문이었다.

“그에게 인정받은 게 그렇게나 기분 좋냐?”

“당연하죠!”

당시 보였던 적대감은 대체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루시아는 눈을 빛내며 네르하에게 바싹 다가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케프렌 기사단의 총사범이라고요! 그에게 인정받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정녕 모르시겠어요?!”

“응, 정녕 모르겠다.”

매몰차게 대꾸했다지만, 사실 네르하라고 그 마음을 완전히 모르는 건 아니었다.

‘뭐, 당장 천마가 내게 중원제일권이라고 추켜세워 준다면 기분은 꽤 좋았을 것 같군.’

자신이 인정하는 강자가 자신을 인정한다.

사실 무인에게 그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긴 했다.

네르하는 헤르메스의 준비는 잘 되어 가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니, 차라리 잘된 건가? 애초에 목적은 기분 전환이었으니.’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런 식으로라도 그녀의 기분이 풀린다면 다행인…….

“네르하아아아아!”

콰앙!

숙소의 정문이 박살 나며, 앙칼지고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나와!”

소림의 사자후 뺨치는 우렁찬 목소리.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있는 네르하와는 다르게, 레이첼과 루시아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마, 마하 라데우스? 대체 왜 갑자기?”

네르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생각했다.

‘손님들이 벌써 도착한 모양이군.’

그리고 영민한 마하는 대번에 사태의 주범이 네르하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무작정 들이닥칠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마하가 이렇게까지 당황해서 달려올 정도면, 이유는 오직 하나.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내 초대에 응한 모양이군.’

하긴, 라실론이란 자가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예상을 벗어나긴 했다.

“나와! 이곳에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아래쪽에서 이어진 마하의 재촉에 네르하는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하 누님?”

“네르하! 너 이 새끼, 감히 선을 넘어?!”

마하의 전신에선 진정으로 네르하를 죽이겠다는 살기가 휘날렸다.

“선을 넘다뇨? 무슨 소리십니까?”

“모른 척한다고? 감히 라데우스 내부 사정에 외부 가문…… 그것도 케프렌을 끌어들인 게 너라는 걸 모를 줄 알아! 게, 게, 게다가! 그분까지!”

“케프렌을 끌어들였다라.”

네르하는 잔잔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이군요.”

“오해? 오해라고?!”

마하는 혈압이 끓어오르는지, 얼굴은 물론 머리카락마저 붉어질 기세였다.

“당연히 오해죠. 그들을 끌어들여서 제가 얻을 게 뭐가 있다고요?”

“…….”

“역사적으로 외세의 개입을 끌어오는 이유는 대체로 무력이나 금력의 부재로 인한 것이죠. 그런데 지금 누님과 저의 내기에서, 그리고 이 내용에서 케프렌이 끼어들어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게 뭐가 있죠?”

“그, 그건…….”

마하의 말문이 막혔다.

사실 ‘개입’ 그 자체가 네르하의 노림수였지만, 마하가 그걸 노골적으로 입에 담기엔 논리가 부족했다.

공정성을 위해 케프렌을 끌어들였다, 라는 발상은 사실 네르하가 봐도 상당히 미친 짓이었으니까.

“케프렌에서 찾아왔다면, 아마도 루시아 때문이겠죠.”

“뭐?”

“이번 헤르메스에, 루시아도 참가하거든요. 안 그래, 루시아?”

네르하의 은근한 시선을 받은 루시아가 애써 장단을 맞춰 준다는 느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요. 마하 공녀님. 예선에 필요한 마법 이론의 제출은 끝났고, 본선 경연을 대비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 중입니다.”

“……네가, 마법 이론을 헤르메스에 내놓았다고?”

“그렇다고, 말했습니다만.”

한순간 마하와 루시아 사이에 서늘한 냉기가 지나간 느낌이었다.

“재밌구나. 칼 한 자루로 내 플레어를 가르던 그 꼬맹이가 마법이라?”

“뭐, 불만 있습니까?”

루시아는 당돌하게 마하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불리한 건 마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는 신형을 홱 돌렸다.

“이번 일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

전형적인 패배자의 변명을 늘어놓은 마하는, 부하들을 이끌고 숙소를 나섰다.

결국 네르하를 압박하기 위해 찾아왔던 마하는, 루시아의 존재 하나만으로 모든 명분을 잃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흥!”

루시아는 그런 마하의 뒷모습을 꼴도 보기 싫은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과거에 뭔가 악연이 있었나 보군.’

사실 연배로 따지면 루시아와 마하는 얽힐 짬이 되지 않지만, 루시아의 특별한 지위를 고려하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흠, 아무래도, 지금 말해 줘야 하나?’

영문도 모른 채 네르하의 의도에 얽혀 마하와 씩씩거리던 그녀지만, 아무래도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진실을 말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야, 루시아.”

“왜요?”

아직 기분이 덜 풀렸는지, 대꾸하는 그녀의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미리 말해 주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말이야.”

“뭐죠?”

“아무래도 케프렌의 가주가 여기에 온 거 같다.”

우뚝!

그 말을 듣는 순간, 루시아의 신형이 정지했다.

“지금, 뭐라고요?”

케프렌 가주, 마기우스 엘 케프렌.

카이젤이 대륙 최강의 마법사라면, 이쪽은 대륙 최강의 검사로 이름을 떨치는 맹자였다.

“어째서, 그분이 왜 이곳에 와 있는 거죠?”

“그게, 사실 말이야.”

네르하는 장난질을 치다 걸린 소년처럼 뻘쭘한 표정으로 실토했다.

그리고 네르하의 그 ‘장난질’이 뭔지를 듣자, 루시아는 세상 미친놈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아연실색했다.

“이번 판을 더 크게 벌리기 위해, 케프렌 가문에 자기 이름을 걸고 초대장을 날렸다고요?”

“그렇지. 사실 초대장을 보냈다는 거 자체가 의미가 있었던 건데, 설마하니 응할 줄은 몰랐지.”

“그, 그렇다면, 얼마 전 라실론 경이 나타난 이유도…….”

“그자는 자기를 선발대라 칭했지. 그런 자가 선발대라면, 후발대에 누가 있는지 쉽게 추측이 가능해지잖아?”

“…….”

“어, 그리고, 우리 가주님도, 온 것 같고 말이야.”

“…….”

“헤헷!”

“…….”

전생 현생 나이 합쳐서 환갑이 훌쩍 넘은 자의 리액션이라곤 상상도 못 할 모습이었지만, 어쨌든.

루시아는 물론,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레이첼 역시 넋이 나간 듯 보였다.

이윽고, 정신이 가출한 루시아를 대신해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이봐요, 미친놈 씨.”

“말씀하시죠, 교수님.”

“뒷수습은 어떻게 하시려고 일을 이렇게까지 벌리셨수?”

네르하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 뒷수습을 왜 해야 하죠?”

“뭐, 뭐?!”

“초대장을 보낸 건 제가 시작했지만, 그걸 응하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의 의사. 서로 전쟁을 하자는 게 아니라면 그냥 조금 거물들이 모인 이벤트가 될 뿐이죠.”

물론, 케프렌의 가주가 고작 이벤트 하나 관람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경쟁자의 영역까지 왔을 리는 없다.

네르하가 생각하기로, 초대장은 어디까지나 계기일 뿐 무언가 다른 이유가 존재할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네르하의 변명을 감상한 레이첼이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입에서 불친절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야.”

“말씀하시죠.”

“솔직하게 말해라. 케프렌의 가주 말고 또 누구에게 초대장을 보냈냐?”

네르하는 여기까지 온 이상 솔직하게 실토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은 우리 아버지.”

케프렌의 가주를 끌어들이면, 균형추를 맞추기 위해서도 라데우스의 가주를 끌어들여야 한다.

역시나 초대에 응할 확률은 낮다고 봤는데, 마하가 이렇게 찾아와 발광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역배가 터진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그래, 그럴 줄 알았지. 또? 뜸 들이지 말고 다 말해.”

“음, 다음으론 대륙 평의회의 최고 의원이라는 골드 드래곤 로드 아그란바드, 서쪽 교국의 교황, 라펠테스 2세, 대륙 최고의 암살 가문이라는 ‘다크 플래시’의 수장 진, 제국 원로원주 르브론 대공, 그리고 몇 명 더 있긴 한데 앞서 말한 이들에 비하면 중요하진 않습니다.”

한 명 한 명이 상상을 초월하는 거물들이다.

허탈감에 빠진 레이첼이 입꼬리를 뒤틀며 이렇게 물었다.

“왜? 제국 황제한텐 안 보내고?”

“음, 안 올 것 같아서? 아무리 판을 키워도 굳이 황권까지 끌어들일 필요도 못 느꼈고.”

“망했네.”

레이첼은 이마를 짚었다.

사실 며칠 동안 방에 박혀 강연 연습에 열중하는 두 사람과는 다르게, 레이첼은 나름 바깥을 싸돌아다니며 도시에서의 휴가를 만끽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느꼈다.

어제부터 길거리에 성직자들의 모습이 부쩍 늘었다는 걸.

그들 대부분은 부제였지만, 사제도 심상치 않게 보였고 딱 두 번에 불과했지만 주교급까지 눈에 뜨이기도 했다.

지금 상황에서 이게 의미하는 건…….

‘정말, 부른 놈들 다 기어 오는 거 아니야?’

레이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마하가 여기까지 와서 난리를 칠 만했다.

“너, 정말 우승할 자신 있어?”

“당연히 있으니 판을 키웠겠죠?”

“그렇게 가볍게 답할 사안이 아니야. 네가 말한 그 거물들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패배라도 한다면, 이건 고작 아이템 하나 잃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문제야.”

레이첼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그야말로 극단적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아니, 로우 리스크 초 하이 리턴인가?

“패배하는 순간 넌 모든 걸 잃게 될지도 몰라. 북방에서의 공이 깡그리 날아가는 거지.”

“그럴 수도 있겠죠.”

“야! 너 왜 그렇게 담담한데?!”

결국 참지 못한 레이첼이 네르하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작년 고생한 게 한 방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 그것도 높은 확률로!”

“질 생각은 없으니까요.”

“네 논문은 나도 읽어 봤어! 특이하고 혁신적인 건 맞아! 분명 초일류의 연공법이야. 하지만 난 네 이론이 뭔가 완벽하진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어.”

네르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오? 그걸 알아차렸다고?’

레이첼의 안목은 네르하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물론 평상시의 헤르메스라면 우승을 넘볼 수 있을 정도이긴 해. 하지만, 이렇게까지 변수가 널려 있는 상황에서라면 장담할 수 없어.”

확실히 그렇다.

네르하가 제출한 마나 연공법은 어디까지나 검과 마법을 동시에 연마하는 자들을 위한 선물.

마법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내용은 아니었고, 검술계에서도 일대 파란을 일으킬 정도의 역사적인 물건은 아니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미완성’인 현재 상태의 연공법을 보았을 때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네르하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레이첼의 어깨를 다독였다.

“내 이론에 대한 결과물은, 지금 눈앞에 있습니다.”

“결과물?”

설마?

레이첼의 눈이 네르하를 넘어 루시아에게로 향했다.

끄덕!

그 의혹을 증명해 주듯, 루시아가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이 사람이 제공한 마나 연공법을 익혔어요.”

스윽!

루시아가 오른팔을 들어 손날 모양을 만들었다.

파지지직!

그리고, 그 손날을 타고 오러인지 마력인지 모를 푸른 은하를 연상시키는 기운이 생성되었다.

검제, 라실론의 진심 어린 일격조차 막아 낸 루시아의 유성검.

그 유성검에 내재한 힘의 크기를 직감한 레이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직접 보고도, 그들이 내 마나 연공법을 외면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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