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흔적(2)>
헤르메스 개막 2주일 전.
제국 동남부 소도시 스파란.
남부 대수림으로 이어지는 화산지대 인근에 세워진 곳으로 제국에서도 유명한 온천 도시로 이름 높다.
그런 만큼 관광 및 요양을 목적으로 제국 및 대륙 전역에서 귀족, 상인들이 몰려드는 곳이었고, 그런 그들이 세운 거대하고 화려한 별장들이 흔하게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스파란에 존재하는 무수한 귀족들의 별장들 중 하나.
마치 파티 연회장을 연상시키는 넓은 정원에서, 십여 명의 인영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우리도 인간이 다 되었군. 이런 식으로 쥐새끼처럼 몰래몰래 모이다니.”
“동감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인간들의 눈치를 봐야 했지?”
귀족 복장의 뺀질거리는 청년 하나.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거대한 근육질의 청년 하나.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은 물론 모인 모두가 묘한 문양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풋!”
그때, 그들의 귓가에 조롱 어린 비웃음이 들려왔다.
“재밌네. 그러면 너네들 군세를 이끌고 당당하게 이 도시를 지배하면 되는 거 아니야?”
두 사람을 비웃는 여인 역시 무언가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귀족 복장의 청년이 불편하다는 목소리로 여인을 쏘아보았다.
“아스타로스, 패잔병 주제 뭐가 그리 당당하지?”
그의 시선을 마주한 마계 백작, 아스타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패잔병이라니? 난 라데우스 놈들에게 진 적이 없는데?”
“진 적이 없다고?”
“애초에 내 부하들을 처리한 건 비슈나르의 힘을 받은 크루갈이지.”
“그건 네가…….”
능글스러운 아스타로스의 말에 청년이 막 반박하려던 찰나.
“비슈나르를 배신했으니 일어난 일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
이어진 말에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비슈나르가 자신의 부활을 위해 부하들을 제물로 삼은 건 이곳에 모인 모두가 아는 사실.
그 행위 하나로 누가 먼저 배신의 뜻을 품었느냐에 대한 추측은 맥없이 힘을 잃어버린다.
“맞아, 아스타로스의 태도 자체는 문제가 없지.”
“우리가 언제부터 의리를 따졌다고? 그냥 서로의 이익에 따라 뭉친 거 아닌가?”
대번에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에게서도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아스타로스에게 호의적인 의견은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저년은 북방에서 세력과 힘을 모두 잃지 않았나?”
“그런 자가 여전히 우리와 동격이라 생각하는 건 조금 불쾌하군.”
“그것도 맞지. 뭐가 됐든 후원자였던 비슈나르가 봉인된 이상, 아스타로스의 힘은 내 부하보다도 약할 것 같은데.”
청년에게 향했던 것 이상의 조롱과 멸시가 아스타로스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로 위축되지 않았다.
“세력을 잃은 건 맞지. 하나.”
스으윽!
한순간, 막대한 기세가 별장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힘을 잃은 건 아니야.”
“오호?”
“제법?”
물론 이곳에 모인 이들 중 그녀의 기세에 압도당할 약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스타로스가 내뿜은 기세의 격 자체는, 분명 백작급에 충분히 부합했다.
“흥, 어디서 인간 좀 잡아먹고 힘을 키웠나 보군.”
청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툴툴거렸지만, 그녀의 힘 자체는 인정하는 듯했다.
상황이 진정되는 기미가 보이자, 누군가가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스타로스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하고, 슬슬 본제로 들어가는 게 어때? 난 그다지 한가한 몸이 아니라서.”
“오, 프리마. 뭔가 재밌는 건수라도 물고 왔나?”
“재밌는 걸 물고 온 건 이 녀석이지.”
프리마라 불린 여인의 옆에는 딱 봐도 마법사 티가 나는 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엔 처음 나온 인물이었지만, 수백 수천 년간 마계에서 교류해 왔던 이들은 대번에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자간이군.”
“한 50년 전쯤인가? 무투파 마족 주제에 마법사의 몸을 차지해서 웃음거리가 된 녀석, 아직도 중간계에 있었나?”
“그래. 다들 오랜만이군.”
자간이라 불린 마법사가 클클거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조용히 있다가 이제야 얼굴을 내민 자간? 무슨 용건으로 이 회장에 나타나셨지?”
청년의 물음에 자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지난 수십 년간, 인간 세계에 몸을 담그며 마탑 하나를 손에 넣었다.”
“그래서?”
“그리고 그 마탑의 인원 전부를 지배하는 데 성공했지.”
“고작 그런 걸 자랑하려고 나타났다면 실망인데.”
“말은 끝까지 들어라.”
나지막이 청년을 노려본 자간이 말을 이었다.
“약 2주 뒤에, 제국의 마법 도시 루리엔에서 헤르메스란 대회가 시작된다.”
“이름은 들어 본 것 같군.”
“그 두 가지가 무슨 상관이지?”
그제야 주변 인물들의 얼굴에 흥미가 나타나는 찰나.
“나는 남쪽을 지배하신 수마왕(獸魔王)께 마나를 공급받아, 그 루리엔이라는 곳을 향해 인간 세상에서 대이적 마법이라 불리는 마법 하나를 발현하려고 한다.”
“대이적 마법?”
“수마왕? 그 자기밖에 모르는 짐승이 남을 도와줘?”
“그래서? 그 마법의 이름이 뭐지?”
씨익!
자간의 입가에 길쭉한 웃음이 맺혔다.
“메테오. 라데우스 놈들이 북방지대에 사용했던 마법이지.”
“……!”
“……!!”
좌중에 있던 자들의 눈이 놀람으로 변했다.
메테오. 분명 위력은 확실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마족들과는 연관이 없는 마법이었다.
하나는 메테오를 단독으로 발현하려면 최소 마왕급은 되어야 한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런 마왕급 마족들은 메테오가 아니더라도 그에 달하는 강력한 권능을 소유하고 있어 굳이 메테오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라데우스에서도 고위 마법사 수백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소환할 수 있는 대이적 마법.
분명 정상적으로 발현한다면, 도시 하나 정도는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마법은 분명했다.
“그거, 제법…… 아니, 많이 흥미로운 말이군.”
“상당히 즐거운 이벤트를 가져왔잖아?”
몇몇 이들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들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에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나쁘진 않지만, 도시 하나를 없앤다고 상황이 딱히 변하는 건 없을 텐데?”
“베리타스나 로엘 소드, 바하마르 정도가 아닌 이상 의미가 없다. 오히려 적에게 경각심만 심어줄 뿐.”
“그리고 그런 곳을 노린다 해도,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지. 워낙 방어가 단단할 테니.”
로엘 소드는 케프렌의 주도. 바하마르는 제국의 수도였다.
“물론 그렇지.”
자간은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루리엔이란 도시를 노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
“두 가지라면?”
“하나는 선전포고용이다. 방금 내가 말하지 않았나? ‘수마왕’의 힘을 빌려 마법을 발현할 거라고.”
“호오?”
“그 말은, 수마왕이 대륙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는 소리인가?”
“그렇다. 원래는 남쪽의 그렌 타운이나 다른 도시를 노릴까 싶었지만, 도시의 규모가 영 별로라 손해 보는 느낌이라 바꿔 버렸지.”
“그건 그렇다 치고, 두 번째 이유는 뭐지?”
모두의 주목을 받은 자간이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그곳에, 과거 우리를 괴롭혔던 초마인의 흔적이 있다.”
“뭐! 그 빌어먹을 인간 놈의 흔적이라고?!”
“나도 몇 다리 건너 들은 거라 그 흔적의 정체가 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도시 전체를 메테오로 밀어 버린다면 그게 뭐가 됐든 상관이 없어지지 않겠나?”
“확실히, 상당히 그럴듯해!”
“다시 봤군, 자간. 지금까지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이런 재미난 계획을 기획하고 있을 줄이야!”
“이걸 알면 라데우스 놈들이 뒤집어질 게 눈에 선하군!”
많은 이들이 자간을 향해 찬사를 보내고 있을 때.
지금까지 조용히 경청하던 아스타로스가 묘한 콧노래를 흘렸다.
“흐응…….”
그녀의 눈은, 무언가 건수를 잡았다는 듯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밌는 정보를 들었군. 우리 빌어먹을 주인님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어.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전하지? 한동안 감시가 붙어서 움직이긴 힘들 것 같은데…….’
* * *
마법도시 루리엔의 중앙에 위치한 시장 관저엔 이미 각계에서 몰려온 수많은 거물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들 대부분이 ‘거물’들을 수호하기 위해 모인 호위들이었다.
그런 호위들의 숨 막힐 것 같은 포위(?) 속에, 그들의 가장 중앙에 위치한 두 장년인 중 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맞대는 건…… 음, 한 10년 만인가?”
상대의 인사에 다른 하나 역시 입을 열었다.
“11년 하고도 3개월 정도가 지났더군. 어쨌든 오랜만이오. 마기우스 가주.”
꽉!
두 사람이 악수했다.
“나야말로, 카이젤 가주.”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두 거인, 카이젤 라데우스와 마기우스 케프렌이 10여 년 만에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다음으로 입을 연 건 카이젤이었다.
“이번 우리 아들의 장난질에 응하신 건 의외였소. 이곳까지 발걸음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오?”
“꽤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시는군요.”
“그럴 만한 사안이니까.”
이 행보는 해석하기에 따라 케프렌에서 라데우스를 향해 무언가 수작을 부리는 거라고 가정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이미 라데우스의 많은 참모들이 이 부분은 정설로 여기고 있었다.
“나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평의회를 주최하면 될 터이고, 정말 급하다면 마법으로 독대하는 방법도 있지. 무슨 꿍꿍인지?”
“하하하, 대륙 최강의 마법사답지 않게 마음이 급하시구려.”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전쟁이 날 수도 있을 것이외다.”
“흐흐, 그것참 무섭군요.”
한차례 너털웃음을 내지은 마기우스가 입을 열었다.
“이유란 건 정말 별거 없소. 당신 아들내미 때문이오.”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물론 마족 문제로 가주와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있지. 다만, 미뤄진 내 아들의 성인식을 앞에 두고 발을 뺀 이유는 그 당돌한 녀석이 초대장에 적은 말 한마디 때문이오.”
“……대체 뭐라 적었길래?”
카이젤은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상대는 대륙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신과 ‘동급’으로 취급해 줄 수 있는 자.
설사 그 초대장에 욕설을 싸질렀다 해도 거인의 무거운 엉덩이를 떼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 자신이 헤르메스에 출품할 마나 연공법이, 케프렌의 마나 연공법보다 더 우수하다고 하더군요.”
뚝!
카이젤의 사고가, 한순간 정지했다.
“……뭐라고요?”
“그리고 만약 자신의 초대를 받아들인다면, 내게 그 증거를 보여 주겠다고 하더이다.”
“…….”
카이젤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그의 뇌리를 채운 생각은 단 하나뿐.
‘대체 무슨 생각으로?’
네르하는 케프렌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것도 가주가 직접 뛰쳐나올 정도로 확실하게.
이건, 저 말이 사실이어도 문제고, 거짓이어도 문제다.
아니, 둘 다 문제이긴 하지만 ‘사실’일 경우가 더욱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순간, 카이젤은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여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이번 헤르메스의 결과로 어떤 파장이 벌어질지, 현명한 그조차도 도저히 예측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그 결과가 일어나기 전에…….
“허허허, 다들 여기 계셨군요.”
카이젤이 주먹을 꾹 쥔 채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
저 멀리서 푸근한 노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창세기에 나오는 바닷물이 갈라지는 모습처럼, 꽉꽉 모여 있던 인파가 노인의 등장에 길을 열기 위해 갈라지기 시작했다.
노인의 정체를 고려하면 이는 나름 당연한 일이긴 했다.
“성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두 분.”
백색과 금색의 화려한 복장.
하지만 그보다도 더 눈에 뜨이는 건, 노인의 머리 위에 쓰인 마치 관처럼 보이는 모자.
그 모자는 오로지 주신을 모시는 대륙 최대 종교.
그 종교의 수장인 ‘교황’에게만 허락된, 신성한 성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