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짐승들의 왕 (1)>
심사위원들이 한창 네르하와 루시아의 논문에 언쟁하고 있을 때.
“후우…….”
루시아의 모든 강연을 지켜본 마기우스가 깊은 한숨과 함께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런 마기우스의 모습을, 옆에 앉아 있던 카이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당연한 걸 묻는군. 가주의 의중을 묻는 거요.”
“글쎄요, 아직 판단하긴 힘들군요.”
주변에 있는 많은 이들이 마기우스의 눈치를 보았다.
마기우스의 말투가 평상시로 돌아온 것을 보아, 우려하던 극단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마기우스의 내심은 나름 상당히 복잡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긴 했지만, 이렇게 큰 걸 가져올지는 몰랐군.’
이렇게 되면, 기회와 상관없이 차후 큰딸에게 나름의 지위를 부여해줘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경쟁에서 도태되거나, 아니면 아예…….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한 건 맞습니다. 케프렌이나, 라데우스나.”
“그건 그렇지.”
카이젤 역시 그 말엔 공감했다.
그가 푸념하듯 입을 열었다.
“차라리 후계가 확정된 이들이 이런 걸 꺼내왔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진 않았을 거요. 그건 그쪽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소?”
“흐음.”
네르하와 루시아가 공동으로 꺼내 들은 ‘오러와 마력의 융합’은 차후 전 대륙에 어마어마한 지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닐 것이다.
짧게는 10년, 길어도 30년.
그 정도 시간이 지난다면, 분명 야심에 불타는 대륙의 젊은이들은 아주 매력적이고 새로운 선택지 하나를 눈앞에 두고 있을 것이다.
카이젤이 가늘게 눈을 뜨며 물었다.
“어떻게, 지우시겠소?”
지운다는 말은, 이번 헤르메스에 일어난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하고, 관계자 전원의 입을 막는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대륙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학살극이 벌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
마기우스는 바로 답변하지 않았다.
모두가 마기우스의 입에 집중하던 때, 곧이어 그에게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럴 수는 없겠지. 아무리 온전한 내 것이 아니라고는 해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소.”
“후후후…….”
카이젤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아그란바드는, 어째서인지 그 웃음이 비웃음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때, 마기우스가 눈을 부라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하지. 이번에 발표된 이 이론들에 대한 독점은 어디까지나 케프렌과 라데우스, 이 두 가문에게만 집중되어야 할 것이외다.”
“당연한 말을.”
이 합의는 분명 결과물을 세간에 공개해야 한다는 헤르메스의 대원칙을 무시하고 있었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가문, 라데우스와 케프렌이 마음을 먹은 이상, 이 정도의 대원칙 따위는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이 논문의 발제자인 네르하와 루시아, 두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돌아가야 하겠지만, 어쨌든.
“앞으로 한동안 바빠지겠군.”
“후후후…….”
옆에서 계속해서 웃음을 흘리는 카이젤의 모습에, 마기우스가 불쾌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왜 자꾸 기분 나쁘게 웃으시는지?”
“아아, 별거 아니오. 그저, 가주가 자신의 딸을 아주 사랑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을 뿐.”
마기우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경쟁 가문의 가주에게 자신의 약점을 들킨 것과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둘째치고.
“설마, 이제와서 선을 넘으려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소만.”
“아아, 물론. 우리 아들내미들 성인식에 자객을 보낸 그쪽의 성의엔, 언젠가 꼭 보답하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요.”
“…….”
“뭐, 지금은 그걸 따지진 않겠소. 공동의 적이 있으니.”
“고, 맙소이다.”
으득!
지은 죄가 있느니만큼, 정면에서 면박을 당해도 마기우스는 할 말이 없었다.
과거 바스텔과 아르바의 성인식 때, 둘을 제거하기 위해 수작을 부렸던 건 확실한 사실이었으니까.
두 사람의 갈등이 소강상태에 이르렀을 때, 지금껏 가만히 있던 아그란바드가 즐겁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그란바드의 눈은 카이젤과 마기우스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거, 앞으로 상황이 꽤나 재미있게 변하겠군. 다른 로드들이 보면 참 재밌어하겠어.”
그가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균형이 무너지려나?”
“이번 일을 그냥 내버려두거나, 혹은 없애려고 시도했다면 바로 그렇게 되었겠지요.”
아그란바드의 중얼거림에 반응한 건, 제국 원로원주 르브론 대공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마기우스 가주가 대격변의 시작을 최소 10년은 늦췄군.”
정치판에서 오랜 세월 구른 경험치가 있는 만큼, 그의 안목은 날카롭게 핵심을 찔렀다.
“오오, 제법 평가가 좋은걸?”
아그란바드의 눈웃음에도 르브론 대공의 표정은 여전했다.
“그럴 만한 내용이니까요. 적어도, 제국 역시 시간을 벌었으니 이곳에 온 보람은 있군요.”
“어차피 두 가문이 쎄쎄쎄하며 이득을 독점할 텐데, 그걸 어떻게 막으시려고?”
르브론 대공이 코웃음을 쳤다.
“기본적인 원리 정도는 이해했으니, 제국이 따라가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요.”
축기율 3.0의 마나 연공법.
이것이 가져온 파장은 그야말로 막대했다.
다만 그 3.0의 효율이 루시엘라 케프렌이라는 희대의 천재와, 케프렌의 마나 연공법이라는 최고의 소재가 결합된 결과물이라는 걸, 몇몇 이들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3.0이라는 축기율만 존재했다면 그들이 이렇게까지 소란을 떨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린 이유는, 루시아가 발표한 마나 연공법의 단점을 받쳐주는 ‘융합기’라는 개념.
‘이 두 이론의 결합은, 그야말로 호랑이가 날개를 얻은 격이로군.’
이것이 차후 대륙 역사에 유례없는 대격변을 일으킬 것이라는 건 모두가 확신하고 있었다.
모두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의아한 점이 있다면.’
아그란바드가 이젠 빈 자리가 되어 버린 경연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네르하 라데우스와 루시엘라 케프렌의 이론은, 정녕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어 나온 결과물인가?’
겉으로 보면, 네르하가 마나 연공법을 창시했고 루시아가 그걸 바탕으로 융합기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단순한 마법의 이론만큼은 카이젤을 능가하는 아그란바드의 눈은, 진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훗, 그럴 리가 없지.’
이 두 가지의 이론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다.
‘유성기(流星氣)라는 힘 자체는 분명 루시엘라 케프렌이 개발한 힘이겠지. 하지만.’
융합기라는 개념 자체는 다르다.
아그란바드가 보기에, 마나 연공법과 융합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혈육과도 같은 관계. 둘 중 누가 되었든 이건 무조건적으로 한 존재의 작품이 분명했다.
‘그리고 가능성을 따지자면, 루시엘라 케프렌보다는…….’
네르하 라데우스 쪽이, 훨씬 더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렇게, 네르하와 루시아가 증명한 마법과 무술의 융합 이론은 각 범 대륙적 세력의 수장들에게 고평가를 받으며 막을 내렸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
“하하, 여기에 메테오가 떨어진다고?”
지급으로 들어온 보고를 받은 카이젤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자란.”
“예, 가주.”
카이젤의 시선 끝에는 곁에 두는 백령대의 측근 하나가 서 있었다.
“그렇다고 하는군. 어떻게 생각하나?”
“송구합니다. 죽여 주십시오.”
아자란이라 불린 백령대 마법사는 대번에 그 자리에 엎드리며 고개를 처박았다.
그 모습을 본 마기우스가 대번에 입을 열었다.
“이거, 아무래도 집안 단속이 그리 잘 되진 않는 모양입니다?”
이번엔 카이젤의 표정이 구겨질 차례였다.
“내부의 배신인지, 우연의 일치일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요.”
“흐음, 가주께선 이게 우연의 일치라고 보시는군요.”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일이 우연으로 일어날 일은 없었다.
다만.
“글쎄, 적어도 이번 건에 대해선 우연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데?”
“……로드,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카이젤의 편을 들어주는 아그란바드를, 마기우스가 언짢게 바라봤다.
아그란바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원래라면 라데우스 가문의 배신자가 가주를 배신하고 가문을 전복하기 위해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십상이지만?”
“이만한 전력이 모여 있는데, 고작 머리 위로 메테오 하나 떨어뜨린다고 제거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
“내 생각엔, 이건 전쟁을 벌이기 직전, 누군가가 우리에게 보내는 축포 정도라고 생각되는군.”
* * *
“자, 잠깐만! 메테오가 떨어진다고? 그것도 이곳 루리엔에!?”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사실입니다.”
“부정이고 자시고! 이곳은 라데우스의 영역이야! 그것도 꽤 중요한 곳이라고!”
레이첼은 믿을 수 없는지 꽤나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곳에 메테오가 떨어진다면 그 거대한 마력의 흐름을 라데우스 측에서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어!”
“그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만약 대수림에서 비롯되었다면?”
“뭐, 뭐!?”
“그렇다면 아무리 라데우스라 해도 알아채기 힘들겠죠. 대수림은 북방처럼 구역 전체에 마력의 흐름을 알아차리기 힘든 자기(磁氣)같은 게 흐르니까요.”
외부에서의 관측이 불가능하기에 대수림이 인세의 마경이라 불리는 이유 중 하나였다.
“으음…….”
레이첼이 그 말의 신빙성을 판단하려던 찰나.
“뭐, 이번 마법은 대수림 자체에서 발현된 건 아니지만 말이죠.”
“이 자식이? 지금 장난해!?”
레이첼이 막 분노를 토해내려던 찰나.
“대수림에 있는 자기력은 마력의 흐름을 숨겨주는 효과가 있지만, 반대로 바깥으로 방출하기도 힘들다는 단점도 있죠. 즉, 대수림에서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발현할 수는 있어도 정확한 좌표 설정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렇다면 뭐야? 뭔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마력 자체는 대수림에서 끌고왔으되, 발현 자체는 대수림 바깥에서 했다는 소리죠.”
그리고 그 마력의 흐름을 라데우스의 감시에서 속여 넘긴 자들이, 이번 메테오를 발현한 장본인일 것이다.
“…….”
한동안 말을 잃은 레이첼이, 힘없이 떠듬떠듬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북방에서 발현된 메테오는 어디까지나 그 범위와 위력을 조절한 녀석이다.
하지만 이번에 떨어지는 메테오가 이쪽의 사정을 봐줄 거라는 건 너무나 희망찬 낙관이었다.
“뭘 어쩌긴요.”
“으, 으응?”
레이첼은 순간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다.
네르하가 마치 복권에 당첨된 사람마냥 너무나도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놈들에게 뺏기기 전에 빨리 가서 범인을 족쳐야죠.”
“버, 범인을 족친다고? 헤르메스는 어쩌고? 아니, 그 전에 범인이 어디 있는 줄 알고?”
범인의 위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맵핑해 주는 든든한 존재가 이 도시 근처에 대기 중이니까.
“아무리 마탑이 무능해도 지금쯤이면 메테오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심사는 연기되고 도시는 비상 대응에 들어가겠죠.”
“괜찮을까? 메테오를… 막을 수 있을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현 시대 최강자들이 도시 안에 모여 있다.
그리고 라데우스의 최정예와, 그들과 대치중인 케프렌의 최정예들 역시 있다.
아무리 메테오가 범대륙적인 재앙이라지만.
“고작 그것도 못 한다면, 난 그들에게 매우 크게 실망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