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세계의 진실 (1)>
자간을 놓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번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들 대부분을 추살하는 덴 성공했다.
“빠르군, 네르하 라데우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라데우스의 대장로 수넨이 가문 최정예인 백령대를 이끌고 이곳을 찾아왔다.
“아쉽게 수괴는 놓쳤습니다. 상당히 재빠르더군요.”
“그런가? 그거야 조사해보면 알겠지.”
대장로 수넨은 네르하에게 그다지 호의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후계 경쟁에선 중립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철저한 조사 후에 논공의 여부가 가려질 것이다. 이만 복귀해라.”
의외로 수넨은 네르하가 어떻게 여기까지 도달했는지에 대해선 따지지 않았다.
“예, 대장로님.”
네르하는 수넨의 태도로 현재 루리엔의 상태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대번에 눈치챘다.
일단 케프렌과 라데우스의 가주가 있는 자리에 메테오가 떨어졌으니, 이런 시시콜콜한 일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막 신형을 돌리려던 네르하에게, 수넨이 이렇게 말했다.
“축하한다, 네르하 라데우스. 넌 이번 헤르메스에서 최종적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아, 그렇습니까?”
“보상으로 얻고 싶은 술식이 있다면 미리 생각해두는 게 좋을 거다.”
“혹시, 저 다음으로 발표한 루시아라는 소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연하다는 듯 수넨은 루시아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루시엘라 케프렌을 말하는 거라면 너 다음으로 최우수 논문에 선정되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행히 루시아 역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은 모양이었다.
‘훗, 내가 우승한 만큼 당연한 일이겠지만.’
하지만, 이어진 수넨의 말에 네르하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다만, 너의 마나 연공법과 루시엘라 케프렌의 융합기가 세간에 공개되진 않을 거다.”
“잠깐, 그건 무슨 뜻입니까?”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두 가문의 가주님들께선 너희의 계획이 불러올 결과에 대한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셨다.”
움찔!
“그렇기에, 너희들의 이론을 두 가문이 독점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셨다.”
“……꽤나 제멋대로 결정하셨군요.”
물론 외부 전력 수급의 목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전력의 수급도 라데우스에 귀속할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다.
“건방진 발언이군.”
수넨은 차가운 표정으로 네르하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무엇을 만들던, 무슨 성취를 이루던, 그건 라데우스의 것이다. 그리고 라데우스의 정점이신 가주님의 것이기도 하다.”
“…….”
네르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저 말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저 말에 반박할 수 있는 힘과 세력이 아직 네르하에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말에서 부조리함을 느낀다면, 이 가문에서 정점에 올라라. 그렇다면 그 누구도 너의 것을 빼앗지 못할 테니까.”
네르하는 이를 갈며 대답했다.
“친절한 충고, 감사드립니다.”
“훗! 그래도 표정 관리 정도는 할 줄 아는군.”
수넨은 어째서인지 날카로운 표정을 풀고 엷게 웃었다.
“그래도 네 목적을 어그러뜨리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목적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른 체하며 고개를 갸웃거린 네르하였지만, 수넨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가문에 구애받지 않는 너만의 세력을 장기적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그렇기에 이번 헤르메스를 이용한 것일 테고.”
“…….”
네르하는 속으로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내 행적이 고위층에 읽힐 건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검증 당하니 기분은 확실히 나쁘군.’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눈치 빠르고 유능한 자를 상대하는 건 너무나도 귀찮다.
“그래서? 제게 어떤 식으로 보상을 해 주실 생각이십니까?”
“가주께선 ‘마투사’의 육성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계신다.”
전투마법사가 아닌 마투사. 그 차이를 가주 카이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케프렌 역시, 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지.”
뭔가 이런 식으로 밑밥을 깔아두는 걸 보니, 대충 무슨 말을 꺼낼지 대충 짐작이 간다.
“제게 육성을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가주님께서 네게 거는 기대가 매우 크시다.”
이걸 보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어떻게 보면 보상은 보상이지만, 가뜩이나 할 일이 많은데 괜한 짐을 짊어진 기분이다.
“가주님께선 향후 10년 뒤에 이루어질 케프렌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길 바라신다. 고로 그걸 위한 모든 재원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가 이루어질 테지.”
“경쟁이라…….”
“그리고 그 투자의 규모는 네 상상 이상일 거다. 그걸 어떻게 사용하든 그건 네 자유가 되겠지.”
안타깝게도, 네르하는 수넨이 말해주는 메리트에 대해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투자의 규모가 크든 작든, 그게 돈이든 인력이든 다 상관은 없는데 말이지.
“인재의 범위는요?”
“네가 발표한 마나 연공법이 다른 것과 결합 될 수 있다는 게 밝혀졌으니…….”
의외로, 이 부분에서 카이젤은 매우 화통했다.
“장로급 미만의 거의 모든 재원을 가져다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좀, 매력적이군요.”
“자세한 범위는 차후 가주님께서 너를 직접 불러 조율해주실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알고 루리엔으로 돌아가라.”
“네, 알겠습니다.”
네르하는 수넨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인 뒤 산맥을 빠져나왔다.
* * *
그렇게 루리엔으로 귀환한 네르하가 가장 처음 목격한 것은.
도시 전체를 울리는 시민들의 환호성이었다.
“우와아아아아!”
“라데우스 만세! 케프렌 만세!”
“라데우스여 영원하라!!”
시민들의 반응은 헤르메스가 한창 진행될 때보다도 더욱 격렬했다.
아니, 그걸 넘어 아예 광신도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맹목적이었다.
‘당연하겠지. 자기 머리 위로 메테오가 떨어지고 있는데 그걸 막아줬으니.’
그리고 그걸 단순히 막다 못해 두 사람의 힘만으로 완전히 박살 냈으니, 평범한 시민들의 눈엔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처럼 보일 것이다.
‘정말 놀라긴 했지. 나라고 해도 그 운석을 두 동강 낼 자신은 없었으니까.’
아마도 운석을 두 조각으로 자른 건 케프렌의 가주, 마기우스 엘 케프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난 대이적 마법은, 아마도 카이젤의 작품이겠지.’
정말이지 놀랍다.
그리고 그들을 넘어서고자 하는 향상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지금껏 천마와 스승 외에는 자신을 넘어선 존재는 없다고 자부했었지만.
카이젤과 마기우스. 그들의 수준은 일찍이 중원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지고한 경지에 닿아 있었다.
‘내 길도 틀리지 않았다. 반드시 넘어설 거다.’
되려, 현 대륙 최강자인 그들이 네르하의 이론에 대한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준 것이 자신감을 높여 주었다.
그때였다.
“어이! 북방의 영웅!”
젊고 쾌활한 목소리. 다만 처음 들어보는, 그리고 처음 느껴보는 존재감에 네르하의 움직임이 천천히 굳어졌다.
“하하하! 재밌는 녀석이군! 이런 번화가인데도 몸이 대번에 전투준비로 들어가다니 말이야.”
네르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상대를 살폈다.
그리고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리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은!”
“이야, 이렇게 만난 건 처음이지? 반갑다!”
거리감 따윈 개나 줬다는 듯 대번에 네르하의 손을 붙잡고 이리저리 흔드는 금발의 남자.
대륙 평의회의 일원이자 위대한 골드 드래곤의 로드, 아그란바드였다.
순간 네르하의 경계심이 최대치로 올라갔다.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는지?”
“아아! 네게 개인적인 흥미가 있어서 말이야. 카이젤에겐 허락을 구해놨으니 조금 시간을 좀 내달라고.”
가주의 이름까지 들먹인 이상, 네르하로선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럼 잠시 편한 데로 이동할까?”
아그란바드는 대번에 네르하의 팔을 붙잡아 끌기 시작했다.
“으음…….”
뭐랄까. 워낙 중성적으로 생겨 그런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님에도, 이렇게 거리감 없이 들이대는 탓에 묘한 기분이 든다.
‘애초에 드래곤에겐 성별의 개념이 없다고는 해도, 뭔가 좀 남사스럽군.’
그렇게 아그란바드의 손에 근처 카페로 끌려간 네르하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뭐가 그리 궁금해서 찾아오셨는지?”
네르하는 지금 마음이 조금 급했다.
카이젤이 마투사의 육성을 언급한 만큼, 케프렌 가문 역시 ‘루시아’에게 어떤 대응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다만 그대로 뿌리치기엔 아그란바드는 무시할 수 없는 거물이었다.
“하하하, 얼굴에 급한 티가 확 나는군. 루시엘라 케프렌 때문인가?”
“…….”
요즘 들어 자신의 마음을 꿰뚫는 이가 많아졌다는 것에, 네르하는 마음속 깊이 탄식했다.
아그란바드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며 피식 웃었다.
“걱정 말라고. 지금 그 아이는 마기우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니까.”
역시 대륙 굴지의 권력자답게, 아그란바드는 케프렌과 라데우스 사이에 얽힌 최고의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알고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곳은 라데우스의 영역이야. 그리고 그 아이를 라데우스 측에 보낸 건, 케프렌의 전대 가주인 하이가의 뜻이지. 아무리 마기우스라도 하이가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루시엘라를 데려갈 순 없어.”
“뭔가, 두 가문의 속사정을 잘 아시는군요.”
“그 속사정에는 나도 어느 정도 얽혀 있으니까.”
“…….”
“뭐, 일이 이렇게 흐른 이상, 마기우스는 정식으로 라데우스 가문에 루시엘라의 반환을 요구하겠지. 다만 그렇게 일이 진행되기까진 몇 달 정도는 걸릴 거야.”
몇 달 정도라면 어느 정도 대책을 세울 수는 있었다.
그 케프렌을 상대로 대책이 먹히는지는 둘째치더라도 말이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가 널 찾아온 이유 말인데.”
아그란바드는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묘한 표정으로 네르하에게 물었다.
“만났지?”
“누구를 말입니까?”
“에이, 뭘 모른 척하나?”
손을 내저은 아그란바드의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수마왕, 레비아탄 말이야.”
“……!”
“비슈나르, 레비아탄, 베엘, 예루리……. 마신 네르반을 따라 중간계에 발을 내디딘 이 네 명의 마왕들은,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숨을 죽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지. 아, 물론 비슈나르는 이제 나가떨어졌지만.”
그 비슈나르와 동격인 마왕이 한 명도 아니고 무려 3명이나 더 존재한다는 말에, 네르하의 표정이 크게 굳어졌다.
“사실 네르반이 차원의 경계를 찢고 중간계에 강림한 시점부터, 우리에겐 승산은 없었어. 사실상 저 천계의 신들이 아닌 이상, 그놈은 필멸자로선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존재였으니까.”
그 말에 네르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사책에 따르면 500년 전 등장한 마족들의 세력은 분명 강대했지만, 멸망의 위기라든가, 인간들이 절대 감당할 수 없다든가, 그런 정도는 아니었다.
그 표정을 이해한다는 듯, 아그란바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혼란스럽겠지. 인간들의 역사책에는 서로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웬 미쳐버린 마인 놈이 마족들을 학살했다고 나와 있을 테니까.”
“실제로는 다르다는 얘깁니까?”
“당연히.”
과거의 역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아그란바드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초마인이 없었다면, 중간계는 500년 전 그대로 멸망했을 거다. 이것만은 확실해.”
그 정도였나?
무려 드래곤 로드씩이나 되는 양반이니만큼, 거짓을 입에 담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아그란바드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거 아나? 그 초마인이란 칭호는 인간 주제에 마족들보다 더 마기를 능숙하게 다룬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이야.”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그놈은 오히려 초마인이란 칭호를 싫어했다더군. 그놈은 마족들을 향해 자신을 이렇게 불러달라고 했어.”
그리고, 아그란바드의 말이 다음으로 이어진 순간.
네르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마. 천마(天魔)라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