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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91화 (191/237)

191화

<세계의 진실 (2)>

이전부터 초마인이 중원의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은 있었지만, 지금 아그란바드의 말은 그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주고 있었다.

“천마, 라고요?”

아그란바드는 지금 네르하의 머릿속이 얼마나 헝클어졌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확실히 인간이 사용하기엔 광오한 명칭이지? 당연히 마족들은 그 칭호를 인정하지 않았어.”

너무나 광오하지만, 충분히 그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강자.

하지만 마족들은 동족도 아닌 인간에게 그런 칭호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서 고민하던 마족들이 붙여준 명칭이 바로 ‘초마인’.

그렇게 결정된 그 이름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인간들에게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네르하는 혹시나 싶어 물었다.

“그자의 인상착의를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지. 과거에 몇 번 싸워보기도 했으니까.”

아그란바드는 묘한 눈으로 네르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의외인데? 내게 그자의 생김새를 물어본 건 네가 처음이야. 얼마나 센지를 물어본 녀석들은 많아도 말이야.”

네르하는 괜히 찔렸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그냥, 궁금해서죠.”

“그런가? 뭐, 그럴 수도 있겠군.”

고개를 끄덕인 아그란바드가 기억을 뒤적였다.

“솔직히 그놈에 대한 인상은 그렇게 강렬하진 않았어. 긴 금발을 여자처럼 뒤로 묶은 것을 제외하면, 얼굴 자체는 무척이나 평범했으니까.”

“흑발이나 흑안이 아니었습니까?”

제법 노골적인 질문이었지만, 되려 아그란바드는 그럴 질문이 나올 만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마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대부분 그런 생각을 하긴 하는데, 전혀 아니야. 놈의 외면에선 전혀 마족과의 연관성을 느끼진 못했어.”

“……그렇습니까.”

뭔가 실망한 듯한 네르하의 반응에 아그란바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 외모로는 몰라도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있었지.”

“특이한 점이라면?”

“놈이 상당히 펑퍼짐한 옷을 고집했다는 거야.”

만날 때마다 비슷한 스타일을 추구했기에 기억이 안 남을 수가 없었다.

아그란바드가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렇게 양쪽 소매가 상당히 넓었고, 여자 옷처럼 다리를 모두 감쌀 정도로 치마 비슷한 복장을 고수했지.”

“……!”

“치마라고 해도 안에 바지는 입었더라고. 하하하하! 처음엔 취향이 이상한 놈인 줄 알았다니까?”

그건 분명 중원 특유의 복장이다.

귀족 계급이 아닌 이상 나름 꽉 끼게 입는 이 세계의 의복 문화를 생각하면, 전장에서도 그런 복장을 걸치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아, 검은색 하니 또 생각나는군. 그놈이 입은 옷이 분명 검은색이었어. 정확히는 뭔가 지렁이 같은 검붉은 문양이 새겨진 검은 바탕의 옷이었지.”

“그렇, 군요.”

네르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암룡포(暗龍袍).

전생에서도 지겹게 본 천마의 상징 중 하나.

‘놈, 정말로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구나.’

다만 의외인 점이 있다면, 그놈과 자신 사이에 500년이란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놈은 아직도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까? 아니, 애초에 어째서 똑같이 문을 통과했는데 이런 차이가 나게 된 거지?’

지금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생각에 잠긴 네르하를 향해, 아그란바드가 말했다.

“어느 정도 정보를 빼먹었으니, 이제 내 용건을 말해도 되겠지?”

“네, 말씀하시죠.”

물건을 받았으니 그 값은 치러야 했다.

“너에게 하고 싶은 의뢰가 있어.”

“의뢰?”

“맞아, 의뢰.”

“죄송하지만 개인적인 의뢰는 받지 않습니다. 이제 외적인 문제로 가문 밖을 나돌아다닐 처지가 되지 못해서요.”

개인의 성장과 마하와의 권력 다툼을 대비해야 하는 것만으로도, 네르하는 다른 곳에 쪼갤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하지만 의뢰의 내용을 듣고 나면 생각이 좀 달라질걸?”

아그란바드는 깍지 위로 자신의 턱을 올린 채 눈웃음을 쳤다.

“초마인의 흔적을 찾고 싶지 않나?”

“……!”

흠칫!

“드래곤의 직감을 무시하진 말라고. 인과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몰라도, 너와 초마인이 관계가 있다는 건 어느 정도 눈치챘으니까.”

저게 진실인지 아니면 허세인지는 몰라도, 네르하는 일단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거랑 의뢰가 무슨 상관이 있죠?”

“너, 듣자 하니 케프렌 가문에 초대를 받아서 곧 로엘 소드에 간다고 들었는데.”

“정보가 빠르시군요. 맞습니다만.”

“네가 거기 가서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다.”

해줘야 할 일?

“나름 고급 정보를 하나 알려주지. 케프렌의 영역인 로엘 소드의 최심부. 베리타스로 따지면 제1구역과도 같은 곳에 봉신전(封神殿)이라 불리는 특수한 장소가 하나 있어.”

“그래서요?”

말 그대로 정말 고급 정보이긴 하지만, 네르하의 흥미를 끌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에 뭐가 있든 네르하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심드렁한 네르하의 태도에도 아그란바드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 봉신전에, 네르반 휘하 네 명의 마왕 중 하나인 예루리가 봉인되어 있다.”

“마왕의, 봉인이라고요?”

“그리고 그놈을 그 장소에 봉인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그 초마인이지.”

그제야, 네르하의 표정에 조금은 관심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장담하는데, 라데우스 본가도 이 정보는 알고 있지 못할 거야. 어쩌면 케프렌에서도 그걸 아는 자는 가주를 포함해서 한 손가락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그걸, 왜 제게 알려주는 겁니까?”

아그란바드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초마인의 봉인은 라데우스처럼 세련되지 못했지. 그리고 그 봉인을 유지, 보수하는 케프렌의 역량 역시.”

천여 년에 걸쳐 봉인으로 마왕의 자아를 제거한 라데우스와는 다르게, 케프렌이나 초마인은 라데우스와 같은 초월적인 봉인 기술이 없었다.

아그란바드가 손가락으로 네르하의 어깨부분을 가리켰다.

“지금 네 주변에서 불가시화로 맴돌고 있는 이자카르와는 다르게 말이야.”

스윽!

어느새, 실체화한 이자카르가 네르하의 눈앞에 나타났다.

* * *

―이놈, 똥색 도마뱀 주제에 감히 나를 우롱하다니!

갑자기 실체화한 이자카르를 향해, 아그란바드가 커피잔을 들며 이렇게 말했다.

“아, 오랜만이야 이자카르. 우롱차 한잔하겠나?”

―닥쳐라, 이노오오오옴!

일단 이 세계에도 우롱차가 존재하는지는 둘째치고.

아그란바드의 농담(?) 아닌 농담에, 지금껏 잠자코 있었던 이자카르가 시작부터 분노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일만 년도 살지 못한 어린놈 따위가! 감히 그딴 말로 나를 농락해?!

“하하하, 나도 나름 고룡 측에 드는데 말이야. 하긴, 마계의 마룡과 비교하는 건 실례겠지. 암!”

―죽여버리겠다아아아!

그렇게 이자카르가 입에서 불을 내뿜으며 아그란바드에게 달려들려던 순간.

지이이잉!

네르하의 왼손… 정확히는 백령수투에서 빛이 일더니 그대로 새하얀 사슬이 나타나 이자카르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이, 이런! 카스카엘!

네르하는 목이 매달려 바둥거리는 이자카르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면서 녀석을 끌어당겼다.

그런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아그란바드가 네르하의 왼손을 주목했다.

“물의 대천사의 힘이로군. 절대로 타인에게 내줘선 안 될 성유물일 텐데, 카이젤이 자넬 많이 아끼나 봐?”

“그에 대한 답은 하지 않겠습니다.”

“뭐, 그래. 궁금하면 놈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니까.”

네르하는 조금 황당해졌다.

드래곤 로드라 그런지 천사장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라인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얘기를 계속할까?”

후룩!

아그란바드는 자칭 우롱차… 라고 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예루리의 봉인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동쪽에서 이번 사태로 알 수 있는 게 하나 있지.”

“뭘 말이죠?”

“자칫 잘못하면, 케프렌이 무너질 수도 있을 거라는 걸.”

“케프렌이 무너진다?”

“현재 수마왕 레비아탄의 움직임은 이쪽에서도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있어. 대수림을 빠져나온 놈의 이동 경로를 보아하니, 놈은 라데우스가 아니라 케프렌의 영역으로 향하고 있다.”

그는 탁자에 손가락을 짚어 주욱 일자를 그었다.

“그리고, 동쪽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또다른 마왕인 베엘 역시, 레비아탄과 합을 맞춰 움직이고 있고 말이야.”

“현재 마왕 둘이 힘을 합쳐, 케프렌에 수작질을 벌이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은 건가요?”

“흐흐, 눈치라 빨라서 좋아.”

“그리고 제게 하실 의뢰라는 건, 케프렌 가문 내에 있는 봉신전에 접근해서, 예루리라는 마왕의 봉인을 확인해달라는 것이겠군요?”

“하하하! 정답일세!”

네르하는 너무나 노골적이고 황당한 상대의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상대의 지위나 강함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미쳤습니까?”

“아니, 나는 지극히 정상이야.”

“왜 그걸 케프렌에 정식으로 요청하지 않고, 적대 가문인 저를 통해서 이런 식으로 의뢰를 넣는 거죠?”

네르하는 사나운 눈빛으로 아그란바드를 노려보았다.

“애초에 내가, 그곳에 접근하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까?”

“응, 생각해.”

“…….”

“오히려 어지간한 케프렌의 혈족보다, 네 녀석이 진실을 확인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보고 있어.”

“그 근거는?”

“일단은 네 실력.”

아그란바드의 눈이 상당히 심유하게 변했다.

“넌 이미 대륙 최강자 라인에 올라와 있어. 이미 후계라는 틀에 얽매이는 게 실례일 정도로. 그야말로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 그 녀석 이상의 강자이지.”

“그렇다 해도 강함과 잠입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나름 네르하도 한때 일반 신도로 위장해 십만대산에 잠입할 정도로, 은신에 관해선 일가를 이룰 정도이긴 했다.

‘젠장, 갑자기 그 빌어먹을 천마 찬송가가 떠오르는군.’

뜬금없이 떠오른 흑역사를 지워낸 네르하가 고개를 휙휙 털어내곤 말했다.

“아무리 케프렌이 기사의 가문이라 해도 보안에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았을 리가 없죠. 저 혼자선 무리입니다.”

“물론, 자네 혼자선 무리겠지. 사실 카이젤이라도 혼자선 불가능해.”

“그러면 왜…….”

“하지만 자네는 케프렌의 심처에 도달할 수 있는 조력자가 있지 않나? 그것도 둘이나.”

하나는 루시아…… 루시엘라 케프렌.

그리고 또 하나는, 과거 네르하가 목숨을 살려주었던 검왕 베하나스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루시엘라 케프렌의 소환을 네 힘만으로 막는 건 불가능해. 애초에 라데우스에겐 그녀의 귀환을 막을 명분이 없지. 그녀의 신병은 어디까지나 ‘거래’로 이루어진 거니까.”

“일단 다 제쳐두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입니다.”

“말해봐.”

“방금 전에 이미 말했습니다만, 왜 케프렌에 직접 요청하지 않는 겁니까?”

“그들을 믿을 수가 없으니까.”

너무나 확고한, 그리고 빠르게 튀어나온 답.

그러나 그 무게는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찻잔을 내려놓은 아그란바드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아렌 루 케프렌. 알지?”

“모를 리가.”

자신이 케프렌 가문에 초대된 가장 큰 이유인데, 그를 모를 리가 있을까?

무엇보다 루시아에게 귀에 딱지가 나도록 들은 장본인이기도 한데 말이다.

“나는 아렌 루 케프렌의 비상엔, 예루리가 개입해 있을 거라 추측한다. 그리고, 그 아렌을 중심으로 한 현 케프렌의 수뇌부 중에서도 예루리의 끄나풀이 존재할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

“애초부터, 그 꼬맹이가 갑자기 케프렌의 소가주 자리를 차지한 것에 대해선, 석연찮은 점이 매우 많아.”

아그란바드의 손가락 하나가, 네르하의 이마를 향했다.

“마치, 너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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