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92화 (192/237)

192화

<세계의 진실 (3)>

아렌 루 케프렌의 배후엔 마왕 예루리가 있다.

그리고 너 역시 배후에 누군가가 있어 이런 성장을 이룬 게 아니냐?

아그란바드는 그런 의심을 네르하에게 직접 던진 것이었다.

“그 아렌 루 케프렌처럼, 제 뒤에 누군가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그란바드는 의뭉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야 모르지? 이 세상에서 오로지 너만 알고 있지 않을까?”

네르하는 노골적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넘겨짚기는 잘 못 하시는군요.”

“넘겨짚기라?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정말 몰라서 저렇게 말하는 건가?

왜 갑자기 이런 시비를 거는지는 몰라도, 네르하는 일단 대응해주기로 했다.

“일단 이거.”

네르하가 어깨에 메고 있던(?) 이자카르를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왼손의 백색 장갑을 앞으로 내밀었다.

“거기에 이거.”

“허어?”

“이 두 가지만 해도 충분히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네르하가 제시한 두 가지 증거에, 아그란바드는 잠시 넋을 놓은 채 멍하니 네르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윽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확실히 그래! 충분한 증거가 되지!”

뭐가 그리 웃긴지 네르하의 어깨를 아플 정도로 두들기고 있다.

“하지만 카스카엘의 장갑이라면 몰라도 이자카르를 증거로 댄 것은 상당히 의외로군. 녀석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면 할 수 없는 짓인데, 서로 꽤나 친해졌나 보지?”

“나름 친해졌다고 볼 수 있죠.”

―흥! 내가 그렇게 사정사정해도 들어먹지 않는 개자식이다! 잠깐 이용하고 마는 사이일 뿐이야!

이자카르는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그 감정이 상대에게 전달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보기엔 상당히 협조적인 것 같군. 둘 사이의 영적인 연결이 상당히 끈끈한 걸 보면 말이야.”

―크아아아악! 눈깔이 삐었나, 이 망할 똥색 도마뱀이!

분노를 토해내는 이자카르였지만, 그저 말로만 그럴 뿐 아그란바드에게 덤벼들진 못했다.

‘힘의 차이를 아는 거겠지.’

전성기의 이자카르라면 모를까, 사실상 네르하에게 종속된 거나 마찬가지인 지금이라면 뭐.

굳이 결과를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한동안 이자카르의 재롱 아닌 재롱을 구경하던 아그란바드가 네르하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 의뢰에 대한 답은?”

“…….”

네르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칼같이 거절하던 방금 전과는 달리, 초마인… 천마에 대한 생각이 계산을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확답은 드리진 못하겠습니다.”

“후후, 그 말인 즉 시도는 해보겠다는 거군.”

네르하의 눈에 그늘이 졌다.

“네. 마왕과는 별개로, 케프렌 가문은 한번 조사해 볼 필요성이 있으니까요.”

사실 마왕 예루리의 존재는 네르하에겐 전혀 상관 없다.

천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존재해 온 검과 기사의 가문 케프렌.

500년 전에 나타났다고 예상되는 천마.

네르하의 관심이 쏠린 부분은 오로지 이 둘의 관계성뿐이었다.

아그란바드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일단 선수금 개념으로 이걸 주지.”

그의 검지에 끼어 있던 자그마한 반지가 네르하의 앞에 놓였다.

금색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반지는 무척 화려했지만, 외면을 제외하면 별다른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반지였다.

“어?”

하지만 그 반지를 집어 드는 순간, 네르하는 손가락을 타고 강렬한 열기가 흘러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아그란바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드래곤 하트로 만든 반지다. 사실상 드래곤 로드의 권한을 대행한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지.”

‘엄청난 아티펙트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보석 안에, 네르하가 지금까지 쌓은 마나의 총량을 훌쩍 초월하는 힘이 들어 있다.

‘드래곤은 애초부터 중간계의 모든 생명체와는 차원이 다르다더니 사실이었군.’

라데우스와 케프렌이 대륙을 반씩 나눌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드래곤이 세력 다툼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학계의 오랜 정설이었다.

“이게 있다면 어지간히 귀찮아하는 놈들을 제외하면 웬만한 드래곤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을 거다.”

그 말의 숨은 뜻을 읽은 네르하가 물었다.

“……협조라면?”

“그 반지에 일정 수준 이상의 마나를 주입하면 최대 반경 5천 킬로미터 내의 드래곤들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지.”

확실하다.

지금 이 순간.

골드 드래곤 로드 아그란바드는, 엄청난 결심을 했다.

“케프렌이란 가문을 대륙에서 지워버리실 생각입니까?”

수천 개의 성을 다스리고, 수백 개의 기사단을 거느리며, 수십만 명의 기사를 휘하로 두고 있는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

아그란바드는 그런 곳을 없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엔, 말이지.”

아그란바드는 살짝 콧김을 내뿜었다.

“만약 마기우스가 꼭두각시가 될 정도로 케프렌이 썩었다면 그럴 생각이야. 하지만 도려내는 것 정도로 그칠 수 있다면 당연히 그쪽을 택해야 하겠지.”

‘꼭두각시라…….’

메테오를 정면으로 썰어낸 그 무위를 생각하면, 가주 마기우스 엘 케프렌이 꼭두각시일 가능성은 상당히 적다.

정치력이 아무리 바닥이라도, 개인의 무력이 절대적이라면 가문의 성세와는 별개로 통제력 자체는 어느 정도 있기 마련이니까.

네르하는 반지를 집어 들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자의 우려와는 다른 쪽으로 문제가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건 왜일까?’

분명, 아무 이유 없는 예감은 절대 아닐 것이다.

* * *

그렇게 네르하와 아그란바드가 대화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

루리엔의 어느 장소에선 한 부녀의 상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부녀 상봉의 자리라고 보기엔 상당히 딱딱한 분위기였지만 말이다.

그란시스 마탑이 제공한 귀빈실.

그 가장 안쪽에서 케프렌의 가주, 마기우스 엘 케프렌이 가부좌를 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눈을 감을 채로, 눈앞에 엎드려 있는 한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루시엘라.”

“네, 하문하십시오, 가주님.”

“이번 헤르메스에서 네가 들고 온 성과는 썩 인상적이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루시아는 덤덤하게 가주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후우…….”

마기우스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호흡이 고르지 않으셔.’

루시아 역시 마기우스가 메테오를 가른 걸 지켜본 장본인 중 하나였다.

확실히 그때 마기우스의 모습은 그야말로 무신(武神), 최강의 기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이었지만.

그 역시 아직은 인간. 메테오를 가르면서 그는 자신의 기량을 상당히 소모하고 말았다.

‘뭔가 이상해. 아무리 그래도 육체의 균열이 여기까지 전해질 정도라니?’

원래라면 마기우스는 가문으로 복귀 전에 최대한 몸을 회복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루시아를 불렀다는 건, 무언가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

마기우스가 넌지시 물었다.

“아직도 아렌에 대한 원한을 끊지 못하고 있느냐?”

루시엘라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라데우스에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라는 희대의 천재 장남이 있었듯, 케프렌에서도 그에 비견되는 후계 필두격인 대공자 라일론 엘 케프렌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죽었지만 말이다.

루시아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아렌의 그 웃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

“가주께서 제게 주신 마지막 기회는, 곧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제 운명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결정이 나겠지요.”

“내가 그 원한을 풀라고 명령한다면?”

“그, 건.”

루시아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마기우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너와 티엔이 힘을 합쳐, 차세대 인재들을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았으면 한다.”

“제가 아닌, 아렌을 후계로 삼으시고 말입니까?”

“너는 지금 개인적인 야심이나 가문을 위한 대의가 아닌 복수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읏!”

“너라면 그런 자를 후계로 삼을 수 있겠느냐? 너만 한 위치에 있는 자가 품은 복수심의 끝은, 결국 가문 전체를 불사를 수도 있을 터인데?”

너무나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루시아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루시아를 딱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본 마기우스가 의외의 제안을 건넸다.

“원탁의 기사, 제 1석을 준비해주겠다. 그리고 케프렌의 기사단 총사범의 자리 역시 너에게 주지.”

“……!”

“그 자리를 유지하거나, 혹은 빼앗기거나. 그것은 차후 너의 역량에 달려 있겠지만, 적어도 아렌을 견제하고 케프렌을 이끄는 데 부족한 자리는 아닐 것이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루시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번 헤르메스에 제출한 성과와 관계없이, 마기우스는 분명 이 제안을 자신에게 건넸을 것이라고.

분명 이건 마기우스 나름대로 큰마음을 먹고 건넨 제안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루시아의 재능과 역량, 발전 가능성을 엄청나게 크게 봐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루시아는 마음 한편에서 마기우스가 아렌의 계승을 상당히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의 마음속엔 형용할 수 없는 굴욕감이 올라오고 있었다.

“가주님께선, 지금의 제가, 아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루시엘라.”

“저는 오라버니의 복수만을 위해 가문을 나온 게 아닙니다.”

루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기우스는, 그런 그녀에게서 과거 자신이 꿈꾸었던, 그리고 지금은 이루게 된 그 ‘감정’을 느꼈다.

야심.

정점을 노리겠다는 검사으로서의 야심.

자식들이 흔히 표출하는 흔한 권력욕 따위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경쟁자를 넘어 정점에 서고자 하는 검을 든 자로서의 야심이 루시아의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주님께선 과거 형제자매들을 모두 불러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루시아가 10살도 채 되지 않았던 때.

마기우스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지위나 체면, 명예,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오로지 정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라.

“그것이, 케프렌의 이름을 등에 짊어진 자가 추구해야 할 가장 올바른 모습이라고요.”

마기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자신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첫째 딸은 그 말은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었다.

“너도, 어쩔 수 없는 케프렌의 자손이구나.”

“가주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쿵!

루시아는 그대로 땅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마기우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마기우스는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한 달 뒤.”

“네.”

“아렌의 성인식이 있을 것이다. 이미 북방의 일로 크게 미뤄졌기에, 이번엔 정식으로든 약식으로든 반드시 치러질 테지.”

그리고 그 성인식에서.

“너와 아렌, 둘 중 하나를 소가주로 삼겠다.”

그 말은 즉.

그 성인식에서,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러니, 단 한 점의 후회가 없도록, 준비하도록 하거라.”

“가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 * *

그로부터 하루 뒤.

“환영합니다, 네르하 공자님.”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사방팔방에서 폭죽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환영인사가 들려온다.

그야말로 수천에 달하는 인파가 1층에 모여 한 사람을 필사적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네르하는 그런 마법사들의 인파에 손을 흔들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마탑의 환대에 감사한다.”

그야말로 1레벨의 수습 도제에서부터 7레벨의 마스터까지.

그란시스 마탑 본탑에 속해 있는 모든 마법사가 동원된 환영 퍼레이드였다.

이들이 이런 행사를 기획한 이유는 간단했다.

헤르메스가 정식으로 종료된 지금 이 순간부터.

이들 모두가, 네르하의 수하가 되었으니까.

0